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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샤넬백을 버린 날,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
최유리 지음 / 흐름출판 / 2019년 9월
평점 :
-20200930 최유리.
연휴 첫날이었다. 출근 안 한다!!! 신나서 드립 커피, 콜드브루 라떼, 디카페인 드립 커피, 세 잔이나 마셨다. 카페인 장전하고 읽던 책에 영화 ‘이터널 선샤인’이 소개되었다. ‘형광 주황’ 후드를 걸친 등장인물이 자꾸 언급되어서(그래 여태 안 봤다) 거의 이용하지 않던 VOD서비스를 검색해보니 영화가 있었다. 오늘은 이거 볼 거야! 읽기를 잠시 쉬고 백만 년 만에 영화를 보았다. 이제야 이 좋은 걸. 짐 캐리랑 케이트 윈슬렛이 저렇게 젊었다니. 불쑥불쑥 터지는 눈물을 몇 차례 닦아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 영화를 소개한 것만으로도 이 책은 큰 역할을 했다 싶었다.
7년이나 윗학번인 언니를 잘 알지 못했다. 가까이에서 말하는 모습을 지켜본 건 몇 년 전 대학원 사은회에 참석했을 때였다. 같은 지도교수님 제자로 박사 학위를 준비하던 언니는 교수님께 신변의 고충을 털어 놓으며 하염 없이 눈물을 흘렸다. 거의 처음 보는 사이이다 보니 아프구나 저분도, 예전 나처럼, 생각만 하고 별다른 위로를 건네지 못했다.
대학원에 가서 수료하고 논자시까지 보고 나서야 내가 연구나 전공 학문에 관심도 애정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천 만원 넘는 깨달음ㅋㅋㅋ 석사 학위를 포기했다. 재미 없는 걸 읽고 쓸 시간에 좋아하는 책이나 읽고 쓰고 싶은 걸 쓰기로 했다.
우는 모습만 기억에 남았던 언니도 박사 논문을 포기했다는 소식을 나중에 접하게 되었다. 대신 옷을 좋아하는 취향과 강점을 살려 패션 힐러, 옷에 대한 멘토링을 해준다고 했다. 패션에 대한 책을 냈다길래 언니의 이름을 검색해 언니가 블로그, 브런치에 쓴 글들과 유튜브에서 옷에 관해 팁을 주는 영상을 찾아보았다. 나는 옷을 잘 모르고 그래서 셔츠 소매를 예쁘게 접어 입거나 이런 저런 옷을 겹쳐 입는 사람이 마냥 신기했다. 하물며 일반인 대상으로 옷차림 컨설팅하는 직업도 있구나, 하고 또 신기해했다. 다시 한참 후 도서관에 언니의 두 번째 책이 나왔길래 빌렸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좋았다.
낮은 자존감과 사랑 받고 싶은 열망, 인정 욕구 때문에 정작 스스로가 원하는 바를 모르고 엉뚱한 일에 에너지를 쏟으며 힘들게 살다가 자신을 좋아하게 된 과정이 담겨있었다. 사진 전시회에 가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면서 저자는 스스로 약점이라 여기던 특징을 강점으로 바꿔 활용하게 되었다. 아마 다른 수많은 자기계발서와 심리치유에세이에서 닳고 닳도록 다루었을 내용일 거라 짐작은 되지만, 이런저런 가르침과 조언이 좋게 읽히고 잘 받아들여졌다. 언니는 (생각보다) 글을 잘 썼다. 자기가 겪은 힘든 상황을 담담히 풀어놓으면서 느끼고 깨달은 점들을 차분히 잘 전달했다. 이 책은 패션에 중점을 둔 책은 아니지만 작가가 하는 일이 옷에 관한 것이다 보니 옷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마지막 부분에 사지 말아야 할 옷 목록은 제법 실용적이다. 책이나 사람에도 적용해 볼 수 있을까?
“이런 옷은 제발 사지 마세요!”
1. 질이 형편없는 옷
2. 디테일이 많은 옷
3. 레이어드 되어 박음질된 옷
4. 너무 배색이 잘된 옷
5. 튀는 상의
6. 스타일링이 필요 없고 할 수도 없는 옷
7. 사이즈가 맞지 않는 옷
8. 길이 수선이 불가능한 옷
9. 소매가 너무 독특한 옷
10. 동일한 디테일이 반복되는 옷
11. 색상, 실루엣, 소재가 동일한 분위기를 표현하는 옷
12. 튀는 색상이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옷
13. 주로 입는 하의와 동일한 핏 혹은 실루엣의 아우터
14. 디자이너 브랜드의 카피 제품
15. 싫어하거나 불편해하는 소재의 옷
16.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인기 있는 옷
17. 나의 라이프 스타이로가 동떨어진 옷(가짜 자아를 반영하는 옷)
18. 브랜드 정체성이 너무 두드러지는 옷
음...넌 그냥 옷 사지 마라 ㅋㅋㅋ하는 것 같음...
‘이터널 선샤인’에서 클레멘타인은 “나 못생겼어? 나 버리지 마”하고 조엘에게 끝없이 애정을 확인하고 갈구한다. 조엘이 “너 예뻐”하고 말해줘서 좋았다. 제멋대로 이상하게 굴어도 곁에 있던 다른 사람을 포기하고 시작할 만큼 강렬했던 마음은 시간이 갈수록 시들해지고 상대의 단점만 보게 되어 결국 심한 말까지 던지게 된다. 잃고 나서야 뒤늦게 후회하고 떠난 사람을 마구 흉보다가 당장의 괴로움을 덜어내려고 연인에 관한 기억 자체를 없애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지우려고 애써도 지울 수 없는 기억과 마음이 있다. 몰랐는데 알게 되었다.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할 줄 알아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도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샤넬은 커녕 면세점에서 30만원대 가방을 살 때도 고민을 많이 했다. 그렇게 사고 나서는 물론 들고 다니지도 않지… 소비가 나를 채워주지 못한다는 걸 일찍 알아차린 건 그나마 다행이다. 나와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는 의존과 집착을 점차 덜고 혼자여도 잘 지내는 법을 배우려고 애쓰는 중이다. 불안 대신 편안함으로 마음과 시간을 채우고 있다. 점점 더 나아지겠지. 나아지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