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개정판)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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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7 옌롄커.

누나라고 부르도록 해.

옌롄커의 소설을 세 권째 읽었다. 사서, 딩씨마을의 꿈, 그리고 이 책.
사단장의 아내 류롄과 취사병 우다왕의 짧은 사랑이야기. 둘다 배우자가 있지만 사택에 단둘이 있는 시간이 길었다. 류롄이 먼저 우다왕을 유혹했고, 마오 쩌뚱의 말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가 새겨진 나무 팻말이 유희의 도구로 이용된다. 식탁 위에 있던 팻말이 다른 장소에 놓이면 우다왕은 류롄의 부름에 응해 달려갔다.

둘은 사단장이 없는 한 달 간 짐승처럼 섹스를 하고 서로에게 빠져버린다. 가장 마음에 든 건 두 사람이 경쟁하듯 마오 쩌뚱이 새겨진 온갖 상징들을 파괴하는 장면이었다. 내가 너보다 더 사랑해! 못 믿겠으면 반혁명분자로 고발해! 하면서 마오 쩌뚱 조각상을 부수고, 마오쩌뚱이 새겨진 약통, 거울, 그릇, 세수대야에 못을 박고, 깨고, 낙서하고, 책과 초상화를 찢고, 구멍내고. 완전 미친놈들 같은데 난 더 미친놈인가 이상하게 쾌감 터졌다. 신성과 권위와 대의를 깨부수고 모욕하는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이나 영화가 좋다. 더구나 그게 자기 사랑을 증명하려는 시도라면 야이 미친놈들아 ㅎㅎㅎ하면서 귀엽고 짠했다.

모든 사랑은 끝이 있다. 류롄과 우다왕의 짧은 사랑 이후 자세히 전해지지 않은 후일담을 얼핏 들으면 15년 간 별 문제 없이 잘 살아온 것 같고, 그래서 그들의 인생 자체는 비극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어지지 않고 끝난 사랑 만을 본다면 이야기 자체는 비극이다. 15년 후 다시 사택을 찾는 우다왕의 마음은 어떤 것인지 나는 잘 알 수 없었다. 팻말을 간직하듯 그토록 오래 사랑이 남아 있던 건가요. 팻말을 돌려주는 건 사랑을 반납하는 걸까, 다시 유희를 시작하고 싶은 마음일까.

관계와 마음은 상황과 시절과 흐름에 따라 끊임 없이 흔들리고 변해간다. 우리는 그 물결에 몸을 맡기고 둥둥 떠내려간다. 그러다가 나뭇가지며 돌부리에 걸릴 때마다 누군가도 나와 같은 나뭇가지며 돌부리에 걸리길, 그렇게 잠시라도 함께 머무르길, 하고 비는 수 밖에 없다. 대롱대롱.

+밑줄 긋기
-소설의 첫 머리. 패기 쩌는 선언이라 좋았다. 모름지기 소설가라면 소설에 관한 저만큼의 확신이 있어야지. 나는 지금부터 진실을 보여주마, 하며 기대하게 만드는 시작.

‘소설은 삶의 많은 진실을 유일하게 대변한다. 그렇다면 소설의 방식으로 이를 표현하기로 하자. 어떤 진실한 삶의 모습은 허구라는 교량을 통해서만 비로소 확실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면 이는 소설 속 사건이기도 하고 삶 속 사건이기도 하다. 혹자는 삶이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라는 소설 속 사건을 재현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게 김성모식 후려치기 같겠지만 여기서 이렇게 말하니 뭔가 있어 보이잖아...솔직히 그렇다. 어떤 일들은 그냥 그렇게 일어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지만 벌어지는 사건들.

“저 목욕 다 했어요, 누님. 무슨 일 있으세요?”
이때 방 안에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샤오우, 어서 들어와.”
사건의 전모가 이처럼 간단하고 두루뭉술했다. 너무 많은 과정과 부분이 생략되어 있었다. 사실 이 사랑이야기의 발생과 결말도 이처럼 간단하고 직접적이어서 반드시 있어야 할 수많은 과정과 부분을 결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과정과 디테일이 언제나 힘 있고 위대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생략이 더 힘 있고 확실하여 사물의 발전과 변화를 더욱 가속할 수 있었다. 이야기 속 현재처럼 우다왕은 생략 속에서 문을 밀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그는 방 안에 불이 켜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창문을 통해 새어 들어오는 밤 기운이 창문 바로 밑을 더욱 신비하고 흐릿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방 안의 다른 모든 곳이 무거운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손을 뻗어도 손가락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입대하기 전에 살았던 시골에서 무수히 보았던 가장 깊은 골목과 우물 같았다. 방 한가운데 선 우다왕은 갑자기 강력한 불빛 아래 있는 땅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 신비한 어둠에 완전히 흡수된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구원을 요청하듯 시험삼아 매력과 마력을 동시에 지닌 한 마디를 내뱉었다.
“누님!”

-이거 왜 나 다 알 거 같지...망한 생은 아닌가 봄...

‘그 짧은 한 달 동안 두 사람은 본능의 주인이 되었고 동시에 본능의 노예가 되었다. 성의 유희가 두 사람의 삶에 거의 전부이자 인생의 목표가 되었다. 두 사람은 성을 아주 얕고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으로 만들었고, 아주 깊어 속을 알 수 없는 것으로 만들기도 했다. 한 푼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가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으로 만들기도 했다. 수천 년간 휘황한 광채로 반짝이게 했다가 또 수천 년간 타락을 대표하는 것으로 만들기도 했다. 두 사람은 사랑의 행위를 할 때마다 섬세하고 진지한 자세로 몸과 마음을 다했다. 그리하여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욕은 이미 뼛속 깊은 곳,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소리, 냄새, 찰나와 영원, 눈물, 사랑, 헤어짐. 우상파괴 뒤에 닥치는 탐미까지...장인이네ㅎㅎㅎ...

‘고요함 속에서 천천히 두 사람의 몸을 타고 흐르던 땀방울 소리가 달이 나뭇가지 사이를 지나는 듯 미세하게 났다. 그녀의 몸에서 발산되는 증롱에 쪄낸 듯한 설백의 땀 냄새와, 그의 몸에서 발산되는 강물이 증발된 것 같은 누런 땀 냄새가 한데 섞여 방 안 가득 흰빛이 진하고 누런빛이 약한 소금 향기를 이루었다. 거기다 며칠 동안 창문을 열지 않은 탓에 가구와 벽에서 발산되는 후텁지근하면서도 반쯤 썩은 듯한 냄새가 두 사람 사이를 감돌면서 진부하면서도 신선하고 찰나적이면서도 영원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 순간 그는 그녀를,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웬일인지 류롄이 눈물을 흘렸고, 그 역시 따라 울었다. 두 사람의 마비되었던 내면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이었다. 미친 듯한 성애가 그들이 한 번도 의식하지 못했던 위대한 사랑을 깨닫게 해준 것 같았다. 어쩌면 두 사람 모두 이미 마음속 깊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느꼈지만, 필연적으로 남천지북으로 하늘과 땅처럼 멀어져야 하는 현실을 인식한 것인지도 모른다. 환란은 끝이 없었지만 고통은 항상 서둘러 찾아왔다. 이는 모든 인간이 공통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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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0-09-17 21: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나 이거 되게 재밌을 거 같은데 ㅋㅋㅋㅋㅋㅋ 이 집 리뷰 맛집이네여! 나도 사야지~~ (부럽다 망한 생은 아닌가 봄...)

반유행열반인 2020-09-17 21:31   좋아요 1 | URL
야하고 후다닥 잘 읽히고 저는 리뷰 맛집이라기 보다 뭐랄까 아 뭘까요. ㅎㅎㅎㅎㅎ

하나 2020-09-17 21:47   좋아요 1 | URL
장인 💚 저 작년에 인문학 프로그램 운영해서 학생들이 옌롄커 책 독후감 되게 많이 냈는데 단 한번도 혹하지 않았다구요!! ㅋ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09-17 21:52   좋아요 1 | URL
아니 거참 학생들은 좋은 책 자기들만 보고 왜 나한테 하나님한테 안 권해준 거야...저는 이제라도 봐서 다행 ㅋㅋㅋ한 권 하시죠 ㅋㅋㅋ

하나 2020-09-17 21:59   좋아요 1 | URL
그르니까요~ ㅋㅋㅋ 반유행열반인님 매력에서 매일매일 헤어나올 수가 없네여 ㅋㅋㅋㅋ 이제라도 봐서 다행이래.. “누나라고 부르도록 해” 제목부터 장인 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09-17 22:00   좋아요 1 | URL
마음에 드셨다면 하나님도 누나라고 부르도록 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09-17 22:03   좋아요 1 | URL
아 그리고 제목은 책 대사 그대로 따온거에요...ㅋㅋㅋ더 읽고 싶으시죠.

하나 2020-09-17 22:03   좋아요 1 | URL
“누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진짜 너무 웃겨여 ㅋㅋㅋ 울렸다가 웃겼다가 어쩌라는 거예여!! ㅋㅋㅋ 책은 주문했읍니다 💚

반유행열반인 2020-09-17 22:06   좋아요 1 | URL
그렇지 인민을 위해 제대로 복무하는 군 ㅎㅎㅎㅎ얼른 읽으시면 이렇게 끝없이 놀 수 있는데 또 막상 읽으시고 아 개빻은 야설이다 하실지도 몰라요 ㅋㅋㅋ

하나 2020-09-17 22:07   좋아요 1 | URL
그런 거 같긴 했지만ㅋㅋㅋ 제목부터 패기가 느껴져서 마음의 준비하고 들어왔죠 ㅋㅋㅋ 이 누나 증맬 마성의 누나

하나 2020-09-17 22:11   좋아요 1 | URL
마오쩌뚱 조각상 뿌시는데서 이미 이 책은 존재가치를 증명했을 거 같고요 ㅋㅋㅋㅋㅋ 얼른 읽고 올게여 ㅋㅋㅋㅋㅋㅋ

바다그리기 2020-09-17 2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야하고 후다닥 잘 읽히는 책이라니
참으로 적절합니다.^^
저 역시 다 알것 같긴 하지만(이 나이에 모르면 그거야말로 비극일테니 무조건 아는걸로..) 어쩐지 이토록 신성과 타락, 유희와 열정을 오가는 끝장판 사랑은 죽을 때까지 경험 할 수 없을거란 짐작에 쓸쓸해지네요. ㅜㅜ
얼마전 ‘바둑 두는 여자‘를 다시 읽고 처음과 너무 다른 감동과 놀라움으로 중국 작가들의 책을 읽어야겠다 생각 했었는데 이 책도 꼭 읽어야겠어요.
할 일은 많고 시간은 없는데 읽고싶은 책은 너무 많은 현실.
또 한권의 숙제를 주신 님께 원망 0.001 스푼 담긴 감사를~ ㅎㅎ
대리만족(주어는 없습니다)을 위해 이런 책도 자주 올려주세요!!

반유행열반인 2020-09-18 07:02   좋아요 1 | URL
저런 사랑 하면 인생 힘들게 살지 않을까요...바쁜 와중에 즐거운 독서로 위로 받으며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ㅎㅎㅎ

파이버 2020-09-17 22: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제목이 진지해보여서 시도해 볼 생각을 못했던 책인데 이런 내용이었군요....
옌롄커 소설은 「딩씨 마을의 꿈」만 봤었는데 사뭇 느낌이 다르네요! 사랑에 눈이 멀어 이것저것 부숴버리다니ㅎㅎ 딩씨 마을이 고구마라면 이 소설은 사이다 같은 매력이 엿보이는 것 같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09-18 07:03   좋아요 1 | URL
딩씨 마을의 꿈도 보셨군요. 파이버님 저랑 겹치는 독서 제법 많으세요. 고구마와 사이다라니 막 두 권 번갈아 봐야 할 갓 같은 재미있는 비유에요 ㅋㅋㅋ

얄라알라 2020-09-17 23: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리뷰 맛집^^ 언어 달인이십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09-18 07:04   좋아요 0 | URL
과찬이십니다 ㅋㅋㅋ 맛집은 다른 곳에 달인은 옌롄커 작가 ㅋㅋ 감사합니다.

scott 2020-09-17 23: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발췌문단에 읽고 싶을정도로 감칠맛나네요 ㅎㅎ 모든 사랑 끝이 있다는데 열반인님에 엔레커 페이퍼는 중독성이 있어요 ^.~

반유행열반인 2020-09-18 07:06   좋아요 0 | URL
제가 이번에는 책 홍보를 잘했네요... 중독성 까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의 소재는 중독적 사랑이네요ㅎㅎ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0-09-18 0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18 1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