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형의 전설 외 - 한국소설문학대계 29
장용학 지음 / 동아출판사(두산) / 1995년 1월
평점 :
절판


-20260225 장용학.

‘원형의 전설’을 알게 됨과 동시에 이 책을 알려주신 분이 이 이야기의 고갱이 부분도 같이 알려주셔서, 스포일러 된 채로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보는 동안 영화 ‘올드보이’도 생각나고(감금, 남매, 부녀, 간수의 응징) ‘칠조어론’이나 ‘죽음의 한 연구’(동굴, 벼락, 여러 사변)도 생각났다. 그렇지만 이 작품이 발표된 게 1962년이니 아무래도 내가 먼저 접한 그 창작물들이 이 책을 닮았다고 하는 게 맞겠다. 두 박 선생님들께서 이 작품을 안 보셨다면 우연의 일치란 참 기괴하고, 또 생각보다 같은 소재들이 끝없이 변주되고 있구나 싶다. 장 꼭또 선생이 앙팡떼리블을 1929년에 발표했으니 기어올라가자면 끝도 없다.

소설의 초반부는 한국전쟁, 전후 소설 느낌이었다. 주인공 이장은 키워준 부모가 친부모가 아닌 걸 아는 동시에 양부모를 공산군 손에 잃었다. 공산군 의용군(총알받이)으로 끌려갔다가, 죽은 국군 옷을 위장으로 입었다가 다시 국군 무리에 섞이고, 그러다가 북한에 포로로 잡히고, 포로로 잡혔지만 의용군으로도 국군으로도 인정 받지 못해 모든 무리에서 배척 당했다. 이념 갈등 사이에 희생되는 개인의 고통을 극적으로 그리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자신의 뿌리를 찾던 이장은 자기 딸 윤희를 임신시킨 털보영감이 자신을 뱃속 아이의 아버지로 위장하려고 시도하는 패륜적 상황에서 윤희가 자살하여 또다른 상처를 얻는다.
자신이 태어난 마을 방골을 찾아가 어머니 오기미가 홀로 자신을 낳다가 집에 벼락이 치는 바람에 죽고만 사실을 알고는, 그 아버지가 누구였는지 추적하다가 오기미의 오빠 오택부가 자신의 친부라는 확신을 하게 된다.
북한에서 다시 교육을 받고, 남파 간첩이 되어 교수로 위장해 학생들을 가르치고, 분단 국가에서 그의 교차성은 국가와 조직에 이용당하고, 그런 현실에서 개인의 삶이 안온할 수 없는 상황을 보여주었다.
이후로는 친모 오기미를 강간하여 자신이 잉태된 사실을 오택부로부터 자백 받고자 하다가 오히려 동굴에 갇혀 한 해를 보내게 된 이장이 동굴을 탈출하여 복수극을 벌이는 전개이다. 우연히 흑나비다방에서 만나 마음에 두게 된 마담버터플라이 양지야가 오택부의 혼외 자녀인 것을 알고는 그녀를 사랑하는 동시에 오택부를 응징하는 데 그녀를 이용하기도 한다. 인간과 인간성, 인간적인 것에 대해 계속 추상적인 고뇌를 펼치는 것은 조금 지루하긴 했지만, 탄생과 잉태의 장면으로 회귀하는 듯한 결말(벼락, 양지야와의 결합)은 강한 인상을 남겼다.

300쪽이 되는 소설 하나 만으로도 장편 한 권을 엮었을 법한데, 내가 구한 동아출판사의 ‘한국소설문학대계’는 현대소설사 백년을 집대성한다는 원대한 목표로 장용학 선생님의 중단편도 네 편 더 실어주었다. 백권을 목표로 한 시리즈는 권수를 미처 다 못 채우고 중단된 걸로 보이지만… 초판대로 한자 표기해서 가격도 비싸게 모 출판사에 출간되어 있지만, 이 정도 훌륭한 작품을 남긴 작가가 잘 알려지지 않았고, 책을 접하기도 쉬운 상황이 아닌 것이 마냥 안타까웠다. 수능 국어 지문으로도 나올 만하지 않나, 싶다가도 주요 소재가 근친상간이어서 그것도 안 되겠구나… 좋은 작품을 구전으로 알려주신 이웃님께 감사를 드리며… 중단편을 마저 읽기로 했다.

‘요한 시집’은 포로 수용소를 나온 동호가, 수용소에서 자살하고 그 시체가 다른 수용범들의 증오로 훼손된 누혜의 어머니의 집을 찾는 이야기이다. 최인훈의 ‘광장’이나 영화 ‘공동경비구역JSA‘에서 거제도 수용소에서 이념 차이로 인한 또다른 내전이 있었다는 것을 얼핏 알게 되었다. 같은 소재의 소설들이 검색해보니 제법 되는 것 같다. 기회가 되면 두루 읽어보고 싶다.

‘비인 탄생’은 학교에서 잘리고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지호(삼수)가 어머니와 산 속 굴에 살다가 어머니도, 연인도 잃고 비인으로서의 인간을 외치며 뭔가 다른 존재가 된다. 지호가 문득문득 사라지는 장면이나, 종희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던 장면의 회상이나, 종희의 남편이 될 뻔한 녹두 노인이 등장하는 것이나, 어머니의 시체를 휘발유와 장작으로 태우는 장면이 환상 같기도 하고 강렬하기도 하지만 앞의 글들보다 더 인간에 대해, 세계에 대해 추상적으로 주절주절 대는게 읽기에 쉽지도 재미있지도 않았다. 힘들게 읽고 난 다음 소설 ‘역성서설’이 비인 탄생 2부란 걸 확인하고는 한숨이 나왔다. 부제와 마무리만 2부이지, 전혀 다른 이야기 같기도,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쓴 것 같기도 했다. 갑자기 기계인간과 거인과 괴물의 격투 같은 게 나오고, 여기서도 결말부는 불로 활활 태우고… 중편 두 편은 7년 간격으로 퍽 떨어져 나온 것인데 나중에 나온게 더 괴이하고 재미없는 건 매일반이었다…

‘현대의 야’는 현우가 시체 치우는 부역에 나갔다 산 채로 시체 더미에 묻히고, 거기서 살아 나온 이후 시체 더미나 다름 없는 법과 위증과 폭력으로 다시 감옥에 갇혔다가 순식간에 죽어버리는 이야기였다. 작가가 젊을 때 쓴 소설들이 덜 추상적이고 더 흥미롭고 막장 전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끝없이 인간이 무엇이고 인간성이 무엇인가가 소설마다 변주되고 있는데, 그런 걸 읽을 수록 더욱더 인간이 무엇인지, 무엇이라고 이렇게 곱씹어야 하는 것일지 아리송해졌다.

전쟁 문학, 전후 문학을 30년 전 쯤엔 문학상수상작품집이나 근현대소설집 같은 걸로 많이 읽었었는데 한참을 잊고 있다가 오랜만에 전쟁 이야기를 읽었다. 박완서 선생님 소설도 전쟁 이야기이긴 하네… 단편전집을 갖추고 있으니 그것도 언젠간 읽어봐야 겠다. 이렇게 널려 있는 걸 내가 잊어버리고는 왜 한국 전쟁 소설 별로 없어...하고 있었다.


+밑줄 긋기
-낙동강 전선에 끌려 올 때까지 이장은 수없는 시체를 보았습니다. 혹은 피에 젖고 혹은 불에 타고 혹은 썩어서 거짓말처럼 뒹굴어져 있었고, 그 거짓말 위에는 파리들이 감실감실 서로 붐비면서 살아 있는 희열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죽으면 저런 거짓말이 되어서 감실감실한 희열에 덮이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살아 있다는 것부터가 거짓말인 것 같았습니다. (31-32, ‘원형의 전설’ 중. 거짓말과 삶과 죽음을 시각적으로 감실감실한 파리 떼로 그려주네. *감실감실: 사람이나 물체, 빛 따위가 먼 곳에서 자꾸 아렴풋이 움직이는 모양.)

-“왜 남자는 벼락두 안 맞구 목두 안 매나요?”
“세계란 원래 일방적이니까 할 수 없겠지.” (168)

-가다가 넓어진 데도 있었지만 벌레처럼 뱃가죽으로 기면서 비비고 나가야 했습니다. 살은 터지고 흰 토끼는 빨갛게 피투성이였습니다. 그 모양을 멀리서 보면 마치 숨통을 꾸룩꾸룩 기어 오르는 객혈 같았을 것입니다. (305, ‘요한 시집’ 중. 출생의 장면 같기도 하다.)

-어느 날 아침 조회 때, 천 명이나 되는 학생들의 가슴에 달려 있는 단추가 모두 다섯 개씩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현기증을 느꼈다. 무서운 사실이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주위는 모두 그런 무서운 사실투성이였다. 어느 집에나 다 창문이 있고, 모든 연필은 다 기름한 모양을 했다. 모든 눈은 다 눈썹 아래에 있었다. (332)

-손금이 손이 아닌 것처럼 인간성이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성이란 인간의 일면. 그 일면을 가지고 인간을 덮을 때 인간은 병들고 왜소해지고, 기만과 나태. 반인간이 된 것이다!
반인간으로 봤을 대 비인이 인간이다! 인간은 인간이 되기 위해 비인이 되어야 한다! 인간성을 파기하고 인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467, ‘역성서설‘ 중. ’비인 탄생‘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느라고 잔소리도 듣고, 돌도 쪼고 난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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