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역 이옥전집 1 : 선비가 가을을 슬퍼하는 이유 완역 이옥 전집 1
이옥 지음,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옮김 / 휴머니스트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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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19 이옥.

수능 국어에서 건진 것 중 생각나는 건 블로그 이름(내 택호)으로 ‘통곡헌’을 붙인 것이고, 또한 이옥이라는 쓸쓸하게 살다 간 개성있는 작가를 알게 된 것이다.

이옥의 글을 발췌, 재구성해 번역한 ‘선생, 세상의 그물을 조심하시오‘와 ’일곱 가지 밤‘을 제법 재미있게 읽었다. 모의고사의 지문으로 나올 때도 그랬다. 그런데 전집 1권은 부, 서(편지), 서(서문), 발, 기, 논, 설, 해, 변, 책 온갖 짧은 글들을 다 모아놨다보니 초반부에는 읽는 재미가 덜했다. 한문 글 역시 번역이 꽤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후반부 절반은 글의 형식 덕인지, 글맛이 살아서인지 그럭저럭 흥미롭게 금세 읽었다. 전집 2, 3권은 목차를 보니 조금 더 재미있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네…

전집의 제목을 따온 ’선비가 가을을 슬퍼하는 이유‘는 막상 이유라고 들어보니 양의 기운이 쇠하는 때니 섬세한 남자 선비가 이를 알고 슬퍼할 수 밖에, 선비 아닌 남자는 사느라 바빠서 못 느낌, 여자도 양기랑 크게 상관 없으니 오히려 봄에 반대로 더 슬퍼함, 뭐 그런 헛소리였다. 불교랑 오행은 까던 사람이 음양론에는 또 심취하고 이러저러한 이유를 대는 게 조금 깨는 부분이었다. 그렇지만 나머지 글들은 제법 만연체에 가까운, 그러나 대부분 적확한 수사들이 붙은 문장들이 많아서 재미있는 글도 많았다. 정치의 길로 못 나아가고 쫓겨나서 한가한 덕에 이러저러하게 많이 써놨으니, 작가 그대의 불행은 후대의 읽는 이에게 즐거움이라서 조금 미안하기도 하다.


+밑줄 긋기
-이상하다! 먹은 누룩이 아니고, 책에는 술그릇이 담겨 있지 않는데 글이 어찌 나를 취하게 할 수 있겠는가? 장차 단지를 덮게 되고 말 것이 아닌가! 그런데 글을 읽고 또다시 읽어, 읽기를 삼 일 동안 오래했더니, 꽃이 눈에서 생겨나고 향기가 입에서 풍겨 나와, 위장 속에 있는 비릿한 피를 맑게 하고 마음속의 쌓인 때를 씻어내어,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이 즐겁고 몸이 편안하게 되어, 자신도 모르게 무하유지향에 들어가게 한다. (267-268, ‘묵취향‘의 서문 중. 제본한 논문 냄비받침, 하듯 단지 뚜껑, 하는 것도 재미있는 표현이고, 나도 저런 책 읽고 싶다. 어딨냐...)

-석공으로 하여금 지금에 처하게 했다면 남산 아래 두어칸 초가집에 한 이랑 시든 꽃을 심고, 날마다 용자유의 무리들과 더불어 제멋에 겨워 스스로 읊조리는 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웃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시를 보고 지목하여 배척하게 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가 어찌 문단에 올라 사맹을 주도하며 깃발을 날리고 북을 울려 천하가 휩쓸리듯 그를 다르게 할 수 있겠는가? (283, 원중랑 시집을 읽고 쓴 악성 독후감. 그 정도는 아니지, 하고 평범한 문인에 불과하다고 깠다.)

-아침 꽃은 어리석어 보이고, 한낮의 꽃은 고뇌하는 듯하고, 저녁 꽃은 화창하게 보인다. 비에 젖은 곷은 파리해 보이고, 바람을 맞이한 꽃은 고개를 숙인 듯하고, 안개에 젖은 꽃은 꿈꾸는 듯하고, 이내 낀 꽃은 원망하는 듯하고, 이슬을 머금은 꽃은 뻐기는 듯하다. 달빛을 받은 꽃은 요염하고, 돌 위의 꽃은 고고하고, 물가의 꽃은 하가롭고, 길가의 꽃은 어여쁘고, 담장 밖으로 뻗어 나온 꽃은 손쉽게 접근할 수 있고, 수풀 속에 숨은 꽃은 가까이 하기가 어렵다.
(…) 붉고 흰 온갖 꽃들의 품위 있는 빛깔과 고운 향기를 어느 누가 좋아하지 않겠는가? 오직 내가 이를 가장 좋아하지만 봄날 비바람과 함께 떠나감을 두려워하는 까닭에 처음부터 지니지 않는 것이네. 세상 사람들의 사랑은 천박한 사랑이요, 나의 사랑은 절실한 사랑이라네.
(428-429, ‘꽃에 대하여’ 중. 북한산 등반기에서도 아름답다는 말을 거듭하여 열거하였는데, 여기에서도 다양한 꽃에 대한 감상을 나열하고 애정을 표출하는 걸 보면 이옥 아저씨는 꽤나 탐미주의자였던 것 같다. 그래서 문장 멋부리다가 정조한테 혼남…)

-하루의 저녁도 오히려 슬퍼할 만한데, 일 년의 저녁을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일찍이 사람이 노쇠함을 슬퍼하는 것을 보니, 사십 오십에 머리털이 비로소 희어지고 기혈이 점차 말라간다면 그것을 슬퍼함이 반드시 칠십 팔십이 되어 이미 노쇠한 자의 갑절은 되는 것이다. 아마도 이미 노인이 된 자는 어찌할 수 없다고 여겨서 다시 슬퍼하지 않을 것인데, 사십 오십에 비로소 쇠약해짐을 느낀 자는 유독 슬픔을 느끼는 것이리라! 사람이 밤은 슬퍼하지 않으면서 저녁은 슬퍼하고 겨울은 슬퍼하지 않으면서 유독 가을을 슬퍼하는 것은, 어쩌면 또한 사십 오십 된 자들이 노쇠해감을 슬퍼하는 것과 같으리라!
아! 천지는 사람과 한 몸이요, 십이회는 일 년이다. 내가 천지의 회를 알지 못하니, 이미 가을인가, 아닌가? 어쩌면 지나 버렸는가? 내가 가만히 그것을 슬퍼하노라.(444-445, ‘선비가 가을을 슬퍼하는 이유’ 중. 이옥 아저씨는 이 글 쓸 때 중년 무렵의 선비였나보다. 난 늦여름이라 우기며 초가을 문 앞에서 덜 슬퍼할 거야. 선비도 아니니까 안 슬퍼할 거야 흥)

-문장의 공교로움과 졸렬함은 진실로 작성하는 속도에 있지 않으니, 문장을 취하는 길이 진실로 일찍 냄으로써 뛰어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하지만 시험관이 오색에 끝내 눈이 멀고, 문벌을 중시하는 습속에 젖어 시험관이 일찍 거두는 것은 또한 어쩔 수 없는 데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일찍 거두기 때문에 새로 배우는 선비나 재능이 다소 모자라는 선비는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다. 그리하여 권세 있는 자는 다른 사람을 시키고, 재물 있는 자는 돈 주고 사고, 글에 능한 자는 이들과 교환하여 온 세상이 도도히 모두 그러하다. (454, ‘과책’ 중. 과거 개혁론. 타임어택의 슬픔은 조선시대에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내가 금생의 나도 모르는데, 전생의 나를 알 수 있겠는가? 내가 모른다면 남들도 모를 것이고, 전생을 오히려 모른다면 내생도 모를 것은 금생과 같을 것이다. 전생과 후생이 이미 서로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바로 타인이다. 타인이 비록 귀혀져서 천선이 된다 해도 내게 무슨 영광이 되겠으며, 천해져서 짐승이 된다 해도 내게 무슨 욕이 될 것이겠는가.
굼벵이가 변하여 매미가 되고, 풀벌레가 변하여 호랑나비가 되고, 꿩이 변하여 이무기가 되는데, 윤회가 진실로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이와 같은 것이다. 버들에서 우는 괴로움과 꽃에서 춤추는 즐거움은 이미 기어 다니는 벌레들과 관계가 없는 것이고, 이무기는 매를 보고도 엎드리지 않을 것이니, 후생의 영욕이 진실로 금생에 무슨 관계가 있어서 권면하고 징계할 수 있겠는가? 이러니 부처의 설법은 공교로운 듯하지만 실로 졸렬한 것이다. (…) 나는 꼭 ’윤회가 없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게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을 움직이기에는 부족하다‘고 말해둔다.
(462, ’축씨‘ 중. 윤회 탈탈 터는 소리. 예전에 친구에게 나도 이옥이랑 비슷한 윤회관을 이야기했더니 다시 태어나는 걸 자각해야 환생이라고 했다… 이옥은 이외에도 불가에 대해 비판을 많이 한다. 다음에 실린 ’오행‘이라는 글에서는 오행의 상생 상극에 대해서도 비판하면서, ’오행에 무엇이 서로 상생하지 않는 것이 있‘(465)느냐고 한다. 그렇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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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6-02-19 15: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오, 이름자에 보배 옥鈺자 쓰는 남자는 김승옥에 이어 딱 두 번째 봅니다. ㅋㅋㅋ (왜 만날 헛소리만...)

반유행열반인 2026-02-19 16:40   좋아요 1 | URL
저는 쇠금 안 달린 옥 자를 쓰는데 그래서 김승옥한테 내적 친밀감 느꼈었는데 한자가 다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