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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4
제인 오스틴 지음, 류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평점 :
K-드라마에는 꼭 러브라인이 들어가 있다는 외국인의 댓글을 본 적 있다. 요지는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러브라인이 작품에 몰입을 방해한다는 거였다. 나 또한 필요 이상으로 러브라인에 집착하는 K-드라마가 질려가지고 멀리한지 꽤 오래됐다. 이제 연애 이야기는 보는 거 말고 듣는 걸 더 좋아한다. 아 물론 깨소금 쏟아지는 염장질 연애가 아니라 서로 지지고 볶는 애간장 연애 말이다. <오만과 편견>은 그런 대환장파티 연애사를 엿듣는 기분으로 읽었는데, 아주 그냥 짭짤하고 쏠쏠한 깨알재미가 있어 연애세포가 소멸한 분들도 좋아하리라 확신한다. 자고로 인생이란 사랑과 평화 아니겠습니까.
딸부잣집의 차녀인 엘리자베스 베넷을 주인공으로 한 이 작품은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사랑과 전쟁이다. 그녀의 옆 동네로 한 공작이 이사를 오는데, 어쩜 인물 좋고 사람 좋고 돈도 많은 박보검 같아서 온 동네 사람들이 난리가 났다. 어떻게든 저 총각을 울집 딸내미랑 결혼시키겠다는 엄마들의 열기는, 한정판 샤넬 백을 사러 가는 백화점 VIP들보다도 더 뜨거웠다. 이 훈남에게는 미남에다 갑부인 절친이 있었는데 전신에 오만함을 둘러서 모두의 공분을 샀더랬다. 여튼 이 오만한 미남은 엘리자베스와, 훈남은 주인공의 언니와 이어지기까지 많은 오해를 겪는다는 뭐 그런 내용이다. 사랑보다 깊은 상처와 전쟁 같은 사랑의 무한 반복이랄까.
여러 후보자가 주인공 집안을 거쳐가는데 개중에는 약간 모자란 친척도 있었다. 성직자가 되기 전에 결혼부터 하려는 이 친척은, 주인공 집안의 재산을 상속받겠다는 속내를 드러내왔다. 이 당시는 아들이 없는 가문의 재산을 다른 친척에게 넘겨서, 생판 모르는 가문에게 재산이 넘어가는 사태를 방지하였다. 여하튼 베넷 가문은 이 친척이 누구와 결혼을 하든 눈뜨고 코 베이게 생겼고, 그러므로 반드시 딸들을 좋은 가문에 시집보내야 하는 초 비상사태이다. 그렇다고 내키지 않는 남자와 어떻게 결혼하랴. 그래서 엘리자베스에게 퇴짜 맞은 친척을, 그녀의 절친이 잽싸게 낚아채간다. 이처럼 짚신도 다 짝이 있음을 계속해서 증명해주는 <오만과 편견>은 오직 결혼만이 인생의 전부인 커플 성사 리얼리티 쇼 채널 같은 작품이다.
언니가 별 반응이 없자, 훈남은 썸타기를 끝내고 멀리 떠나버린다. 천사 같은 언니를 가지고 놀았다는 생각에 분노한 엘리자베스의 오해는, 그것이 훈남 친구 오만남의 방해 때문이었음을 알게 되어 살기를 뿜는다. 한편 엘리자베스의 호감을 샀던 한 장교가 등장하는데 알고 보니 오만남 가문의 집사 아들이었고, 그에게서 믿지 못할 과거사를 듣게 된다. 그의 보장된 앞날들을 오만남이 대놓고 훼방놓았다는 사실을. 이놈의 프로 훼방꾼을 어떻게 요리할까 궁리하던 그녀는 오만남의 뜬금없는 프러포즈를 받게 된다. 하아, 정녕 분위기 파악 못하는 그에게 온갖 팩트 폭력을 날리고 돌아섰지만 이들의 복잡한 인연은 이제 막 시작일 뿐이었다.
자신을 막 대하는 여자에게 반해버린다는 흔한 설정의 시초가 이 작품이었나. 엘리자베스는 제 주변에 딸랑이들과는 전혀 다른 캐릭터였고, 그래서 오만남은 퇴짜 맞고도 결코 찌질하게 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오만남 저택에 초대받은 주인공과 이모 부부는, 하녀에게 오만남의 성품 칭찬을 듣고 어리둥절해 한다. 또한 그에게 당했다던 장교의 진실을 듣고 나자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얼마나 편견에 빠져있었는지를 깨닫는다. 누구보다 분별력 있다고 자부했던 그녀가 여태 한쪽 말만 듣고 신나게 디스한 꼴이었다. 아아, 어째서 부끄러움은 독자의 몫인가. 이제 오해는 풀리고 그의 잘생김이 눈에 들어올 때쯤 빅뉴스가 날아와 데이트를 방해한다. 그 문제의 장교가 베넷 가문의 막내딸을 데리고 도주했단다. 가족들이 슬픔에 잠겨 있는데 이런 멘붕속에서 결혼이 다 무슨 소용이랴. 자신은 몰라도 언니는 꼭 결혼해야 하는데 말이다. 아아, 정말이지 작가의 끝없는 하이 텐션에 그만 감동하고 말았따리..
그나저나 참 지독히도 계산적인 태도와 가식적인 인간관계를 보여준다. 더 큰 고기를 낚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 누구를 만나든지 인품과 행실을 가늠하고, 가문과 평판을 따져서 자신과 어울릴만한 그릇인지를 저울질 한다. 그도 그럴 것이, 19세기 초의 영국 여성들은 잘 사는 남성과 혼인하는 것 말고는 평탄한 미래를 기대할 수 없었다고 한다. 특히 엘리자베스처럼 아들이 없는 가정은 가까운 친척에게 재산이 넘어가는 경우도 있고 하니, 멋진 남편감을 찾는 일에 온 가족이 혈안 된 것도 지극히 정상이란다. 이토록 여성들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지만 상대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혼 가치관 때문에 이것저것 따질 수밖에 없는 현실. 이거 참 까다로운 결혼 조건은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로군.
아무튼 사건은 잘 끝나고 언니와 동생도 무사히 결혼했다는 결말이다. 물론 엘리자베스는 편견이 낳은 흑역사를 생각하며 수십 번 이불킥을 해야 했다. 거절당했던 그가 다시 나를 좋아해 줄까 싶어서. 겉으론 당돌해 보여도 속은 아니었던 엘리자베스의 태세 전환이 을매나 귀엽던지, 이러니까 오만남이 사르르 녹아버렸지요. 오만과 편견이라. 제목도 참 잘 지었다. 제인 오스틴이 K-드라마 작가로 활동했다면 시청률 다 씹어먹었을 듯. 이렇게나 밀당의 달인이면서 평생 미혼이었다는 게 의외지만 다 이유가 있었겠지. 원작을 읽었으니 이제 영화도 봐야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