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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5월
평점 :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창녀, 마리아의 이야기. 파울로 코엘료가 통찰했던 '11분'에 관한 철학은 이미 많이 유명하다. '동정녀'로 태어났던 마리아가 '창녀'가 되기까지, 그녀가 원하고 바란 것은 무엇이었을까. 마리아 앞에 붙은 '동정녀', '창녀'라는 수식어에 초점을 맞추기 쉬운 우리에게 그녀가 들려준 <이시스 찬가>의 무게가 엄청나다.
'나는 경배받는 여자이자 멸시받는 여자이니
나는 창녀이자 성녀니
...
나는 내 아버지의 어머니이니
나는 내 남편의 누이이니
그리고 그는 버려진 내 자식이니
언제나 날 존중하라
나는 추문을 일으키는 여자이고 더없이 멋진 여자이니'
홀로 떠나는 여행길엔 책을 동행으로 삼곤 하는데 이번에도 부산에서, 마리아는 내게 많은 것을 말해주었다. 나는 섹스가 지긋지긋했다. 섹스,라는 단어를 말하며 온갖 망상과 자기만의 쾌락을 떠올리는 남자도 지긋지긋했다. 나는 그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배려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한 슬픔에 그들의 쾌락이 더해져 내게 섹스는 아주 끔찍한 어떤 것이 되었다.
'섹스에서 당신은 타자라는 매개를 통해 결과적으로 당신 자신과 관계를 맺게 될 뿐입니다. 타자는 당신이 쾌락의 실재를 발견하는 데 이용될 뿐이라는 것이지요. 반대로 사랑 속의 타자라는 매개는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 알랭 바디우, 「사랑 예찬」 중
하지만 내가 그것을 끔찍해 하면서도, 아예 관심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 내가 사랑을 갈구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남자가 왜 여자를 사는지 알 것 같다. 행복해지고 싶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사랑을 찾기 위해 떠난 여행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결코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 당장은 내가 살아가기 위해 애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마음 정리를 위해 떠난 여정이었다. 하지만 결국 내가 깨닫게 된 건 내가 많이 외로운 상태라는 것, 그것 뿐이었다. 그리고 결코 합일점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남자와 여자의 관계와 내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입시키며 외면하던 성에 대해서 조금은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된 것 같다.
'사랑은 타인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속에 있다. 그것을 일깨우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하지만 그것을 일깨우기 위해 우리는 타인을 필요로 한다. 우리 옆에 우리의 감정을 함께 나눌 누군가가 있을 때에야 우주는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나는 그와 합류했다. 그것은 11분이 아니라 영원이었다."
'우리는 또다시 포옹했다. 우리는 어떻게 단 11분이 한 남자와 한 여자를 그 모든 것으로 이끌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한참 동안을 그러고 있었다.'
"하룻밤? 마리아, 과장을 해도 정도껏 해야지. 그건 사십오 분 정도에 불과해. 아니, 옷 벗고, 예의상 애정 어린 몸짓을 하고, 하나마나한 대화 몇 마디 나누고, 다시 옷 입는 시간을 빼면, 섹스를 하는 시간은 고작 십일 분밖에 안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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