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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산책 ㅣ 말들의 흐름 4
한정원 지음 / 시간의흐름 / 2020년 6월
평점 :
시. 산책. 모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더 좋았다.
시간의 흐름 출판사에서 시리즈로 출판중인 '말들의 흐름' 책을 두 번째로 읽었다. 첫번째 책은 유진목 님의 『산책과 연애』. 그것도 모두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들이었고, 유진목 시인도 좋아해서 제일 먼저 읽은 것이다. 『시와 산책』 저자인 한정원 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지만, 앞으로 이름을 기억하고 알아보게 될 것이다. 이 두 책 말고도 시리즈가 더 많이 나왔는데, 다음으로 뭘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커피와 담배』? 아니면 『연애와 술』을 읽어볼까?
책을 읽으며 매번 느끼는 건 작가들이 자신의 글을 쓰는 것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글을 많이 읽는다는 것이었다. 내겐 책 취향이란 게 너무 뚜렷하고 좁은 영역으로 특징지어진 반면, 이 분들은 어찌나 이렇게 다양하고 폭넓게 많이 읽으셔서 내적 그릇을 키우시는지 매번 감탄을 하고야 만다. 진정한 산책가인 한정원 님도 '시'와 '산책'이라는 책 제목에 맞춰, 자신이 산책하는 일에 대해 쓰면서 또 내가 잘 알 수 없는 시인들이 쓴 시들도 짧게 옮겨와 다양한 시의 한 구절들을 느껴볼 수 있게 해주었다.
오늘 읽은 책 두 권 모두 베스트 셀러다. 그런데 '시'는 다소 어렵다고 느끼거나 공감을 덜 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이 책의 평점은 7.5 정도에 그치고 있다. 이 책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소수라는 뜻이겠지. 그래도 내겐 좋은 책이었다. 나는 8.2 정도의 점수를 주고 싶다.
사랑하는 것을 잃었을 때, 사람의 마음은 가장 커진다. 너무 커서 거기에는 바다도 있고 벼랑도 있고 낮과 밤이 동시에 있다.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아무데도 아니라고 여기게 된다. 거대해서 오히려 하찮아진다.
위로의 말은 아무리 공들여 건네도 섣부르게만 느껴진다. 위로의 한계이자 말의 한계일 것이다.
내가 보는 것이 결국 나의 내면을 만든다. 내 몸, 내 걸음걸이, 내 눈빛을 빚는다(외면이란 사실 따로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 인간은 내면과 내면과 내면이 파문처럼 퍼지는 형상이고, 가장 바깥에 있는 내면이 외면이 되는 것일 뿐. 외모에 관한 칭찬이 곧잘 허무해지며 진실로 칭찬이 될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하려면 이렇게. 네 귓바퀴는 아주 작은 소리도 담을 줄 아는구나, 네 눈빛은 나를 되비추는구나, 네 걸음은 벌레를 놀라게 하지 않을 만큼 사뿐하구나).
산책에서 돌아올 때마다 나는 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 지혜로워지거나 선량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다른 사람‘은 시의 한 행에 다음 행이 입혀지는 것과 같다. 보이는 거리는 좁지만, 보이지 않는 거리는 우주만큼 멀 수 있다. ‘나‘라는 장시(長詩)는 나조차도 미리 짐작할 수 없는 행들을 붙이며 느리게 지어진다.
행복은 그렇게 빤하고 획일적이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고 설명하기도 어려우며 저마다 손금처럼 달라야 한다. 행복을 말하는 것은 서로에게 손바닥을 보여주는 일처럼 은밀해야 한다.
사랑은 단지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지 영혼의 상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모르면 불행이 닥치는 순간 절망에 빠지게 된다. -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이것은 사랑에 관한 기록이지만, 나는 ‘사랑‘의 자리에 ‘행복‘을 넣어 다시 읽는다. "행복은 단지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지 영혼의 상태가 아니다." 행복이 내가 가져야 하는 영혼의 상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토록 자주 절망한다.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 피동적으로 얻어지고 잃는 게 행불행이라고 규정하고 말면, 영영 그 얽매임에서 헤어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가지지 못한 것이 많고 훼손되기만 했다고 여겨지는 생에서도, 노래를 부르기로 선택하면 그 가슴에는 노래가 산다.
그러니 역시 ‘행복‘이라는 낱말은 없어도 될 것 같다. 나의 최선과 당신의 최선이 마주하면, 나의 최선과 나의 최선이 마주하면, 우리는 더는 ‘행복‘에 기댈 필요가 없다. 에른스트 얀들의 시에 "낱말들이 네게 행하는 것이 아닌 네가 낱말에 행하는 것, 그것이 무엇인가 된다"는 구절이 있다. ‘행복‘이 우리에게 가하는 영향력에 휘둘리는 대신, 우리가 ‘행복‘에 무언가를 행해야 한다.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그러나 뜨거운 가슴에 들뜨는 존재. 그저 하는 일이라곤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 세사르 바예호,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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