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 박연준 산문집
박연준 지음 / 달 / 2019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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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연준 작가의 두 번째 책이다. 처음 읽었던 책은 『소란』. 너무 좋았었다. 가끔은 너무 깊이 있거나 작가님의 세계 느낌이 짙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그 책이 주는 느낌 자체가 좋았다. 부드럽고 연한 분홍빛 살결 같은 느낌. 아기 볼 피부, 혹은 입술 같은 느낌, 그래서 미세한 떨림이 감지되던 책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번 책은 다소 힘을 빼고, 작가님다운 느낌을 전하며 편하게 쓰신 것 같다. 각을 잡고 모양을 만들어 고운 것들만 골라서 내야지 하는 것과는 분명 다른 느낌이다. 편한 느낌은 좋아하지만, 그래서 다소 평이해진 느낌도 없잖아 있다. 이야기 자체가 편하게 쓰여진 걸 다듬지 않다보니 조금 길어진 느낌도 있다. 일단 모든 책은 책 자체로 충분히 좋고, 다양한 책을 읽어보자는 느낌에서는 나쁘지 않았지만, 내 취향에 맞는 책은 아니었다. 그래도 작가가 쓴 또 다른 책을 읽어보는 건 꼭 필요한 일인 것 같다. 그러니까 최소 두 권은 읽어야 하는 셈이다. 작가가 맘에 들거나 다소 맘에 들지 않더라도, 두 권의 책은 읽어보면서 판단을 보류해두고 작가의 세계에 이해를 더해보면 좋지 않을까. 난 그 일을 이번에 하게 된 느낌이었다. :)
  이야기 중에 친구 윤과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이야기가 너무 공감되서 친구들에게 읽어주고 싶어졌다. 결혼과 육아로 멀어진 친구가 한 명이 아니니 모두에게 들려주긴 어려웠다. 책 글귀를 옮겨적다가 갑자기 생각나서 인스타 피드에 올릴 만한 이미지를 만들어봤다. 모든 내용을 다 옮길 수도 없었고, 처음이라 아주 조잡했지만 그래도 내 마음이 전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가 자애로운 손길로 내 얼굴과 머리카락, 이마를 쓸어주는 게 좋았다. 마치 내 존재 전부를 쓸어주는 것 같았다. 가능하다면 더 불쌍해지고 싶었다. 할머니의 주문 같은 말이 멈추지 않길 바랐다. 행여 주문에서 풀려나 할머니가 손길을 거둘까봐, 눈을 감고 더욱 불쌍해 보이도록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후 오랫동안, 할머니는 내 이마를 짚어줄 때마다 이가 살짝 나간 그릇을 만질 때처럼 혀를 찼다. 나는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다. 사랑에는 언제나 한 방울의 연민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숨은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 인생을 이완시키는 것도 경직시키는 것도 숨쉬는 자세에 달려 있다. 무리하지 않고 나답게, 편안한 자세로 사는 일. 좋은 삶을 꾸리는 열쇠라고 믿는다.

슬픈데 눈물조차 나지 않을 때, 그리하여 마음 가장자리가 수분 부족으로 균열을 일으키며 메말라갈 때, 슬픔의 가뭄 속으로 자신을 밀어넣고 있을 때는 분명히 떠나야 한다. ‘여행‘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일 필요도 없다. 그냥 상처가 나를 데리고 가는 일에 몸을 맡기면 된다.

사람들은 마음이 아플 때 건강하고 강하게 이겨내는 방법으로 슬픔이 자신을 비껴가도록 내버려둬야 한다고 착각하곤 하는데, 이는 건강한 방법이 아니다. 멍울진 감정이나 체한 슬픔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슬픔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한다. 슬플 기회를!

무언가 때문에 상심해 있다면 자신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슬픔을 피하지 말고, 같이 여행을 가자. 상처가 나를 데리고 떠나는 여행이 끝날 무렵, 딱지 앉은 상처를 이제 내가, 데리고, 돌아오면 된다.

다정함은 자세다. 뭔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내가 도와줄게‘라고 몸으로 말하는 것. 그것도 ‘미리‘ 말하는 것. ... 내게 다정한 사람, 그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선물 자체가 아니다. 선물(마음)을 주고 싶어하는 상대의 ‘자세‘다. 네가 좋아하는 것, 그거 해주고 싶은데, 해줄 수 있는데! 이런 말. 말이 전부다. 그게 선물의 시작이다. ‘말이면 다가 아니다‘라고 얘기하는 이도 있겠지만, 글쎄. 나는 어기더라도, 우선 다정한 말을 건네는 이에게 마음이 간다. 내겐 말이 다다. 쏘아붙이거나 소리치지 않고, 나쁘게 말하지 않는 것. 말로 사람을 우선 끌어안는 것, 그게 다정함이다.

조건 없이 사랑해주는 엄마를 가진다는 것.
그것은 세상 무엇과도 싸울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사랑을 나무라는 시대를 산 어른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말‘은 잉여다.
사족, 팔불출, 주책, 남세스러운 말.

절제하다 사라져버린 능력.
하지 않으면 지워지는 언어.
아끼면 사랑은 불능이 된다.

스마트폰은 실시간으로(정말 실시간이다) 무지막지한 양의 새로운 정보를 공급하는 공장이고, 나는 공장 안에 채워진 세상 정보를 두루 살펴보느라 늙어가는 일꾼이었다. 이제 퇴직했다! 야호! 그동안 남의 삶에 ‘끼인‘ 내 삶을 살고 있었다.

스마트폰이 없으니 할 수 없는 게 많아졌다. 할 수 없는 일은 바로, ‘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이 시대에 ‘진짜 어른‘, ‘진짜 시인‘이 얼마나 귀한지, 얼마나 고픈지 모르겠다.

모든 사랑은 먹어보기 이전엔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할 수 없다. 가끔은 먹고 난 후에도 구분이 어렵고 똥인 줄 알면서 꾸역꾸역 먹을 때도 있다.

사랑은, 그게 단지 하룻밤의 사랑일지라도 ‘우연과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움‘이 가능하다.

대부분의 책이 사는 일을 생각하고 고민하게 한다면, 소설은 한 편에 한 번씩 삶을 ‘살게‘ 한다. 한 권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한번 더 살아본 기분이 든다. 나 아닌 다른 사람으로.

소설은 ‘사실‘만을 담고 있지 않지만,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을 담고 있다(때때로 우리는 ‘중요한 건 사실이 아니야!‘라고 부르짖지 않는가). 삶이 일부로 숨기거나 어떤 이유 때문에 보여주지 않은 것, 불확실함 속에 깃든 징후를 소설은 보여준다. 소설은 ‘모호함을 형상화‘하는 장르다. 갖가지 방식으로, 우아하게. 따라서 소설은 삶의 거울이자 라이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소설가들은 거울을 통해 "완벽하게 알고 자세히 관찰한 것"을 기록한다.

좋은 문장은 독자를 피로하게 하지 않는다. 좋은문장을 읽을 때면 좋은 배를 타고 있는 기분이 든다. 편해서, 배를 타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전진하는 기분.

사랑에는 크고 작은 포탄이 숨어 있다. 불시에 날아들어 상처를 내는 포탄.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닐지라도, 사랑은 관계를 굴러가게 하는 윤활유다. 사랑이 과도하거나 부족하거나 사라지면 관계가 틀어진다. 연인 관계뿐 아니라 친구 사이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우정은 ‘사랑‘에 가까웠다가(죽이 잘 맞는 친구를 사귀게 됐을 때 설렘!),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여 끈끈해지고, 어느 순간 권태기를 맞는다. 권태기를 지나 우정은 살(아나)거나 죽는다. 사랑처럼, 우정도 죽는다.

우정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왜‘, ‘갑자기‘ 서로 멀어졌는지, 명료하게 알 길은 없다. 한 가지 이유가 아니라 여러 가지 복잡한 원인들이 흙속 나무뿌리처럼 얽혀 있을 것이 분명하기에, 섣불리 뭐라 말할 수도 없는 상황. 멀어진 친구를 미워하냐고 묻는다면? 천만에. 오히려 나는 그를 여전히 사랑한다. 그러나 관계는 늘 ‘사랑을 제외한 것‘들 때문에 어려워진다. 멀어진 친구를 생각하면 한밤중에 갑자기 가난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마음을 탈탈 털린 기분.

지나치게 가까워 ‘거리‘를 잃어버리면 ‘관계‘도 잃어버린다. 밀착되어 있지 않으면 그에 대해 속속들이 알 수 없기에 서로 존중하는 마음이 생긴다. 둘 사이에 조화로운 틈이 생기며, 격格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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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code 2020-12-29 1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뽕님 블로그에서 읽은 그 책이네요. 좀전에 강남 미팅끝나구 역 근처 영풍문고에 들러 이 책을 샀어요ㅎ 한번 찬찬히 읽어볼께요.. 낼 엄청 춥다는데 따뜻히 잘 보내요 뽕님ㅎ

milibbong 2020-12-30 19:57   좋아요 0 | URL
^^ 전 책 홍보대사가 되었군요 ㅎㅎ 두부님 덕분이네요 ㅎㅎ
괜히 맘에 들지 않으시면 어쩌나 조마조마하네요 ㅎ
그래도 여유롭게 천천히 읽어나가기에 적합한 책인 것 같아요.
돌아다니기에 날씨가 너무 추웠죠? 전 외출을 삼간지 하도 오래 되서
추위가 어떨지 가늠이 안되는데 ㅠㅠ 부디 집에서 따뜻하게 쉬시면서
마음과 몸 잘 녹이시길 바랄게요 ㅎㅎ 내일이면 정말 한해의 마지막 날이네요.
두부님의 마지막 날에 기쁨과 다짐과 평안이 가득하길 바랄게요.
미리미리 Happy New Year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