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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과 연애 ㅣ 말들의 흐름 5
유진목 지음 / 시간의흐름 / 2020년 9월
평점 :
내가 절대로 쓸 수 없는 유형의 글이다. 마치 잠언을 읽는 것 같은 글이다. 쉽게 말하자면 '의식의 흐름대로' 기록한 수기 기록을 편집해서 나열한 글이다. 글의 양이 적고 쉽게 읽혀서 말하는 것이 적게 보인다. 하지만 말하는 것보다 말하지 않는 것이 많아서 다른 어떤 글보다 무거운 글이다. 아픔이 없는 글과 있는 글은 다르다. 이 글은 당연히 후자이다. 그래서 무겁게 마음을 건드린다.
취향 차이가 있겠지만, 나도 아팠던 사람이고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다. 심지어 지금은 작가처럼 슬프고 우울하기까지 하다. 많은 부분에 깊이 공감되었다. 공감가는 글을 모두 옮겨적어 박제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그런 글이 너무 많았다. 사실 이 책 전부라고 해도 무방하다.
『연애의 책』이라는 작가의 전작도 너무 감명깊게 읽은 기억이 있다. 그녀의 이름을 단번에 기억하고 바로 책을 선택했다. 하지만 난 아직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다. 『연애의 책』에서 내가 받은 느낌과 이 책에서 받은 연애의 느낌이 사뭇 달랐다. 그래서 마음이 더 아팠다. 아팠지만 이 책을 읽음으로써 마음이 더 마음다워진 느낌이었다.
사람과의 좋은 순간은 늘 그리운 것이었다. 살면서 가져본 적 없는 순간인데 그랬다.
서른다섯 살이었고 모든 게 어그러진 때였다. 한다고 했는데. 나는 안 되나 보다 싶었고.
사는 일은 싫은 일 없이 살아지지 않는다. 싫은 일은 흔하고 좋은 일은 드물다. 하지만 사는 일은 좋은 일 없이 살아진다.
정신없이 살다 보면 시간이라는 것이 그냥 흐르는 것이 아닌 순간이 온다. 저절로 흐르던 때도 있었던 것 같은데데. 끝난다. 그때 사람은 무엇이든 감행해야 한다. 흔히 말하는 모험 같은 것. 실은 도박과 다름이 없는.
인간은 사랑이 결여된 채로 이 세계를 건설하고 통치한다. 사랑 말고 다른 많은 것이 이 세계를 장악하는 데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품은 사람은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 거의 매번 지고 만다. 사실이 그렇다. 사랑이 결여된 세계는 사랑하는 사람을 고통 속에 살아가게 내버려둔다. 사랑이 결여된 세계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은 방치되어 무능력한 존재로 낙오한다.
그나마 한번 자자고 하는 인간이 낫다고 여겨질 때가 있다. 섹스 대신에 연애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렇다. 어떤 사람은 섹스하자는 말을 연애하자고 한다. 인간은 연애라는 단어를 다양한 용도로 사용한다. 그것을 섹스의 용도로 사용할 때 나는 바로 구분할 수 있다. 그 말을 하는 표정이 매우 역겹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걷다 보면 너무 정신이 없어서 기분 같은 걸 신경 쓸 여력이 없다. 격렬한 산책은 기분을 압도한다. 격렬한 산책은 인간을 제압한다. 격렬한 산책은 몸을 정화한다. 정화된 몸에는 다른 감정이 자리를 잡는다. 그러면 새로운 감정에 따라 걸음이 바뀐다. 천천히 걸을 수 있을 때 산책은 비로소 사유하는 인간을 길 위로 인도한다.
자기 자신과 거리를 두는 인간이 타인과의 거리 두기에 가까스로 성공한다. 그것이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가장 가까운 거리라는 것. 그것이 내가 살면서 맺어온 관계들에서 다만 인간으로 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배운 것이다.
인간은 인간에게 항상 필요하지 않지만 자연은 없어서는 안 된다. 자연의 소멸은 인간의 소멸을 뜻한다. 인간도 있긴 있어야 한다. 항상 필요하지 않을 뿐.
몇 번인가 나는 죽으려고 했는데 그것은 삶이 보잘것없어서였다. 삶이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아빠와 신을 사랑하는 엄마와 사랑이 무언지 모르는 나와 궁핍한 생활이 싫어서 나는 오랫동안 살아가는 일을 언제든 그만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스스로 죽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살면서 가장 어렵고 매번 실패하는 일도 내가 스스로 삶을 멈추는 일이다. 나는 그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살아왔다. 그것 말고 다른 것을 알지 못했다.
지금 당장 나에게 안정하고 행복하게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방편이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텐데. 안심하고 살아갈 텐데. 매일 다른 내일을 만들 텐데. 매일 다른 용기를 가질 텐데. 매일 다른 사랑을 낳을 텐데.
나는 내게 마련된 건강한 죽음을 갖고 싶다. 다시는 죽는 것에 실패하고 싶지 않다. 서서히 나를 죽이는 것도 그만하고 싶다.
자살하지 않고 살아가기로 한 사람들은 대신 천천히 자신을 죽인다.
‘지금 죽는 것‘에 실패한 나는 대신에 ‘언제든 사는 일을 그만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삶의 동력으로 삼았다. 언제든 그만 살면 되니까. 생각하면 희한하게 조금 더 살 수 있었다. 정말로 그만 살면 된다고 생각하기 전까지는.
언제든 그만 살면 되니까. 이 생각은 그러나 여전히 내게서 유효하다. 언제든 그만 살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나는 살 수가 없다.
자력으로 내 몸을 건사할 수 있을 때까지만 살아 있을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내 죽음은 내가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 나는 스스로 죽는 것보다 죽지 못하고 타의에 의해 계속 살아 있는 것이 더 무섭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삶이 괴롭지 않은 것은 아니야."
살면서 오래 알던 사람을 잃고 다시는 만나지 않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건 갈수록 드물어지고. 두 번은 없을 것이 분명한 사랑이 찾아오고. 두 번은 없을 것이라 그 사랑을 감행하고. 살아가는 일을 언제든 그만둘 수 없어지고. 가진 게 없어 두렵다가 지키고 싶은 게 있어 두려워지고. 다른 좋은 일이 세상에 있다고 생각하고. 태어난 것을 받아들이고. 내가 나인 것을 원망하지 않고. 혼자서 잘 있고. 둘이서 살고.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고. 매일 다른 일을 반복하고. 다른 일을 계획하고. 실패하고. 절망하고. 다른 길이 세상에 있다고 생각하고. 실패한 것을 받아들이고. 우는 것은 혼자서 하고. 웃는 것은 둘이서 하고. 희망을 갖고. 세상에 사랑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모두가 사랑하며 살지 않는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사랑하며 살지 않는 사람들은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을 장애물로 여긴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 사랑하는 것보다 수월하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간단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면 모른 척할 수 없다. 사랑하면 회피할 수 없다. 사랑하면 무책임할 수 없다. 사랑하면 변명할 수 없다. 사랑하면 거짓말할 수 없다. 사랑하면 금세 말을 바꿀 수 없다. 사랑하면 재빨리 모습을 바꿀 수 없다. 사랑하면 더 빨리 갈 수 없다. 사랑하면 더 많이 가질 수 없다. 사랑하면 버릴 수 없다. 사랑하면 모를 수 없다.
사랑하며 사는 사람은 사랑하며 살지 않는 사람보다 적다. 언제나 그랬다.
다수는 세상을 움직이고 소수는 세상을 바꾼다. 언제나 그랬다.
용서는 받고 싶은 쪽에만 있는 것이다. 용서는 받고 싶은 것이지 하는 것이 아니다.
삶은 너무 공평하다. 모두에게 죽음을 준다는 점에서.
자연을 생각하면 슬프고 인간을 생각하면 어둡다.
매일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동경하면서 나는 책상에 가만히 앉아 날씨와 기분에 이리저리 휩쓸린다.
어두운 방에 누워서 그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고 싶다.
고작 나 자신을 정당화하는 데 정신을 쏟지 말고. 내가 아닌 다른 것을 향해 생각을 나아가게 하고. 내가 아닌 다른 것에서 용기를 찾고. 내가 아닌 다른 것에 용기를 사용하고. ... 내가 아닌 것으로 불행하지 말고. 나인 것으로 행복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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