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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번의 일
김혜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0월
평점 :
장편소설이다. 김혜진 작가는 첫 데뷔작부터 내 맘에 쏙 드는 문장들과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어서 이번에도 얼마간의 기대를 안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당연히 단편소설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그녀의 전작들이나 장강명 작가의 <산자들>처럼, '일'과 관련된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여러 편 묶여있을 줄 알았는데 책에선 한가지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왜 이런 방식을 택했을까. 단편적이고 다양한 이야기들로 일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삶에 주목하는 방식이 있는데, 한 가지 이야기로 한 사람의 꿈과 인생, 일, 현실, 좌절 등을 그리다보니 처음엔 절망스럽던 상황도 일상적인 현실이 되어갔다. 그게 진짜 현실인 것도 맞는데... 혹시 그걸 의도하셨던 것일까? 모를 일이다.
나는 구직을 제대로 못했었고 결과적으로 뜨내기 말단 사원이 회사 경험의 전부다. 구직의 어려움은 엄청 쏟아내고 공감할 수 있지만, 회사 내부 사정이나 시스템은 잘 알지 못한다. 그런데 아는 분이 40대 초중반인데 '벌써' 회사에서 권고사직을 권하고 있다고 했다. 서류를 들이밀며 반강제로 권하는 게 아니라, 처리못할 일거리를 주며 당장 해내라고 하던가, 욕과 구박을 심하게 하던가, 못해낸 일을 들먹이며 다시 또 회사를 나가라는 식으로 분위기를 잡는다던가 하는 식이라고 했다. 회사에서 욕이라는 걸 대놓고 한다는 것도 충격이었지만, 그런 식의 인격모독과 몰아붙이는 식으로 퇴사를 권하는 게 사실이라는 게 참 충격이었다. 작년 여름까지만 버텨보겠다던 그분은 (작년 초에 들은 이야기인데, 난 그런 식으로 몇개월을 더 어떻게 버티나 생각했다. 그런 생활 반년은 너무 까마득하지 않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일 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버티고 계신다. 마치 소설 속 주인공처럼 말이다. 그 얘기를 들어서인지 이 소설 속에 나온 이야기들이 낯설지가 않았고 그럼에도 그 잔혹함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일과 삶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들이 머리속을 어지럽게 헤치며 지나갔다.
아침에 일어나면 하루가 까마득하게 길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시 잠이 들 무렵이면 하루가 또 이처럼 순식간에 지나버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는 손에 잡히지 않고 손바닥에 빗금을 그으며 휙휙 지나가버리고 마는 어떤 것이었다.
믿음은 하루가 가고, 계절이 쌓이고, 서로의 표정과 목소리에 익숙해지고, 버릇과 습관 같은 것들에 길들여지고. 그런 지루하고 지난한 과정를 수없이 반복하고 난 다음 생겨나는 것이었다. 그는 그토록 어렵게 생겨난 것들이 이처럼 쉽게 망가질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가 아는 삶의 방식이란 특별할 것 없는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어른이 되고, 자신이 자라온 것과 비슷한 가정을 꾸리고,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면서 자신이 선택한 것들에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만족스러운 삶. 행복한 일상. 완벽한 하루. 그런 것들을 욕심내어본 적은 없었다. 만족과 행복, 완벽함과 충만함 같은 것들은 언제나 눈을 깜빡이는 것처럼 짧은 순간 속에만 머무는 것이었고, 지나고 나면 손에 잡히지 않는 어떤 것에 불과했다. 삶의 대부분은 만족과 행복 같은 단어와는 무관하게 흘러가고 그런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쌓여 비로소 삶이라고 할 만한 모습을 갖추게 된다고 그는 믿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스스로를 마주해야 하는 벌을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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