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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사람, 하정우
하정우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평점 :
책이 처음 나왔을 때는 영문도 없이 읽고 싶었다가, 나중엔 그냥 그런 에세이려나 싶어서 마음을 접었었다. 작년 연말에 서점에서 처음 책을 만났었는데, 읽기를 잠시 주저하는 사이 이제 10쇄까지 발행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다. 책을 실제로 읽어보니, 정말 좋았다. 딱, 어른의 책이었다. 꼰대 아닌, 내공을 잘 쌓아서 잘 큰 어른이 할 말만 딱 꾹꾹 눌러담아 해준 것 같달까. 남들이 보기에 '괜찮다' 수준이 아니라 '대단하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잘 큰 어른이 말이다.
배우 하정우를, 감독 하정우를 스크린 너머로 만났을 때 언뜻 풍기던 그 여유로움과 단단해보였던 느낌이 다 '걷기'라는 튼튼한 기초공사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구나 생각하니 그가 새삼 더욱 대단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이렇게 잘 큰 아들을 둔 아버지는 또 얼마나 행복하실까. 정말 밥을 안먹어도 뿌듯하고 마음이 행복하실 것만 같다.
분명 하루만에 읽을 수 있던 책이었지만, 진득하게 읽지 못하고 결국 이틀에 걸려 읽게 되었다. 옮겨 적은 문장들이 많은데, 다 옮길 수가 없어서 선택하기가 어려웠다. 그 문장들을 이제 내 것으로 만드는 건 나의 일이겠지. 나는 그가 너무 대단해 감히 따라가고 싶다거나 노력해보고 싶다는 엄두도 나지 않지만, 분명 이 책을 읽기 전보다는 내 마음이 조금이나마 바뀌었을거라는 생각은 든다. 그의 삶이 너무 진실되었고 글과 삶 전체에서 그의 진정성이 읽혀졌기 때문에, 다른 어느 좋은 말들보다 더 깊이 와닿은 것 같다. 정말 본받을 만한 삶의 자세였다.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나도 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조금이라도 더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노력을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정작 일은 너무나 열심히 하는데 휴식 시간에는 아무런 계획도 노력도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그대로 던져두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지치고 피로한 자신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곧 휴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방기‘는 결과적으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누적된 피로를 잠시 방에 풀어두었다가 그대로 짊어지고 나가는 꼴이 되는 경우가 많다.
오늘 우리가 고단함과 귀찮음을 툭툭 털고서 내딛는 한 걸음에는 돈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가치가 있다. - P67
나의 오늘을 위로하고 다가올 내일엔 체력이 달리지 않도록 미리 기름 치고 돌보는 일. 나에게 걷기는 나 자신을 아끼고 관리하는 최고의 투자다.
나는 남을 웃기는 걸 좋아한다. ... 유머는 삶에서 그냥 공기처럼 저절로 흘러야 한다. 마음에 여유가 부족하면 이런 유머가 나오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일상에서 유머 감각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촬영현장에서도 사람들의 긴장을 풀어주고 웃기는 일을 좋아한다. 남을 웃기면서 나도 웃는다. 내 유머가 사람들을 웃게 할 때, 나는 내가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고 좋은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안심이 된다.
나는 사람이 그다지 강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여러 가지 요인들로 불안정해지기 쉬운 동물이다. 마치 날씨처럼 매일 다른 사건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우리의 몸과 마음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기란 쉽지 않다. 변화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작은 물결에 배가 휩쓸려가서는 안 되므로 닻을 단단히 내려둘 필요가 있다.
말에는 힘이 있다. 이는 혼잣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결국 내 귀로 다시 들어온다. 세상에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은 없다. 말로 내뱉어져 공중에 퍼지는 순간 그 말은 영향력을 발휘한다. 비난에는 다른 사람을 찌르는 힘이, 칭찬에는 누군가를 일으키는 힘이 있다. 그러므로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말을 최대한 세심하게 골라서 진실하고 성실하게 내보내야 한다.
독서와 걷기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인생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저는 그럴 시간 없는데요‘라는 핑계를 대기 쉬운 분야라는 점이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하루에 20쪽 정도 책 읽을 시간, 삼십 분가량 걸을 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책을 함께 읽는다는 것은 이미 잘 안다고 믿었던 서로의 마음속을 더 깊이 채굴하는 것과도 같았다.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어쩐지 더 좋은 삶을 살고 싶은 마음과 함께, 서로의 일과 삶에 대한 응원의 마음이 차올랐다. - P206
나는 일할 때 막연한 느낌이나 주관에 치우치지 않도록 나 자신을 계속 점검한다. 누군가와 생각이 다를 때도 최대한 객관적으로 이야기하려고 노력한다. 현재 나의 기분이나 마음은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것이니까.
오디션은 삼 분 안에 결정되는 잔혹한 경쟁이지만, 보석은 그 짧은 시간에도 스스로 빛을 발한다고 믿었다. 내 몸에 기운과 에너지를 늘 충만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운동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밤이면 집에 들어가기 전에 한강을 따라 걸으면서 하루 일과를 정리했다. 그때 평균적으로 하루에 여섯 시간씩은 걸어다녔던 것 같다. 걸으면서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었다. 배우란 분명 선택받는 직업이지만, 그 선택받을 수 있는 무대까지 걸어가는 것은 내 두 다리로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위기와 절망 속에 있을 때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나는 때로 내가 생각하는 최선의 노력이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한다. 어쩌면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도 모른 채 힘든 시간을 그저 견디고만 있는 것을 노력이라 착각하진 않는지 가늠해본다.
지금 고통받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곧 노력하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혹시 내가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 오지 않을 버스를 기다리는 건 아닌지 수시로 주변을 돌아봐야 한다.
삶은 그냥 살아나가는 것이다. 건강하게, 열심히 걸어나가는 것이 우리가 삶에서 해볼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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