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다른 곳에 밀란 쿤데라 전집 3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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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로밀은 시인으로 태어난다. 그의 엄마가 이미 그를 시인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재치 있는 말을 구사할 줄 아는 어린이로서 사랑 받았다. 언어의 마술이 스스로를 특별하게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그는 어린 나이에 체감한다. 엄마를 닮아 예쁘장한 외모와 가느다른 금발을 가지고 태어난 야로밀은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외모가 영 못마땅하다. 여자의 육체를 경험하는데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이 바로 예쁘장한데다가 어려보이기까지 하는 자신의 외모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여자를 경험하기 위해선 그 자신이 남자여야 했다). 그는 자신의 시를 통해 다분히 환상적으로 성적 결핍을 채워나간다. 야로밀에겐 스승과도 같은 화가가 한 사람 있다. 화가는 현대예술(초현실주의.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1948년의 체코를 전후로 하고 있으므로)의 옹호자였고 야로밀 역시(그리고 그의 시 또한) 그러했다. 그러나 화가의 친구들과 함께 한 회합실에서 그는 남자여야 했으므로(그곳에 물론 여자가 있었으므로) 야로밀은 화가와 자신의 시를 매장하고(자립과 독립이야 말로 남성성이므로) 공산주의 혁명에 동참하는 예술만이 유일한 예술임을 역설한다. 그는 여자를 경험하고 새로운 시를 발견했으며 엄마와 다투어야 했다. 엄마는 야로밀이 영원히 그에게 속해 있기를 원했고 그는 거기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영원히 엄마의 얼굴을 품고 있었고, 결코 그토록 그리던 남자의 세계로 넘어갈 수 없었다.

 

 

시란 무엇인가? 우리는 지난하고 까다로운 시라는 것에 대해 종합적 정의를 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쿤데라의 소설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제공된 하나의 창 너머를 들여다보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시란, 엄밀히 말해서 서정시란 양가적 진실이다. 그것은 경험을 통해 획득한 진실이 아니라 감정으로 다다른 진실이다. 어제의 슬픔과 오늘의 행복은 동시에 모두 진실이다. 또한 서정시인은 무경험의 천재이다. 그들의 내면엔 두 개의 거울이 있다. 하나는 생활적 실존으로서의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고, 또 다른 하나는 환상의 세계로 넘어가기 위한 통로로서의 거울이다. 그들은 시를 통해 사랑하고, 분노하고, 응징하며, 혁명을 완수한다. 그래서 언제나 그들의 삶은 여기에 있지 않다. 여기에 있는 것은 삶이라고 부르기엔 초라하고, 왜곡되고, 비루하며 미완성인 것이다. 언제나 삶은 다른 곳에 있다.

 

 

그렇다면 소설이란 무엇인가? 이 또한 우리는 쿤데라가 제공한 창 너머를 들여다보는 하나의 시선이라는 점을 우선해야 한다. 그렇다면 다음의 얘기로 넘어갈 수가 있다. 시와 거울이 상호적 관계를 갖는다면 소설은 관망대와 그러한 관계를 갖는다. 소설은 관망대를 설치해두고 외부를 꼼꼼하게 관찰하는 것이다. 시인이 자신의 내면의 거울을 들여다볼 때, 소설가는 관망대를 통해 역사라는 환경에 놓인 인물을 관찰하고 들여다본다. 우리의 실존은 무한하지만 실존이 처한 역사라는 장의 크기만큼만 무한하다. 이 소설의 6부에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물론 그것은 소설 전체에 해당되는 사실이다.

 

 

글을 쓰다보니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것 같다. 아직 똥폼 잡고 싶은 나이라는 걸 속일 수가 없는 모양이다. 물론 쿤데라의 소설엔 힘이 있지만 나는 그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낄낄대지 않을 수 없음을 말해두어야 할 것 같다. 그가 감춰지거나 부자연스럽게 표출되는 욕망의 우스광쓰러움을 소설 속에서 기가 막히게 포착해내주니 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소설을 이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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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만에게 길을 묻다 - 행복한 물리학자 파인만에게 듣는 학문과 인생이야기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지음, 정영목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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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도 하지 않고 파인만이라는 이름이 눈에 띄어서 언젠가 헌책방에서 구입을 해두었던 책이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라는 타이틀을 제외하면 나는 파인만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다. 다만 그가 좀 괴짜스러운 물리학자라는 글을 어디에선가 읽은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흥미가 있었다. 식사 중 심심풀이 삼아 읽을 책을 찾다가 집어 들었다. 미리 얘기하자면 심심풀이로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이 진지하다는 의미에서).

 

 

저자의 경력이 재미있다. 레너드 믈로디노프라는 저자의 이름은 내겐 생소하다(그의 이름이 『시간의 역사』,『위대한 설계』에서 스티븐 호킹과 나란히 적혀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그는 전도 유망한 물리학 박사였지만 결국 작가의 길을 선택했다. 언뜻 보면 어딘가 쉽게 납득이 가지 않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의문이 해소가 될 것이다.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라는 책의 내용이 믈로디노프가 캘리포니아 공대('칼텍'으로 불리며 최고의 연구시설로 유명함)의 연구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만난 전설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그리고 '머레이 겔만')과의 대화와 추억 속에서 편집된 학문과 삶의 이야기(대단히 유익하고 진지한)이니까 말이다.

전도유망하고 젊은 물리학자인 믈로디노프는 천재들(그리고 노벨상 수상자들)의 집합소인 '칼텍'에서 자신을 채용했다는 사실이 불안하기만 하다. 그들은 자신에게 젊은 물리학자로서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결과물을 기대할 것이라고 믈로디노프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물리학자들의 세계였다. 기대라는 것은 언제나 열정과 부담을 동시에 안기지 않던가. 믈로디노프의 연구실은 당시 물리학계의 두 거인이었던 파인만과 머레이 겔만 사이에 있었고, 스스로 답을 찾기 어려웠던 그는 이들에게, 특히 파인만에게 스승의 역할을 기대하며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저자는 자신의 글이 소설이 아니라고 미리 밝혀두지만 도대체 소설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정말 대답하기 어려운 법이다. 물론 여기에서 그런 문제를 논의할 수도 없거니와 단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이 글이 소설과도 유사한 이야기 구조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책은 물리학에 관한 이론적 내용들을 담고 있다. 양자 물리학과 초끈 이론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지만 일반 교양 수준의 정도에서 다루어 질 뿐이다. 간단히 말해서 몰랐던 사람은 감이 잡히는 정도이고(나는 여기에 속한다), 이미 잘 아는 사람은 시시할 수도 있는 수준이리라. 그러니 내용의 본질은 여기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니구나, 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읽으면 읽을 수록 점점 소설처럼 읽힌다. 물론 소설이냐 아니냐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그러나 글을 읽다 보면 자신의 명성(혹은 안정)과 행복이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고뇌하는 한 명의 인간이 자꾸 도드라진다. 그리고 파인만은 이야기 속에서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그를 인도하는 탁월한 스승이다. 파인만은 전설의 물리학자이자 자신의 일(직업으로서의 일이 아니다)에서 행복의 원천을 느끼는 삶의 지배자이다. 그는 창조적인 인물인 동시에 자신에게 충분히 진지하고 솔직한 인물이기도 하다. 물리학자로서의 재능과 삶에 확신을 갖지 못했던 믈로디노프가 어떤 결과를 선택했는지 알고 있는 우리는 이 이야기가 뻔한 한 편의 주제를 되풀이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택하라는 위대하고도 낡은 주제 말이다. 그러나 아마도 책을 읽는 와중에 현명하고 열정적인 파인만의 조언에, 믈로디노프가 처한 상황과 선택의 무게에서 방관적인 시선을 유지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실제 한 개인의 인생이란, 진지한 선택의 순간이란 결코 낡은 주제가 될 수 없으니까.

 

 

"누가 무지개의 진짜 기원을 처음으로 설명했는지 아세요?"

내가 물었다.

"데카르트지."

그는 잠시 후에 내 눈을 똑바로 보았다.

"데카르트의 수학적 분석에 영감을 준 무지개의 두드러진 특징이 뭐였다고 생각하나?"

그가 물었다.

"어, 무지개는 사실 원뿔의 일부인데, 스펙트럼의 색깔들을 가진 호로 보이죠. 물방울들이 관찰자 뒤의 햇빛을 받아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그의 영감의 원천은 이 문제가 물방울 단 하나를 생각함으로써 분석 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 적합한 기하학을 적용한 것이죠."

"자네는 이 현상의 핵심적인 특징을 놓치고 있군."

그가 말했다.

"네? 그럼 그의 이론에 영감을 준 것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의 영감의 원천은 무지개가 아름답다는 생각일세."

- 본문의 믈로디노프와 파인만의 대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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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적 보편주의 - 권력의 레토릭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김재오 옮김 / 창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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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가 의심스럽지만 누군가 독서를 '개인적 차원의 책 읽기'와 '사회적 차원의 책 읽기'로 구분했던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전자는 독서에서 순수한 쾌락을 취하는데 의의가 있으며 흔히 말하는 문학작품 읽기가 대표적 예이다. 후자는 현대 사회에서 진행 중인 사회적 담론에 대한 지식 습득을 목적으로 하며, 철학이나 사회과학 자연과학 서적 등의 독서를 예로 들 수 있겠다(글을 쓰다보니 용어의 자의적 창작이야 기억의 한계로 인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구분의 내용은 다치바나 다카시의 주장을 인용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두 가지 구분이 결코 명확하고 선명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전자는 후자를 내포하거나 구체화 할 수도 있으며, 후자 역시 독자에 따라 전자의 목적을 동시적으로 제공할 수 있다. 어디 세상사 그렇게 간단하게 구분되는 것이 있던가.

세계체제론으로 널리 알려진(그러나 나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한) 석학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유럽적 보편주의:권력의 레토릭』은 '사회적 차원의 책 읽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개인적 차원의 책 읽기'라는 물줄기와 섞여 흐르게 된 독서 경험 중의 하나이다. 이보라. 역시 이분법은 나쁘고 충분히 불충분하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입문서로 읽기에 좋다는('로쟈'로 유명한 '이현우'씨의) 서평을 접하고 나는 그의 『근대세계체제』와 『유럽적 보편주의』를 동시에 빌렸다. 분량으로 보나 가독성으로 보나 후자를 먼저 읽는 게 에너지 효율성에 유리하다는 판단을 누구나 하게 될 것이다.

본문의 내용은 대단히 명쾌하다. 월러스틴은 16세기 이후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서구의 문화, 자본, 지적 권력의 지배현상을 '유럽적 보편주의'로 정의하고 이것이 절대 보편적인 보편주의가 아님을, 그것은 서구라는 세계의 특수한 상황의 우월성과 힘이 담보된 '특수한 보편주의'임을 주장한다.

1장에서 월러스틴은 16세기, 에스파냐의 아메리카 대륙 정복과 관련된 당시의 커다란 지적 논쟁, 라스 까싸쓰와 쎄뿔베다의 논쟁을 중요한 사건으로 본다. 당시 에스파냐의 식민 정책의 대상국이 된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 과정에서 이를 지지했던 쎄뿔베다의 주장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서구 문명의 주요한, 그리고 그것으로 전부인 견고한 레토릭이 되었다. 그의 주장은 원주민은 미개하다는 것, 그 결과 인신공양과 우상숭배와 같은 죄악(자연법의 위반)을 저지른다는 것, 그 죄악으로 인해 피해 받는 무고한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는 것, 보편적 진리인 기독교의 안전한 전파를 위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여기에 대항하는 라스 까싸쓰의 논리는 이러하다. 야만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이 행위는 어느 경우에나 소수의 행동이라는 것, 기독교의 교리와 무관한 이들을 기독교의 사법권으로 단죄할 수 없다는 것, 무엇보다도 교회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가혹한 폭력과 살육으로 인해 원주민들의 원망을 사는 것이 진리의 전파에 진정한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 등이다. 라스 까싸쓰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행해지는 폭력의 참상을 직접 목도하였으며, 또한 이러한 행위의 결과를 통해 경제적 이득을 얻는 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사실 진리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단죄나 포교와는 무관한 사항이었다.

 

 

16세기 이후 유럽적 보편주의의 레토릭은 본질적으로 쎄뿔베다의 주장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월러스틴은 설명한다. 16세기는 신앙의 이름으로, 19세기는 문명화의 이름으로, 20세기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이름으로 행해질 뿐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기독교의 권위가 개개의 신앙적인 차원과는 무관하게 어떤 방식으로 불합리한 지배구조를 만들었는지 알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서구의 시선이 동양이라는 제국을 요리하고 삼키기 위해 만들어진 레시피라는 사실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그리고 과학이라는 가치중립적 보편주의가 어디에서나 성행할 수 있는 인문학의 권위를 깔아뭉개기 위한 서구의 책략이라는 주장은 아직 어딘가 낯설다(과학의 발전이 자본과 긴밀한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다는 불편한 진실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나는 이 노학자의 충고가 대단히 설득력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깨어있어야겠지만 급할 건 없다. 이제 겨우 입문서를 읽었을 뿐이니까. 급하면 쉽게 탈이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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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밀란 쿤데라 지음, 김재혁 옮김 / 예문 / 199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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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국내에서 쿤데라 붐(이라고 할 만한 상황이 있었다고 한다면)이 일었던 것은 90년대 초중반이었던 모양이다. 90년대 초중반을 기점으로 쿤데라의 이런저런 책이 번역되어 쏟아지기 시작했고, 대개 그 책들은 현재 절판이 되었다. 그러나 확실히 아직도 쿤데라를 읽는 일정 수요 이상의 독자층이 국내에 존재한다는 사실(예전만 못한지 어떤지는 차치하고서라도)은 분명해 보인다. 민음사에서 기획하는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만 해도 쿤데라의 소설 세 편(『농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불멸』)이 출판되었고, 아직 그의 소설 독자층이 상당했는지(혹은 돈벌이의 싹이 보였는지) 민음사에서는 아주 쿤데라의 전집 출판을 기획하고 나섰으며 현재진행중인 상태이다. 대형 출판사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것인지 어쩌는 것인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어렵다는 출판계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획 출판이라니 찬양을 하고 있는 것이 나의 입장이고 보면 실로 윈윈 전략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말은(글은) 조금 삐뚤게 나갔지만 어디까지나 민음사 측에서도 쿤데라의 탁월한 문학성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기획물이라고 별다른 근거 없이 믿고 있는 바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여전한 생명력을 갖고 있는 쿤데라 문학의 초창기에 해당하는 소설집이 바로 『사랑』이다. 옮긴이의 후기를 보면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이 1968년 소련의 프라하 침공으로 쿤데라가 뚜렷한 정치적 탄압을 받기 전까지인 60년에서 68년 사이에 쓰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농담』과 더불어 쿤데라 소설의 출발점을 살펴 보기에 중요한 책이다.  민음사의 쿤데라 전집에서는 시리즈의 두 번째 단행본으로(『우스운 사랑』) 출판 예정되어 있음에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직도 발매가 되지 않고 있다. 우연히 헌책방에서 이 책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그때 내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이 작가의 이름을 기억해 두려고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아직도 이 책을 읽지 못했을 것이 아닌가(도서관에도 없다!)!

 

 

정작 소설에 대한 언급 없이 글이 이토록이나 길어진 이유를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나로서는 이 책에 실린 일곱 편의 소설들을 찬양하는 것 이외에 별다른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도 찬양의 형식을 잃고 격앙된 메아리만이 남을 공산이 크다. (내가 알기로는)유일무이한 쿤데라의 소설집이자, 일곱 편의 사랑 이야기들은 재기가 넘쳐 흐르다못해 읽는 이의 내면을 적신다. 쿤데라는 전체주의라는 견고함과 경직성 안에서 에로티시즘의 세계를 발견 한다. 인간의 실존을 엄금 당한 세계에서 실존의 실오라기라도 발견할 수 있는 은밀한 장소가 에로티시즘의 세계가 아니고 또 어디있겠느냐는 일곱 편의 골 때리는 항변인 셈이다. 물론 전체주의의 마수는 한 올의 실오라기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에로티시즘은 관능적이지 않고 옹색하다. 섹시하지 않고 우스꽝스럽다. 본능적이지 않고 사색적이다. 역시 그만두는 편이 낫겠다. 벌써 찬란하고 영롱한 쿤데라의 소설이 색을 잃어가는 듯 싶다. 다만 일곱 편의 우스운 사랑 이야기 곳곳에 앞으로 그가 써내려갈 소설들의 중요한 파편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만을 언급하고 말겠다. 삶의 가벼움과 무거움, 성(sex)의 문제, 불멸에 관하여…….

독자는 그저 배꼽을 잡는 사이에 그가 톡톡 벗겨내는 가면 뒤의 실체를, 혹은 또 다른 가면을 음미하다가 끝이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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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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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데라의 작품을 발표 된 시간 순으로 읽어 보고 싶어졌다. 이것도 순전히 쿤데라의 에세이로 인해 생겨난 욕망이니 계획을 실행하는 동안 나는 단순히 이 작가의 자발적 노예가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 아닌 걱정을 해본다. 나는 예전에도 감히 도스토예프스키를 이런 식으로 읽으려다가 그것이 순리라는 듯 책장에 모셔만 둔 적이 있으니까.

 

 

쿤데라의 첫 소설인(그는 시인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농담』을 나는 극도로 경직된 전체주의의 폭압으로부터 농담으로 인해 송두리째 자신의 삶을 유린 당한 루드빅이라는 남자의 이야기로 기억하고 있었다. 전체주의라는 정치적 체재 속에서 지극히 협소함을 강요 받거나 상실되어버린 실존의 가능성. 이것이 『농담』을 읽는 독법의 한 가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농담』을 읽으면서도 어느정도까지 그러한 독법은 충분히 유효했다.

 

 

독자에 따라서 쿤데라의 소설을 읽는 이유는 다르겠지만, 적어도 그가 얼마나 서정적인 장면과 분위기를 연출해내는데 탁월한 소설가인가 하는 물음에 있어 호응하지 않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시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놀라고 경탄했던 부분 중에 하나는 바로 이 서정성이다. 자기연민과 붕괴된 자아라는 상실감 속에서 루치에를 향했던 루드빅의 사랑은 어찌나 아름답고 또한 우스꽝스러웠던지. 통속적인 사건이 결코 저수지로 떨어지지 않는 이유가 비단 그의 날카로운 통찰로만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물론 쿤데라의 소설에서 서정성이란 그가 가진 재능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충분히 주목을 받을 만큼 아름답다.

 

 

루드빅, 헬레나, 야로슬라브, 코스트카, 그리고 루치에의 이야기는 서로 절묘하게 맞물리기 시작하면서 대단히 혼란스럽고 잡히지 않을 것 같은 영역으로 소설은 도망가기 시작한다. 이 인물들은 정치적 신념, 복수, 사랑, 신앙, 전통과 같은 추상의 의지에 자신의 삶과 신념을 헌신하려 했다. 이것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시대에서, 20세기 중반의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고 논쟁적인 문제였으며 누군가에겐 그것이 20세기 중반의 시기라는 역사의 순간과는 관계없이 영원무구하도록 중요하고 논쟁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추상의 의지가 개인에게 하나의 도그마로 굳어지는 순간, 생은 그 단단함으로 인해 반드시 드러나는 틈새를 통해 농담처럼 짓궂은 장난을 걸어온다. 농담으로 유린 당한 삶, 복수라는 영원한 헛발질, 깨어진 환상, 진지한 자에겐 언제나 이중적인 세계. 무거움은 가벼움의 조롱 앞에서 분노하고 좌절하며 갈피를 잡지 못한다. 어지럽도록 성찰적인 인물들의 해부도인 소설의 후반부에 이르면 이 소설가는 인간을 조롱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운 질문을 던지도록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어안이 벙벙한 채로 나마, 도저히 설명되어질 것 같지 않은 사고의 파편들을 머릿속에 주워담아, 아주 끝난 것은 아니라는 불충분하지만 분명한 무언가가 마음 속에 남는다. 의외로 마음 속에 무언가가 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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