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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밀란 쿤데라 지음, 김재혁 옮김 / 예문 / 1997년 2월
평점 :
품절
확실히 국내에서 쿤데라 붐(이라고 할 만한 상황이 있었다고 한다면)이 일었던 것은 90년대 초중반이었던 모양이다. 90년대 초중반을 기점으로 쿤데라의 이런저런 책이 번역되어 쏟아지기 시작했고, 대개 그 책들은 현재 절판이 되었다. 그러나 확실히 아직도 쿤데라를 읽는 일정 수요 이상의 독자층이 국내에 존재한다는 사실(예전만 못한지 어떤지는 차치하고서라도)은 분명해 보인다. 민음사에서 기획하는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만 해도 쿤데라의 소설 세 편(『농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불멸』)이 출판되었고, 아직 그의 소설 독자층이 상당했는지(혹은 돈벌이의 싹이 보였는지) 민음사에서는 아주 쿤데라의 전집 출판을 기획하고 나섰으며 현재진행중인 상태이다. 대형 출판사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것인지 어쩌는 것인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어렵다는 출판계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획 출판이라니 찬양을 하고 있는 것이 나의 입장이고 보면 실로 윈윈 전략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말은(글은) 조금 삐뚤게 나갔지만 어디까지나 민음사 측에서도 쿤데라의 탁월한 문학성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기획물이라고 별다른 근거 없이 믿고 있는 바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여전한 생명력을 갖고 있는 쿤데라 문학의 초창기에 해당하는 소설집이 바로 『사랑』이다. 옮긴이의 후기를 보면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이 1968년 소련의 프라하 침공으로 쿤데라가 뚜렷한 정치적 탄압을 받기 전까지인 60년에서 68년 사이에 쓰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농담』과 더불어 쿤데라 소설의 출발점을 살펴 보기에 중요한 책이다. 민음사의 쿤데라 전집에서는 시리즈의 두 번째 단행본으로(『우스운 사랑』) 출판 예정되어 있음에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직도 발매가 되지 않고 있다. 우연히 헌책방에서 이 책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그때 내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이 작가의 이름을 기억해 두려고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아직도 이 책을 읽지 못했을 것이 아닌가(도서관에도 없다!)!
정작 소설에 대한 언급 없이 글이 이토록이나 길어진 이유를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나로서는 이 책에 실린 일곱 편의 소설들을 찬양하는 것 이외에 별다른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도 찬양의 형식을 잃고 격앙된 메아리만이 남을 공산이 크다. (내가 알기로는)유일무이한 쿤데라의 소설집이자, 일곱 편의 사랑 이야기들은 재기가 넘쳐 흐르다못해 읽는 이의 내면을 적신다. 쿤데라는 전체주의라는 견고함과 경직성 안에서 에로티시즘의 세계를 발견 한다. 인간의 실존을 엄금 당한 세계에서 실존의 실오라기라도 발견할 수 있는 은밀한 장소가 에로티시즘의 세계가 아니고 또 어디있겠느냐는 일곱 편의 골 때리는 항변인 셈이다. 물론 전체주의의 마수는 한 올의 실오라기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에로티시즘은 관능적이지 않고 옹색하다. 섹시하지 않고 우스꽝스럽다. 본능적이지 않고 사색적이다. 역시 그만두는 편이 낫겠다. 벌써 찬란하고 영롱한 쿤데라의 소설이 색을 잃어가는 듯 싶다. 다만 일곱 편의 우스운 사랑 이야기 곳곳에 앞으로 그가 써내려갈 소설들의 중요한 파편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만을 언급하고 말겠다. 삶의 가벼움과 무거움, 성(sex)의 문제, 불멸에 관하여…….
독자는 그저 배꼽을 잡는 사이에 그가 톡톡 벗겨내는 가면 뒤의 실체를, 혹은 또 다른 가면을 음미하다가 끝이 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