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페터 빅셀 지음, 전은경 옮김 / 푸른숲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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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느낌이 묘하다. 뭐라고 할까? 회색빛이 감도는 도시를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아니면 안개가 자욱한 런던을 생각할 때의 느낌이라고 할까? 어쨌든 유쾌하거나 발랄하지는 않다. 하지만 저자의 과거모습이나 우연히 스쳐지나갔던 장면들을 생각하며 적어가는 문장들은 무척 자연스러워 빙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듯이 쉽게 읽을 수 있다. 저자의 생각과 호흡을 느낄 수 있는 문장력이 이 책을 좋은 에세이라고 평가하게 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책에 나와 있는 이야기들의 공통주제는 ‘기다림’이다. 구체적인 뭔가를 기다린다기보다 뭘 기다리는지도 모르면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기록했다. 저자는 기다림 속에서 평안함을 찾는 예전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것 같다. 창밖을 내다보며 누군가 올까 하는 설레임(기다림), 커피 한잔 마시며 앞좌석에 앉을 누군가에 대한 기다림. 한적한 언덕에 앉아 누군가 자신과 말상대를 그리워하는 마음 등,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모른 채 그저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기다리는 게 오리라 기대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책을 읽다보면 우리가 너무 빡빡하게 살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기다림을 거부하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게다가 마음은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항상 무엇엔가 쫒기는 것처럼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저자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한다. 기차를 타고 가는 여행객에 대한 내용인데 사람들은 기차를 탈 때 어디론가 가겠다는 목적을 갖고 탄다. 그게 두 시간이든 세 시간이든 기차가 움직이는 동안에는 모두가 딴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어차피 기차는 승객이 무엇을 하든지 간에 상관없이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필자의 관심을 끈 부분은 기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난 다음이다. 아직도 기차가 목적지에 도착하려면면 오 분 이상의 시간이 남았건만 승객들은 벌써 짐을 싸서 통로에 줄지어 서있다. 마치 조금이라도 어물쩍거리면 내리지 못할 것처럼 말이다. 우습지 않은가. 나도 그런 사람 중의 한 명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때 나는 왜 그랬을까? 어차피 내가 서 있으나 앉아있으니 처음에 내리는 사람과 나와의 시간 차이는 기껏해야 5분정도도 차이가 안 나고, 내가 내릴 때까지는 기차는 절대 떠나지 않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자리에 앉아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서서 도착하길 기다리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볼 것 같았고, 왠지 모르게 할 일없는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았다. 시간이 남아도는 그런 사람.

저자는 이를 ‘기다림에 지친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평생 뭔가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이다. 태어나서부터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사는 인생. 오늘은 잊고 내일을 기다리며(기대하며)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상 속에서 새해가 되면 설날을 기다리고, 설날이 되면 봄을 기다리고, 봄이 되면 여름휴가를 기다리고, 여름휴가를 보내면 다시 추석,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살아간다.

하지만 목적지에 도착할 때가 되면 서둘러 다음 목적지를 찾는다. 오랜 시간 동안의 기다림을 저 멀리 던져버리고 또 다시 다음 목적지를 향해 기다림 속에서 살아간다. 그곳에 도착하면 조금 여유로워질까? 글쎄다. 아마도 그 목적지가 끝이 아니기에 또 다시 다음 목적지를 기다리게 살아가지 않을까 싶다. 어차피 어디에 도착하든지 서둘러 다음 목적지로 갈 것을 무엇 때문에 그리도 목적지에 도착하는 걸 애타게 기다렸는지...

저자의 말 중에서 ‘사람들은 현재 이 순간을 항상 최악으로 생각한다.’는 말이 무척 인상 깊다. 과거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미래는 보다 나은 삶이 오리라 기대하면서도 현재는 항상 가장 괴롭고 고통스러운 날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특히 과거에 대해서 사람들은 무척 후한 점수를 주는데 과거에 힘들었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괴로웠던 일이나 힘들었던 기억은 잊어버리고 멋진 순간들만을 연결하여 새로운 시나리오 하나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는 “예전에 말이야. 그때...”하면서 행복에 빠진다. 하지만 아름다웠던 그때에도(당시에는 그때가 현재였을 것이다) 그 이전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런 꿈을 꾸지 않았을까. 빛이 바랬기에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기에 그리운 과거일 뿐이다.

하지만 지난날을 생각할 때 그리운 게 하나 있다. 하루를 마치고, 일 하나를 끝내고, 한 주를 열심히 보낸 후 맞이하는 일요일의 의례다. 

오래 전 일요일. 당시 일주일은 육일동안 열심히 일하고 하루 쉰다는 기분에 늦장 부리던 날이었고, 동시에 가족들과 싸우기에 바쁜 날이기도 했다. 아내는 오래간만에 가족들이 모였으니 놀러가야 한다고 아침부터 짐 싸기 시작하고, 아이는 지겨운 학교에서 해방된 날을 어떻게든지 알차게 보내야 한다고 투정부렸다. 나는? 이런 투정 속에서 내가 일주일을 얼마나 힘들게 보냈는지, 그래서 오늘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지 설득하기에 바빴다. 아무 것도 안 하고 하루 종일 뒹굴 거리려고 말이다.

세월이 지나 지금 나에게는 평일과 일요일에 구분이 없다. 학교 수업이 있을 때는 강의 일정이라도 있으니 강의 없는 일요일은 당연히 휴일기분이 나고, 또 토요일에 수업하는 창업대학원덕분에 일요일은 더욱 값진 휴일이 되었지만 방학 때는 월요일이나 일요일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날자 구분은 미팅이나 강의 있는 날과 아무 일정도 없는 날의 구분뿐이다. 게다가 일요일만 되면 아침부터 수선떨던 아내도 조용하고, 아이는 잠자기 바쁘다보니 일요일이 일요일 같지 않다. 그저 나 혼자 새벽에 일어나 커피 한잔 마시고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는 것뿐이다. 평일과 마찬가지로. 

가끔 누군가 나에게 주말, 휴일 잘 보내라고 말하면 조금 얼떨떨하다. 평일이나 일요일이나 별반 차이 없는, 하루 8시간 근무와 퇴근 개념이 없는 나에게 평일과 주말 구분은 더욱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순간 허전함을 느낀다. 소중한 뭔가를 잃어버린 그런 심정이랄까.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는 삶,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나만의 시간 속에서 내 멋대로 살아가는 삶을 그토록 원했건만 왜 이런 느깜을 받는 걸까? 예전에 기차나 고속버스를 볼 때마다 어디론가 가 버리고 싶었던 충동이 바로 지금의 모습이었을 텐데 말이다.

사람에게는 뭔가 시작과 끝맺음이 필요한 것 같고, 그때마다 이를 기념할 의례가 필요한 것 같다. 거기서 과거와 미래가 나눠지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일요일만 되면 놀러가야 되니 쉬어야 하니 하며 옥신각신했던, 그 싸움 속에서 누가 이기던지 간에 진 사람에게 위로한답시고 별식을 만들어 먹었던, 갈 곳이 없으면 집밖에라도 나가 쇼핑이라도 했던 그것들이 따지고 보면 한 주를 보냈다는 끝맺음의 의례들이었고, 나는 그것을 통해 새로운 한주를 맞이했던 것 같다.

세상이 개인화되다보니 이제는 과거에 존재하던 수많은 의례들이 하나둘씩 사라져간다. 퇴근시간에 동료들과 한잔하던 것도 하루 일이 끝났다는 의례였고, 휴일에 가족과 함께 놀러가거나 교회에 가는 것도, 하다못해 공원을 산책하는 것도 일주일을 마감하거나 시작하는 것을 알리는 하나의 의례였다. 그러나 지금은...

나는 오늘(일요일) 혼자만의 조촐한 의례를 진행하고 싶다. 옥신각신할 가족도 곁에 없고(아내는 바쁘고, 아들은 군대에 갔으니까), 어디론가 가야 할 곳도 없는 휴일이지만 그래도 나는 아내의 빈방과 아들의 방을 청소하고, 어제 사 온 고구마를 직화냄비에 구워 맥주 한잔 하면서 오늘이 일요일임을 만끽하고 싶다. 그리고 평일과 별 차이 없는 일요일이지만 오늘이 지나면 다시 다음 일요일을 기다릴 것이다. 

기다림. 뭔가를 기다릴게 있다는 것은 무척 좋다. 이는 오늘보다는 나은 내일이 있다는 것을, 내가 원하는 것이 이뤄지리라는 기대를 일깨워주는 삶의 지표다. 그리고 길고 긴 세월을 항상 새로움을 가득 채우기 위해서는 매순간을 기념할 의례가 필요하다. 누군가 결혼생활이란 먼 기차여행 속에서 행하는 중간 역의 이벤트라고 하지 않았던가.

특별히 뭔가를 기다릴 게 없는 일요일. 그러나 나는 다음 일요일을 기다리며 또 다른, 나 혼자만의 의례를 만들 것이다. 일요일이라 해서 평일과 별반 다를 건 없지만 반드시 이뤄야 한다는 강박관념 없이 기다림 자체를 기다리는 모습 속에서 잠시나마 자유로운 나를 발견한다. 저자처럼 말이다.

기다림과 연관 지어 저자가 꼬집은 현대 사회의 문제는 우리 모두가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모든 것이 자동화되어 가는 세상, “급해. 급해”를 외치며 모든 일을 간단하게 처리해 주길 원하는 현대인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 말없는 대화와 일상의 대화가 사라지는 모습이다. 

“요즘 외국인들과의 융화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오간다. 외국인들도 이제 좀 우리 언어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언어를 배워서 누구와 이야기할 지 궁금하다. 누가 시간을 내서 그들과 친근하게 이야기한단 말인가? 현금인출기와 차표 자동발매기가? 어쨌든 융화는 이런 것과는 다르다. 우리 언어를 잘하면서도 융화를 동경하는 외국인들도 많고, 융화를 원하는 내국인들도 점점 많아진다. 융화는 외국인의 문제가 아니라, 효율만을 목표로 삼는 사회의 문제다. 효율은 결국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이 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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