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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안단테 칸타빌레
김호기 지음 / 민트북(좋은인상)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누구나 살다보면 생각지도 않은 고통과 어려움을 겪게 되고, 이런 상황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고민했던 경험이 한 두 번은 있을 것이다. 경미한 문제라면 크게 고통 받지 않고 넘어갈 수 있지만 그것이 자신의 인생행로를 바꿀 정도라면 무척 심각하다. 예를 들어 투수의 팔목에 고장이 난다거나, 촬영기사의 눈이 흐려진다거나, 노래를 해야 하는 가수가 목청에 문제가 생기는 것과 같은 경우다.
이 책의 주인공 역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으로 손가락에 문제가 생겼다. 평상시에는 별 문제없이 지내지만 섬세한 바이올린을 잡고 연주를 시작하면 손가락이 제대로 움직이질 않아 음을 따라갈 수 없었다. 물론 저자도 처음에는 피곤해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급작스러운 문제가 발생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손가락은 원상태로 돌아오지 않고 문제는 더욱 심각해져 전문의를 찾아 미국까지 가게 되었고, 의사를 통해 진단한 결과 손가락 자체보다는 허리에 문제가 생겨 손가락을 다시 사용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살아가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지만 저자의 생명과도 같았던 바이올린 연주는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상적인 움직임과는 달리 매우 섬세한 동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연주자가 되겠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저자에게는 무척 큰 충격이었다. 더욱이 오랜 시간동안 한 분야로만 파고 든 저자에게는 바이올린 연주 이외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았다. 당시 저자 머릿속에는 단 두 가지 생각뿐이었다. 지금 상황을 숨기고 어떻게든지 연주를 계속할 것인가?(교향악단 일원이었으니까) 아니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른 것을 찾을 것인가?(하지만 이 문제는 간단하지 않았다. 아는 게 바이올린 연주뿐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바로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바이올린을 만드는 일이다. 최소한 바이올린의 소리가 어떠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고, 바이올린에 대한 애착과 관심이 자신의 주 전공을 바꿔도 자신을 지치지 않도록 도와주리라 확신했다.
하지만 저자 앞에는 많은 장애물이 놓여있었다. 악기를 만든다는 게 목공처럼 나무를 자르고, 대패질하고, 못을 박고, 색칠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재료선택부분부터 시작하여 마감할 때까지 매우 섬세한 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내 바이올린제작기술은 별로 높지 않았고, 제작법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남에게 전수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국내에서 배우겠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찾게 되었고, 마침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언어도 통하지 않는 이탈리아로 가기로 결정했다.
이 책의 대부분은 저자가 이탈리아로 떠나 생면부지인 장소에서 어떻게 오랜 시간 동안 지치지 않고 공부할 수 있었는지, 뭔가를 만들어본 적도 없는 그녀가 힘든 제작 작업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향해 한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는지에 대한 내용이다.
그녀의 결론은 사람이다. 아는 것도 없는, 가 본적도 없는, 언어도 통하지 않고 음식도 맞지 않은, 게다가 돈마저 부족한 상황에서 자신이 지치지 않고 마이세트라 과정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함께 공부했던 학생들 간의, 또 공부를 가르쳐 준 교수와 학생과의 우정과 애정, 관심덕분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성공담을 보면 대부분 자신 앞에 닥친 고통과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영웅담을 쓰듯이 정리한 책을 자주 본다. 또 우리도 당연히 어려움을 극복한 책이라 하면 당연히 그런 내용이 실려 있으리라 생각하고.
하지만 이 책을 보면 저자의 영웅담은 없다. 도리어 영웅으로서의 주인공보다 연약하지만(저자가 연약해 보이지는 않지만) 서로 함께 기대어 어려움을 이겨내는 멋진 휴먼드라마를 느끼게 되고, 누구나 가슴 깊이 간직한 인간들의 원초적인 감정을 만난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감정 말이다.
이 책에서 영웅은 사람이 아니라 음악이고, 음악을 사랑하는 인간의 감성이다. 음악은 인간의 감정을 울리고, 그 울림이 인간과 인간과의 사랑을 만들고, 그 사랑 속에서 서로의 아픔과 외로움을 이겨내게 만들어준다. 사랑과 열린 마음, 배려라는 감정. 이것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이겨낼 수 있다는 멋진 메시지를 전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