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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만나는 치유의 심리학 - 상처에서 치유까지, 트라우마에 관한 24가지 이야기
김준기 지음 / 시그마북스 / 2009년 7월
평점 :
사람이 살면서 놀라거나 두려움을 한 번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건널목에서 자동차가 갑자기 급정거하는 것도 놀라움이고, 기대했던 시험에 떨어지는 것도 충격이며, 애인에게 버림받았다는 감정도 무척 큰 괴로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상황이 닥쳐도 ‘에이. 놀랐잖아’ 아니면 ‘어쩔 수 없지. 뭐’하고는 잊어버린다. 아니 잊지 못하더라도 안 좋은 기억이나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사건 정도로 생각하고 기억 저편으로 던져버린다. 물론 당시에는 힘들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런 고통, 괴로움이 어쩌다 한 번 정도라면 모르겠지만(물론 이것도 무척 강할 경우에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지만) 몇 번씩, 그것도 아주 강한 자극상태에서 여러 번 접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유사한 상황만 봐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옴짝 달싹 못하게 된다.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자신 뜻과 상관없이 똑같은 상황에 처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과거에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생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이 가끔, 일정 기간 정도 발생하다 말면 그만이지만 당사자의 일상을 쫓아다니며 한 인간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거나 의사결정 자체를 못하게 만들거나 정상적인 생활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면 그땐 정신병이 된다. 이 책의 주제 트라우마다.
저자는 트라우마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즉 신체적 정신적 충격을 경험한 후 나타나는 심리적 외상이라고 정의하면서 이와 같은 장애가 겉으로는 잘 들어나지 않지만, 사람들의 삶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심각한 정신장애라고 한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것은 고통을 겪는 당사자 이외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거나 인정하기 어려운 증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약 당신이 어릴 때 불 때문에 큰 화상을 입었던 경험이 있다고 치자. 아마 당신은 당연히 불을 보면 당시 기억이 떠오를 것이고, 다른 사람에 비해 불을 무서워하게 될 것이다. 마치 좁은 공간에 갇힘으로써 고통 받은 사람이 자라면서 ‘밀실공포증’을 경험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불이란 게 잘못 사용하면 인명과 재산을 불태워버리지만 잘 만 사용하면 많은 도움을 주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불에 대한 공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불과 관련된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사람에게 뭐라고 할까? 아마도 “괜찮아. 괜찮아. 불 곁에 가지 않으면 되잖아. 또 여기 소화기도 있고...” 하면서 달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는 지금 상황이 과거와는 다르고, 두려운 불과 거리를 두고 있고, 소화기도 옆에 있다는 것보다 불에 화상 입은 과거 기억으로 돌아간 상태이기에 이런 말이 귀에 잘 안 들어온다. 당연히 이런 당사자를 보고 주위사람들은 답답해 할 것이고. 트라우마. 우리가 평소 잘 느끼지는 못하지만 인간의 삶 속에서 무척 흔히 겪게 되는 상황이다.
이 책은 무척 재미있다. 트라우마란 단어는 처음 들어봤지만 그런 상황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트라우마를 겪게 되는 사람의 행동이 어떤 것인지, 그들이 평소 겪는 고통이 무엇이며, 그로 인해 그들의 삶이 어떻게 전개되는지에 실감나게 써 놨다. 학문적인 내용이나 병원에서 치료한 임상례를 갖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 아니라 영화 속에 나온 주인공의 모습 속에서 트라우마를 찾아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봤던 영화라면 ‘아! 그때 그 모습이 바로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의 모습이었구나.’ ‘아 그때 주인공의 행동이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구나’ 생각하게 된다. 특히 관심 있게 봤거나 감동받았던 영화라면 저자의 이야기는 더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나도 이 책에 나온 영화중에서 ‘밀양’ ‘21그램’ ‘샤인’ ‘람보’ ‘미스틱 리버’ ‘나비효과’ ‘포레스트 검프’ 그리고 굿 월 헌팅‘을 봤는데 책을 읽는 가운데에서 내가 봤던 영화의 장면들이 눈앞을 지나가는 듯했다. 람보가 미친 듯이 울부짓으며 총을 난사하는 장면, 한 청년이 어린아이로 돌아가 여자 친구를 범하려는 아버지에게 대드는 모습, 정신적인 장애를 가진 한 청년이 그저 달리고, 달리면서 오로지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는 모습, 오랜 시간동안 굳게 닫힌 마음이 열리는 순간 앞에 서 있는 교수를 부둥켜안고 처절하게 우는 한 청년의 모습’ 등이다. 이 책에서 심리학의 전문용어는 일상의 단어가 되고, 트라우마는 특정의 사람만이 경험하는 이상한 질환이 아닌,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일반적인 질환이 된다. 나는 물론이고 내 주변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저자의 말 중 기억나는 말이 있는데 바로 이것이다. “안전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던 인간적인 근본 토대가 흔들리고 끊어지는 것, 그로 인한 극독의 무기력감과 고립감의 경험이 트라우마의 핵심적인 경험이라고 한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언제든지 내 편을 들어주고 내 아픔을 듣고 이해해주는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회복하는 것은 트라우마 치유의 핵심적인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을 통해 나는 내가 트라우마를 심하게 겪지 않은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누군가 내 곁에서 나를 바라봐준 덕분이라는 것이었고,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내가 그들에게서 받은 관심과 애정, 그리고 언제나 함께 하겠다는 믿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