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보물선 메릴 호
한가을 지음 / 엔블록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보물섬 같은 책을 읽어본 게 언제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고등학교 때는 입시 준비한답시고 맨 날 영어, 수학책만 붙잡고 있었고, 대학에서는 놀기 바빴고, 직장 들어가서는 업무에 필요한 책만 열심히 봤다. 그럼 지금은? 지금도 역시 강의하고 글 쓰는 데 필요한 책만 골라보는 상황이다. 그러다보니 <보물선 메릴호>는 나에게 무척 생소한 분야의 책이다. 그런 만큼 참신하게 와 닿기는 했지만. 머리를 복잡하게 굴리며 ‘이게 무슨 의미를 전달하자는 거지?’ 하는 등의 계산 없이 그저 읽으면 되었으니까 말이다. 특히 하루 일과를 마치고 책상에 발을 올려놓고 커피 한잔 마시며 읽으면 딱 좋다.
하지만 책 내용이 어린이 책처럼 그냥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내용이야 당연히 예전에 봤던 보물섬이나 톰소여의 모험 같은 류의 분위기이고, 어린 아이가 고생을 하면서 성장한다는 성장소설과 같은 흐름을 갖고 있지만, 책을 읽어보면 뭔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생각할 것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자주 받는다. 주인공 모이의 생각이나 그 앞에 놓여 진 선택지들, 주변 사람의 인물묘사부분에서다.
내용의 시작은 갑자기 집을 떠난 엄마와 그런 엄마를 미워하면서도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이런 아버지에게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그가 빌린 돈을 갚지 못하자 사채업자들이 아빠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눈에 들어온 것은 아버지가 간직하고 있는 엄마에 대한 기억을 빼앗아간다는 부분이다.
한 인간에 대한 기억을 빼앗긴다! 언뜻 듣기에는 좋은 기억은 간직하고 나쁜 기억은 없앨 수 있으니 이 아니 좋은가 생각할지 몰라도, 모이의 아버지도 이런 점에서 순간 솔깃했다. 그 기억은 바로 자기 인생의 일부이고, 그 기억이 없어지는 순간 인생의 일부분도 함께 없어진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어쨌든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가슴 아파하는 모이 앞에 이상한 별나라, 알모타 제국의 말괄량이 공주가 나타나 자신을 알모타까지 데려다주면 엄마도 만나고 보물도 얻게 해 준다고 유혹한다. 그리고 이 책의 핵심 내용인 모험이야기가 시작된다.
나 같이 이론서만 보던 사람으로서는 조금 적응하기 어려운 스토리의 전개. 하지만 그래도 15세기에서 18세기의 해적에 대한 역사적인 자료와 저자의 배에 대한 해박한 지식, 기타 물리학에서나 볼 수 있는 다양한 이론, 평행우주, 양자이론, 블랙우주론 등,이 책 읽기에 호기심을 자극한다. 아무리 모험이야기라도 일단 실제같이 느낄 수 있어야 하는 데 이런 부분이 나를 책 내용에 몰입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 책을 보며 느낀 것은 물질, 물건에 대한 가치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그것의 가치는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상황과 여건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가 즐겨먹는 커피만 해도 이것이 이토록 돈 되는 작물인 줄 누가 알았겠는가. 시커먼 열매에 씁쓰레한 맛이 있는 열매가 돈이 된다고 느끼는 순간부터 보물이 된 것이다. 전쟁까지 불사하면서 말이다.
게다가 다이아몬드. 이것은 또 어떤가? 다른 광석보다 단단한 성질을 가진 것을 빼고 다이아몬드가 그 정도 가치가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린아이들에게 다이아몬드와 예쁜 구슬 중에 무엇을 고르겠냐고 물으면 아마도 그들은 예쁜 구슬을 원할 것이다. 그것이 자신들에게는 더 가치가 있으니까 말이다.
또 하나는 가족에 대한 소중함이었다. 이는 구지 말로 표현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중요한 말이지만, 우스운 것은 이런 진리와 같은 말이 평소에는 별 것 아닌 것처럼 와 닿기 때문이다. 당연히 함께 있어야 하는 가족, 자신이 무엇인가 실수를 해도 넘어가 줄 수 있는 가족의 가치는 그것이 없어졌을 때만이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주인공 모이는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와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족의 가치를 여행을 통해 느꼈고, 그 마음을 독자들에게 선사했다.
몇 십 년 만에 처음 본 모험소설, 동화 같은 이야기지만 그 안에서 삶에 대한 새로운 면을 느낄 수 있었다면 너무 과장된 표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