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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기억은 진짜 기억일까? - 거짓기억과 성추행 의혹의 진실
엘리자베스 로프터스.캐서린 케첨 지음, 정준형 옮김 / 도솔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내가 4살 때인가. 우리 집은 일본식 집이어서 당시 집 구조는 안방 바로 옆에 부엌이 있었다. 요즘과 같은 부엌이 아니고 연탄으로 불을 붙이는 아궁식 부엌이었다. 당시 나는 거기서 도깨비를 본 기억이 있다. 그것도 아주 생생하게. 그 때 방에서는 내 동생이 울고 있었고, 나는 동생 우유병을 빼앗아 부엌으로 도망갔다. 부엌문을 열고 부엌으로 들어가는 순간, 나는 동화책에 나오는 머리에 뿔 달리고 눈이 하나뿐인 도깨비를 봤다. 그 놈은 부뚜막에 앉아 부엌으로 기어 나온 나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당시 기억이 잘못된 건지는 몰라도 이 기억을 더욱 생생하게 만드는 것은 그 때의 감정, 부뚜막의 온도, 심장고동소리가 지금도 분명하게 기억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억이 뚝 끊겨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억은 유치원 다닐 때부터다. 나는 어릴 때 이 기억을 어머니에게도 이야기했고, 집에 놀러온 친척들에게도 이야기 한 것 같다. 그러나 모두 꿈을 꿨다고 말하기에 잊어버렸다. 내가 갑자기 어릴 적 도깨비를 받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이 책 <우리 기억은 진짜 기억일까?>를 보면서 문득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이 책은 1990년대 미국에서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되었던 ‘억압’이라는 심리문제,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근친상간에 대한, 억압된 기억에 대한 책이다. 책의 이야기는 나이 20~30대까지 아무 일없이 잘 살던 사람이 심리적인 문제로 심리상담사에게 치료를 받으면서 갑자기 자신의 부모, 삼촌, 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당연히 고발된 당사자. 즉 부모들은 그런 일이 없었다고 펼펄 뛰지만 당시 사회분위기는 마녀 사냥하듯이 이들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들의 유죄선고 이유를 자녀들이 기억해 낸 어릴 적, 평소에는 기억하지 못하다 어느 날 갑자기 기억났다고 주장하는 성폭행의 기억에 의존했다. 쉽게 말하면 사람들은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면 그 기억을 느낄 수 없는 어떤 곳에 봉해두게 되는데 그것이 심리치료 상황에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마치 판도라상자가 열리듯이 말이다.
문제는 부모들이 이런 상황에 몰리면 자신의 무죄를 증거 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몇 년 전 이야기도 아니고, 자식이 아주 어릴 때인 몇 십 년 전의 일을 어떻게 증거 하겠는가. 게다가 이런 일이 가족 중의 한 명에게서 나타나면 거의 모든 자식들이 동일한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1990년대 미국에서는 100만 명 가까운 사람이 어릴 때 성폭행을 당했다고 고백했고, 덩달아 ‘근친상간’에 대한 책이 불티나게 팔렸고, 심리상담자들도 함께 주가가 올라갔다.
그 때 바로 이 책의 저자가 이러한 기억에 대해 반발을 했다. 인간의 기억이 컴퓨터처럼 별도의 저장장치가 있어 사람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저장해 두는 것이 아니고, 살아오면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사건들과 혼합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래 전의 기억은 당시의 정확한 기억이라기보다 당시의 감정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맞자는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오류는 프로이트의 심리학이다. 주로 기존 심리학자, 정신분석학자, 그리고 본 책의 핵심에 위치한 심리상담사들인데, 그들은 정신분석학에서조차 기억이란 정확한 것이 아니고, 당시의 감정 상태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현실이라고 왜곡한다는 것이다. 즉 이들은 세상을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고 자신들이 인간 내면속에 잠겨있는 지옥의 기억을 겉으로 끄집어냄으로써 그들을 천국에서 살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나는 심리학을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다행이도 저자는 양쪽의 생각을 가능하면 객관적으로 정리하고 있어 ‘억압’이라는 심리적인 용어의 의미와 그의 문제점, 그리고 기억이란 것이 무엇인지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게다가 내용도 가끔 전문적인 내용이 나오기는 하지만, 저자 개인의 경험과 실제 대화내용을 전면에 내세우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전문적인 이론을 설명했기 때문에 책을 읽는데 그리 어렵지 않았다. 뭐라고 할까. 책 내용에 대한 호기심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관심, 그리고 전문적인 지식을 얻고 있다는 세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았다는 느낌을 주는 책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내가 얻은 게 있다면 그것은 아래와 같은 심리학계의 한 주장이다.
“심리치료는 학대와 피해라는 어휘를 버리지 않고도 당면한 사회문제의 원을 탐구하는 장이 될 수 있다. 우리는 학대받는다는 느낌을 버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학대받는다는 느낌, 무기략하다는 느낌은 대단히 중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거에 의한 학대가 직업, 재정상태, 정부 등 내 삶에 함께 하는 모든 것들의 실체상황에 의한 학대만큼 크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심리치료실은 혁명의 산실이 될 것이다. ‘지금 나는 진정 무엇으로부터 학대받고 있나?’와 같은 문제를 논의하게 될테니 말이다.”
즉 과거의 문제를 파헤쳐 과거로 퇴행하지 말고, 현재의 상황에 그 문제를 대입하여 현재의 문제를 풀면 된다는 말이다. 멋지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