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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루만 더
미치 앨봄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우리는 어렵고 힘든 일을 당하면 무의식적으로 어머니를 생각한다. 내 곁에서 떠나지 않고 나를 지켜주고, 보호해주실 분은 그 분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나같이 아버지 없이 자란 사람에게는 더더욱 각별하다.
그 동안 살아오면서 ‘어머니’, 아니 평소대로 발음하면 ‘엄마’란 소리를 몇 번이나 했을까. 결혼한 다음부터는 조금 덜했겠지만, 어릴 때는 일이 생길 때마다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이 어머니였을 것이다. 자신의 이름보다 ‘엄마’로서의 위치를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자신의 기쁨보다 자식의 기쁨을 원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떠 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 어머니가 나 때문에 옆집 아주머니와 싸우던 모습이다.
하루는 동생과 집 앞 골목에서 놀고 있는데, 옆 집 아주머니가 시끄럽다고 창 밖으로 물을 뿌렸다. 아마 요즘 데모 진압할 때 소방차가 데모 대에게 물 뿌리는 것과 비슷한 이유였을 것이다. 근데 그 날 따라 그 물을 옴팍 뒤집어 썼다. 내 모습은 물에 빠진 생쥐 꼴, 바로 그 것이었다. 하지만 그 날의 악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가게에서 집으로 돌아오시던 어머니가 내 모습을 본 것이다. 그 다음 장면은 동네이웃간의 3차 대전과 비슷한 스토리다. 어머니와 옆집 아주머니가 싸움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되어 경찰이 찾아왔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이웃집 사람이 동네에서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경찰서에 신고를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옆집 사람은 이사 갔다.
수퍼우먼 같았던 우리 어머니. 그 날처럼 당신이 위대하게 보였던 적도 없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어머니는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어디선 가 나타나 ‘얘야. 걱정하지 마라. 엄마가 있잖아!” 하며 어려운 일을 도맡아 처리해 주셨다. 지금 생각해 봐도 내 인생 걱정의 절반은 어머니가 대신 해 주었던 것 같다. 세상에 그런 분이 또 있을까.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 아마 인간사랑의 극치를 표현하라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막상 나도 부모가 되어보니 내 자식이 눈물을 흘릴 때는 가슴에서 피가 나오는 것 같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항상 죄송한 것이 하나가 있다. 나이 50이 된 지금도,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지만,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다는 것이다.
물론 아들이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냐 만은, 우리 아버지는 어머니와 자식을 버리고 오래 전에 집을 나간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족을 버리고 자신의 삶을 살다 돌아가신 그분. 그로 인해 홀로 남아 20년이 넘게 아들 둘을 공부시키고 장가까지 혼자 보내야 했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와 함께 살아 온 나는 당연히 어머니의 아들이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런 이성적인 판단과는 달리, 나는 아직도 아버지의 아들이기를 원하고 있다. 아버지에게 칭찬 받고 싶고, 그 분이 따라주는 술 한잔 얻어 먹고 싶고, 세상이 힘들 때면 “아들아, 이 아빠는 말이다…” 라는 충고의 말도 듣고 싶다. 아버지란 존재는, 특히 아들에게는, 좀 별난 존재인가보다.
[단 하루만 더]를 쓴 저자는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을 쓴 사람이다. 그의 글은 항상 죽음과 연관된 삶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참 모습을 독자들에게 전달해 준다. 그는 이 책에서 오래 전의 미국사회, 즉 이혼한 여성을 죄인 취급하던 시대의 이혼가정을 보여준다. 두 살림을 차린 아버지와 그것을 알고 아버지를 버린 어머니. 그리고 갈라서게 된 부모를 원망하는 아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 책에 나오는 어머니는 남편과 헤어진 다음, 이혼녀에 대한 사회 편견때문에 직장을 그만둘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남의 집 청소를 하며 자식들을 키우게 되었다. 하지만 아들은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모른 채, 반쪽 부모에 대한 원망을 어머니에게 쏟아 부었다. 가까이 있는 부모는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몸은 어머니 곁에 있었지만, 마음은 항상 아버지의 아들로 살기를 원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뜻이었고, 그의 칭찬이었다.
어머니 생일날. (그 날은 어머니의 마지막 생일날이 되었다). 아들이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야구시합장 간 사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심장마비 였다. 물론 아들은 어머니와 아내에게는 야구시합에 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은 그 날의 죄책감(자신이 곁에 있었으면 살릴 수도 있었다는 생각) 때문에 방황하게 되었고,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아내와 자녀는 결국 그의 곁을 떠났다. (만약 어머니였다면, 방황하는 아들 또는 딸을 보며 그의 곁을 떠났을까.)
삶에 대한 희망을 잃고 자살을 시도한 아들. 그 앞에 어머니가 나타나 하루를 함께 보낸다. 아들은 어머니의 말을 통해 아버지와 어머니가 왜 헤어졌는지, 어머니가 자신을 어떻게 키웠는지 비로소 알게 된다. 그리고 하루 해가 저물어 어머니가 사라지려 하자 아들은 목메인 소리로 부르짖는다. “엄마는 좋은 어머니였어요…..어머니 가버리면 안돼요.” 어머니가 살아있을 때는 그토록 아버지만을 찾던 아들이 이제야 비로소 어머니를 찾는다.
책의 주인공인 아들은 이렇게 말한다.
“부모란 자식을 소용돌이 위로 안전하게 밀어올리는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그 과정에서 부모가 어떤 고통을 겪는지 아이들은 알 수가 없고, 따라서 부모에게 퉁명스럽게 대할 수도 있죠. 다른 때 같으면 안 그랬을 방법으로….. 모든 이야기 뒤에는 항상 어머니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이야기가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이야기의 시작이기 때문이죠.”
내 몸이 아플 때면 나보다 더 아파하는 어머니. 내가 원하는 것을 주고 싶어 항상 내 표정만 바라보는 어머니. 이제 나이 70중반이 넘으셨지만 아직도 어머니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내리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식을 키워봤기에 부모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부모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고 내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특별한 것으로 말이다.
갑자기 어머니가 보고 싶다. 한 달에 한번 찾아 뵙지만, 그래도 집에 간다고 일어설 때마다 쓸쓸하게 웃어주시는 어머니가 생각난다. 나이 50 가까이 된 사람이 아직도 부모 생각하며 눈물 흘리면 바보소리 듣는 것은 아닌지.
어머니 무덤 앞에서 “단 하루만 더”라는 말은 하지 않게 되었으면….
“… 우리의 하루는 누구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쓰라고 주어진 하루입니다. 그러면 매일이 단 하루를 보내는 것처럼 소중해지지요. 이제 나도 오늘 하루,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바로 잡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