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 북 - 젊은 독서가의 초상
마이클 더다 지음, 이종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오픈 북]. 내가 이 책을 보게 된 이유는 책 표지에 나온 저자 소개 때문이다. 1948년 오하이오주의 로레인에서 (태어나)소년 더다는 어린 시절부터 홀로 독서에 열중, 조숙함을 드러내며장학금을 받고 명문 오벌린 칼리지에 입학한 뒤, 약간의 방황 끝에 문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했고,코넬대학에서 비교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8년부터 더다는 <워싱턴포스트지> 문학기사를 기고하기 시작했다. 현재도 <워싱턴포스트지>에 서평을 집필하고 있으며, 미국을 대표하는 서평가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내 눈을 더욱 자극한 문장은 다음이다. 1993년 그의 서평들에 대하여 퓰리처상이 수여되었다. 미국 독서계의 절찬을 받았던 [오픈 북]은 2004년 오하이오나 도서상의 논픽션 부문을 수상했다.

서평도 상을 받을 수 있는 건가? 내 것이 아닌 남의 글을 평가한 것인데? (물론 비평, 평론분야가 있기는 하지만). 서평을 가지고 퓰리처상을 받아? 게다가 이 책 [오픈 북]이 논픽션부문의 상까지 받았어? 서평, 정확하게 말하면 책을 읽은 후 독후감 수준의 글을 쓰던 나에게는 무척 흥미 있는 내용이었다. 어떤 서평이길래 상을 받았는지, 그리고 이 책이 어떤 내용이길래 논픽션부문에서 수상했는지 궁금했다. 망망대해에서 조각배 하나에 의지하여 떠다니던 사람이 갈매기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랄까? 어쩌면 내가 고민해 온 모든 것을 단 칼에 해결해 줄 책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고민이라기보다 풀어야 할 과제는 내가 쓰는 서평(독후감)을 좀 더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서평을 쓴지 3년. 처음에는 직장생활에 대한 회의와 이유를 알 수 없는 삶의 허무함을 잊기 위해 글을 썼다. 조금 지나자 글은 내 안에 쌓여있던 아픔과 서러움, 지난 날에 대한 후회를 토해내기 시작했고, 구토 물 같은 글을 보며 해방 감 같은 것을 느꼈다. 거의 40년 동안 가슴 어딘가에 고여있던 새까만 기름 덩어리들. 공기도 통하지 않은 밀폐된 공간에서 오랜 시간 동안 나를 아프게 했던 것들이다.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났다. 언제부터인지 이 글들은 하나의 정형을 띠기 시작했다. 책을 보며 느낀 생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것이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은 채 손가락이 가는대로 자판을 두들겼다. (물론 글을 쓴 다음, 한번 정리하기는 하지만). 나는 이를 [일열의 나를 찾는 독서]라고 이름 붙였다. 책을 통해 본래의 나를 겉으로 드러내는 글쓰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통해 발견한 나는 겁에 질려 세상 밖으로 한 발도 움직이지 못하는 광장공포증에 걸린 아이의 모습이었다. 경제력에 대한 두려움, 아버지에 대한 원망, 잘 들리지 않는 귀에 대한 안타까움, 주위사람이 자신을 미워할까 두려워하는, 게다가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철부지 소년의 모습이었다.

처음에 썼던 글은 과격했고 거의 통곡 조의 글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부드러운 문장으로 바뀌었다. 가장 아팠던 것들, 어머니, 동생, 아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그들에게 준 상처와 그들로 인해 받은 아픔이 조금씩 아물었기 때문이다. 급성증상이 사라지면서 안정을 찾은 것이다.

나는 가끔 내가 쓴 서평들을 다시 본다. 비록 몇 년 안된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속에서 내 정신과 영혼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 수 있다. 마치 악몽에 시달리다 잠에서 깨어나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진정을 찾아가는 모습이랄까. 어쨌든 독서와 서평은 나를 치유하는 그 무엇이었다. 어떤 때는 심리상담사처럼, 어떤 때는 종교에서 말하는 성령의 따스함처럼, 또 어떤 때는 독서치료에서 말하는 자가 치료 수단으로써 나를 흔들고, 어루만지며 이유 모를 불안과 두려움, 삶에 대한 회의를 내 머리 속에서 하나씩 지워나갔다.

가끔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세상을 그리 험하게 살지 않은 나도 이토록 많은 아픔과 고통을 안고 살아왔건만, 나보다 더 어렵고 힘들게 세상을 살아온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멍에를 가슴 속에 담은 채 살아가고 있을까? 만약 그것을 풀어내지도 못하고, 자신이 왜 두려운지, 왜 고통스러운지 이유도 모른 채 눈을 감는다면 그 육신을 바라보는 영혼은 얼마나 가슴 아플까?

이제 독서는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어쨌든 하루 세시간 정도는 책을 보는 것 같고, 월말에 읽은 책을 정리해 보면 대략 20권이 넘는다. (강의 안, 책 원고 쓰는 것 때문에 보는 책까지 합치면 말이다.) 또 어떤 날은 하루종일 책만 보는 날도 있다. 나에게 독서하기 가장 좋은 시간은 지방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고속버스 안이다. 하루 일을 마쳤다는 만족감과 책 읽는 것 밖에는 다른 일을 할 수 없다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는 먹고 살 것은 생각해야 할 시간에 책만 봐서 될까 하는 걱정이 가끔 나를 건드린다.) 이 때 나는 책에서 평온함을 느낀다. 조용한 야외카페에 혼자 앉아 선선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진한 커피를 한잔 마시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이 책 [오픈 북]은 내가 이 책을 보게 된 이유와는 달리 나를 조금 불편하게 만들었다. 책을 보고 그것을 토해냄으로써 먹고 살 수 있는, 게다가 세상의 인정까지도 함께 받는 저자의 삶이 무척 부러웠다. 아니 부러움이 지나쳐 샘까지 났다.

물론 저자는 오랜 세월동안 하나만을 생각하며 살았다. 책에 코 빠진 아이라는 부모의 핀잔과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지 못하는 서러움 속에서 오로지 책만 봤다. 게다가 고전문학, 소설, 시 분야의 유명한 책은 거의 대부분을 섭렵했고, 거기에 별도로 작문법을 배웠고, 3개 국어를 할 줄 알며, 게다가 서평전문기사로부터 개인적인 교습까지 받으며 성장했다. 저자가 쓴 글의 깊이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나는 궁금했다. 저자와 같은 교육을 받지 못했고(문학, 문장에 대한 교육은 놀다시피 하며 받은 국문학과 졸업장이 전부다), 그가 읽은 책은 대부분 겉 표지만 봤을 뿐이지만(그것도 번역본이 있는 것만) 어떻게 하면 저자처럼 될 수 있을까? 책을 어떻게 정리하고, 어떤 내용을 쓰면 서평으로 먹고 살 수 있을까?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었지만 아직 잘 모르겠다. 그것도 일주일이나 걸려서 말이다. (나는 보통 2~3일에 한 권을 본다.) 이 책만으로는 그가 쓴 서평이 어떤 식으로 작성된 것인지 확인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단지 책 속의 내용으로 짐작하건대, 특정책 한 권에 대한 평이 아닌, 어떤 주제나 테마에 대한 종합 평론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많은 책을 읽고, 그들의 가진 공통점과 차이점을 정리하는, 책들간의 관계를 잘 알지 못하는 한 쓰기 어려운 내용일 것 같다. 특히 문학 쪽에서 이런 글을 쓰기 위해서는 저자에 대한 많은 자료가 필요하다. 문학과 저자는 따로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가 쓴 책을 좀 더 봐야 할 것 같다. 저자의 서평에 대한 독특한 시각과 그의 글 솜씨를 배울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자서전처럼 쓰여진 이 책 [오픈 북]처럼 어떤 지루함이나 거부감을 주지 않은 저자의 글 솜씨가 나에게 필요하다.

나는 책을 좋아한다. 그리고 모으는 것보다 읽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렇기에 돈이 안 되더라도 나는 서평을 계속 쓸 것이다. 글을 쓰는 그 순간이 나에게 희열을 주기 때문이다. 특히 그 안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내가 이 책을 통해 얻은 것은 서평도 하나의 문학이라는 점(문학도들이 볼 때에는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서평을 통해서도 최소한 먹고 살수는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소설 쓰듯이 쓰는 서평도 가능하겠다는 점이다.

일단 쓰자. 저자, 마이클 더다를 생각하며 그가 이루어 놓은 것을 시샘하며 쓰자. 그것이 무엇이 되든지 간에. 언젠가는 나도 서평 전문가라는 말을 듣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안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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