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욕.’
단어 자체가 부정적으로 와 닿는다.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불쾌하고, 마음 속에서 버려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단어다. 욕심이 많고, 사리 불변력이 없고, 남들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몰래 하는 듯한 기분이랄까.
TV 드라마에서 인기를 끄는 불륜내용의 기본 감정이고, 도벽이나 중독증과 같은 수준의 행동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책에서는 이를 “성행위와 그 쾌락을 위해 신체를 움직이게 하는 열정적인 욕망이다.” 라고 정의한다. 즉 성욕을 말한다.
우리가 섹스를 원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자식을 낳기 위해, 성적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배우자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등등. 그러나 이 책에서 문제시 하는 것은 젊은 남녀가 번식이라는 생물학적 목적에는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오로지 성행위 자체를 목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이 책은 고대 그리스 시대의 유명한 철학자부터 현대의 버트런드 러셀까지 다양한 철학자들의 생각과 의견을 인용하면서 바로 앞에서 말한 정욕의 부정적인 측면을 재미있게 전달해 준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수의 이야기는 무척 관심있게 읽었다. 아마도 천주교에서 자주 듣는 성인의 이름이라 그런 것 같다.
저자는 정욕에 대한 그의 생각을 ‘성혐오증’이라고 정의한다. 십대 시절부터 동거했고 아들까지 낳아준 여인과의 인연을 끊으면서, 그들을 버렸다는 죄의식을 성행위에서 비롯되는 사악한 쾌락으로 치환했다고 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바울이 보낸 편지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은 그는 과거의 방탕한 생활을 반성하게 혐오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원죄개념에 바탕을 준 가공할 신학을 꾸며냈다. 바로 아담이 모든 인간에게 죄를 물려준 탓에 누구나 정욕의 죄악에 물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천주교 교리의 핵심 논리이기도 하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살던 시대는 정욕이란 어둠이며, 악의 자식이라는 개념이 성행할 때였다. 극단적으로는 금욕만이 악의 세계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줄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던 시절이기도 했다. 결국 이런 세상에서 구지 아이를 낳을 필요가 있겠는가 물으며 섹스 자체를 포기하고 성령과의 행복한 결합만을 추구하라고 외칠 때였다. 어떤 사람은 성자가 되기 위해 스스로 거세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한 개념을 세상에 퍼뜨린 종교 중 하나가 바로 마니교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현실적인 존재를 악으로 보았기 때문에 아이를 낳지 않기 위해 성교시간 자체를 정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아마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별로 바쁘지 않아 아무 때나 성교를 했던 것 같다.
그럼 정욕이란 나쁜 것인가? 저자는 이에 대해 정확하게 대답하지 않는다. 단지 모든 것은 과잉 상태가 나쁜 것이다. 자신이 그것을 통제하지 못할 때 문제가 될 뿐이다. 정욕, 성욕 등에 대한 개념을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는 식의 표현으로 독자 스스로가 판단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역시 수 많은 철학자들의 의견 중에서 자신이 선호하는 개념을 말하고 있다. 17세기 철학자인 토머스 홉스의 생각이다. 정욕도 음악을 함께 만드는 것과 같다는 그의 생각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것을 쾌락과 대응의 교향곡을 함께 만드는 순수한 상호성이라 말하며 ‘홉스식 결합’이라고 정의한다.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성적 취향이 번식을 위한 의식적인 욕망과 거의 관련이 없음은 확실하다고 한다. 정욕은 번식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성교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수음, 동성애, 노년의 섹스, 피임상태에서 하는 섹스, 오럴 섹스 등에 열중할 뿐 유전자의 투여라든가 경쟁, 자본 지출에 대한 수익이라는 관점에서 사고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며 나름대로의 결론을 제시한다.
그의 결론은 보자.
“정욕은 타인의 정신을 정복하거나 제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 핵심은 홉스식 통합을 실현하려는데 있다. 홉스식 통합은 형이상학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으며 타인에게 결코 사악한 의도를 품지도 않는다. 그 과정이 순조롭게 풀린다면, 우리의 요구에 상대방도 역시 기뻐할 것이다.”
정욕도, 성욕도, 섹스도 우리 자신의 일부다. 본능 속에 감춰진 소중한 감정과 욕구다.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사용할 것가에 달려 있다. 즉 그것을 통해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 기쁨을 상대방과 나눌 수 있는 것인지에 달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