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 & 보어 : 확률의 과학 양자역학 지식인마을 5
이현경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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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의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그 근간이 되는 과학의 패러다임 변화에는 무심했던 것이 사실이다. 전공자가 아니기에, 가볍게 읽고도 대강의 내용을 훑어보고 싶은 책을 찾아보았는데, 내용까지 알차서 안성맞춤이다.

 

이 책은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그 핵심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병렬되어 있어 우선  가독성이 좋다. 이 책 전반에서 가장 흥미로는 단어는 아무래도 "경향"이지 않을까 싶다. 뉴턴의 고전 역학 세계에서 확실히 "존재"하던 물질이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단지 "존재하려는 경향"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세계를 바라보는 근간 자체를 뒤흔드는 획기적인 전환점일 수 밖에 없다.

 

이전에는 주어진 시간 안에서 위치와 속도를 알면 입자의 경로를 명확히 계산할 수 있어 결정론적 사고로 세상을 관측할 수 있었던  반면 이제는 예측 값 주위에 어떻게 분포해 있는지, 어떤 수치가 나타날 확률이 어느 정도인지만 계산 할 수 있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세계가 열린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강조했듯이 현실의 모든 사건은 본질적으로는 우연이지만, 확률은 필연적이라는 점.

 

학창 시절에 배운 열역학 에너지 법칙의 놀라운 함의는 흥미진진하기까지 했다. 에너지가 흐르는 물처럼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불연속적으로 변한다는 개념을 생각해 낸 막스 플랑크의 혁명적 사고가 이렇게 경이롭게 느껴질 줄이야.

 

아인슈타인은 통계역학을 연구하면서 가열된 물질의 에너지가 빛 에너지로 바뀌는 방식을 연구하면서 빛 에너지가 알갱이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해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빛의 양자 개념을 도출해낸다. 그리고, 실제로는 실험장치를 쓰지 않고 이론적 가능성을 따져 이어 맞추면서 마치 실험을 한 것처럼 머릿 속에서 결과를 유도하는 사고 실험을 통해 상대성 이론을 개발한다. 아인슈타인은 숨겨진 변수만 알 수 있다면 모든 현상을 예측할 수 있으며 무질서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이 함께 어울려 시공간을 이룬다고 보면서 시간은 영원할 수도 있고, 시작과 끝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라는 인식의 전환에 단초를 제공하는데, 이러한 맥락에서 신이라면 시간을 초월한 그 밖에 있는 존재여야 한다는 데까지 철학을 확장시키기도 한다. 또 하나의 원인이 반드시 하나의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가 복잡한 비선형의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복잡계 이론의 개발에도 단서가 된다.

 

미술에서는 피카소나 달리, 마그리트가 아인슈타인과 같은 사고를 한다. 4차원의 3차원 투시를 하는 것 같은 피카소의 그림이나 빛의 속도로 달리면 시간이 멈추고 길이가 없어지는데, 달리는 이 원리를 그림에 활용한다. 마그리트는 앞에서도 뒷모습이 보이는-두께가 없어지는-길이 수축의 원리를 그림으로 보여준다.

 

반면 맞수격인 보어는 플랑크의 양자 개념을 이용해, 원자 내부에서 전자가 특정 값을 지닌 궤도상만 작용하는 체계로 파악하면서 현재의 전자 구름 이론을 도출하는 징검다리 이론을 개발한다.보어는, 새로운 이론은 이전의 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했던 모든 현상을 다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대응원리와, 입자를 파동 또는 알갱이로 생각하면서 배타적인 모델로 측정할 수는 있지만 원자의 구성 입자들이 나타내는 현상을 완전히 기술하려면 두 모델 모두가 필요하다는 상보성의 원리도 주창한다.

 

한편 하이젠베르크는 전자의 위치를 측정하는 과정을 분석하면서 불확정성의 원리를 주창한다. 전자를 관찰하기 위해 광선을 내보내면 광선 속 광자가 전자에 충돌하면서 전자의 위치를 얻어낼 수 있지만, 이 과정에서 광자가 전자에게 자기 운동량의 일부를 전달하기 때문에 전자의 운동량 자체가 바뀐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양자역학의 핵심 원리 중 하나인 불확정성의 원리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이 동시에 확정된 값을 가질 수 없다는 것으로, 미립자의 세계에서는 입자가 파동의 성질도 겸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이러한 불확성의 원리에 따라 카를 포퍼는 <열린 사회에 그 적들>에서 인류의 운명과 역사는 결정되거나 닫혀 있지 않고,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려 있다고 주장했고, 관찰하고자 하는 대상이 관찰 수단에 의해 변화한다는 사실을 통해 '죄수의 딜레마'같은 게임 이론이 착안된다.

 

기초적인 상식이 부족해 혼돈을 느낄 즈음, 앙자론을 생각하면서 혼란을 느끼지 않으면 양자론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는 보어의 탄식은 오히려 희망이 된다.

 

양자론에서는 에너지가 연속적이지 않고 불연속적, 즉 계단 모양의 그래프로 그려질 수 있는데, 이것은 DNA 구조를 설명하는 데 적합하며, 반도체도 도체와 부도체의 중간으로 양자 도약을 활용하고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최근에는 입자 대신 모든 물질의 근원을 초끈으로 생각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여러 입자들은 한 가지 끈이 어떻게 진동하느냐에 따라 다른 질량과 물리량을 갖는다는 것에 착안해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도 인식하게 됐다.

 

이 책을 읽고 난후 얻은 최고의 결론은 과학, 예술, 경제, 철학 등 다양한 학문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새로운 인식의 확장을 위해 함께 경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빠르게 변화하고, 복잡하게 얽혀가는 현실 속에서 새로운 세계관을 열어가는 데, 과학도 한 몫을 성실히 담당한다.

양자역학은 어떤 현상을 구현할 때 오직 확률적으로만 예측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확률이라는 것이 엄격한 결정론적인 방식에 따른다는 것이다. 이를 해석해보면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본질적으로는 우연인데, 그 확률은 필연적이란 뜻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우연과 필연의 삼각관계에 놓여있는 것이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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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철학 - 깊은 공부, 진짜 공부를 위한 첫걸음
지바 마사야 지음, 박제이 옮김 / 책세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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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읽고나면 누구나 정교하게 잘 짜인 설계도면을 읽고 난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다. 내용도 훌륭하지만 무엇보다 책의 구성 체계 자체가 공부하기의 방법론을 배경에 감추어둔 것처럼 짜임새가 있다.

 

저자는 공부의 철학, 그 핵심을  동조에 서툰 삶이라고 정의한다. 빠르게 변하는 세태 속에서 생각하기도 전에 공감을 요구하고, 곧바로 동조하며 주변에 맞추어가는 삶 속에서, 공부하기란 얼렁뚱땅 휩쓸려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동조를 실험하는 모습으로 변모하며 결 다른 바보로 변신하는 가능성을 열어간다는, 사뭇 흥미로운 이야기로 철학의 세계에 초대한다.

 

공부는 결국 자기 파괴로써, 다른 사람의 기대에 의해 구축된 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진단하면서, 먼저 언어의 타자성과 가상현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익숙한 언어와 현실을 연결지어 사고하고 행위하는 동조의 틈새를 비집어 전혀 다른 용법으로 활용되는 언어의 지대를 구축하면서, 말하는 것 자체가 목적인 장난감같은 언어의 세계를 만들어나가야한다고 주장한다. 언어를 일부러 조작하는 의식적인 과정을 통해 기존의 동조에 서툰 언어를 사용하는, 언어 편중적 인간이 되어야한다는 것.

 

이렇게 언어를 완구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적인 기술로써 츳코미(아이러니)와 보케(유머)를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의 코드를 전복하는 기술이라는 것이다. 츳코미는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들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면서 의심하고 비판하는 것이라면, 보케는 갑자기 엇나가는 발언을 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아이러니는 근거를 의심하는 것이고, 유머는 시각을 바꾸는 것인데, 아이러니를 지속하다보면 코드의 초코드가 진행되면서 무엇을 믿고 말해야할지 알수 없는 코드의 부재, 탈코드로 나아가고, 이러한 파괴적인 과정을 겪으면, 그 언어의 진정한 의미를 추구하는 작업으로 변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언어의 껍질을 벗겨낸 진짜 현실 자체를 직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유머는 코드를 파괴하는 대신 확장 또는 감축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유머가 많아지면 의미가 너무 많아져 적당한 유머를 조작하기 위한 조건을 생각하게 되거나 정해진 코드 안에서 세부적인 이야기에 집착하면서 언어의 소리 등에 집착하는 향락적인 상태까지도 나아갈 수 있다고 본다.

 

즉 아이러니를 통해 과잉으로 나아가는 대신 중간에 유머로 전환하고, 다시 유머의 과잉화를 막는 방식으로 형태 자체의 향락을 이용하고, 다시 아이러니컬하게 분석하는 것, 그것이 깊은 공부의 방법론이라는 것이다.

 

두번째 과제로 욕망과 관련하여 공부를 실천하는 방법론으로써, 현상을 파악하여 문제로 압축하고, 다시 이 문제를 키워드로 도출해내는 과정을 거쳐야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깊이 파고드는 아이러니와 한눈팔기인 유머를 적절히 활용하면서, 신뢰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 나름의 개성적 판단을 통해 결론을 도출해 나가는 것이 깊게 공부하는 방법이라고 요약한다.

 

한편 깊이 공부하기 위하여 자신의 욕망 연표를 만들기, 독서의 방법론, 노트 활용법 등 유용한 팁도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다. 가장 탁월한 부분은 마지막 단락의, <이 책의 학문적 배경>인데, 이 책의 주요 철학적 근거가 되는 사상을 소개하고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 라캉, 비트겐 슈타인, 도널드 데이비슨, 푸코 등의 철학을 바탕으로 자신의 견해를 곁들였다는 적확한 기술은, 이 책을 통해서 새로운 공부의 세계로 진입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충분한 만족감을 제공한다.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은 공부란 획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공부는 상실이다. 기존의 방법대로 바보 같은 짓을 하는 자신을 상실하는 것이다. 기존의 자신에게 영어 능력과 같은 기술이나 지식이 더해지는 것이 공부라고 생각한다면 깊이 있는 공부를 할 수 없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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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정치 강의 - 사유하고 판단하지 않는 시민에게 정치적 자유는 없다!
이진우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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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시간 안에 격변을 겪은 요 몇년 사이, 우리 사회를 새롭게 진단하고 문제의 해법을 찾기 위해 주목한 정치철학자가 한나 아렌트라는 소식을 설핏 듣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치 철학에 문외한인 내가 어디서부터 읽어야할지 엄두를 못냈던 것이 첫번째 이유였고, 내가 지금 마주한 현장에서 아렌트를 읽는다는 의미에 대해서 통렬한 의지를 갖기 힘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코로나 19 팬데믹을 매개로 읽었언 책에서 아렌트의 언급을 보았고, 이진우 교수님이 아렌트의 정치철학을 간결하게 요약, 비판적으로 고찰하여 출간했다는 서평을 보자, 더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내 선택은 결과적으로 매우 옳았다.

 

저자는 전체주의를 이해하고자 했던 아렌트의 정치철학을 통해서 우리 사회를 새롭게 이해하는 틀을 새롭게 제공하고 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아렌트의 철학적 지평을 10가지의 주제로 나누어 설명한다.

 

 역사적으로 전체주의 정권이 무너졌다고 해서, 전체주의가 끝났는가, 무엇이 우리를 쓸모없는 존재로 만드는가, 괴물 같은 악을 저지른 자가 왜 괴물이 아닌가, 왜 완전히 사적인 사람은 자유가 없는가, 왜 우리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가져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자유로운가, 정치권력은 꼭 폭력적이어야 하는가, 정치는 왜 가짜 뉴스를 만들어야 하는가, 지배 관계를 넘어서는 평등의 정치는 가능한가, 어떻게 정치의 규칙을 만들 수 있는가.

 

10가지 질문을 제시하고, 아렌트의 저작들을 교차 시켜 해답을 풀어나가는 방식은, 아렌트의 수많은 저작들이 어떤 좌표에서 쓰여졌는지 가늠하도록 안내하는 동시에, 사상의 핵심을 정리하는 데 효과를 발휘한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속살을 진단하면서, 특정한 정권의 형태가 아니라 정치적 운동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일갈한다. 전체주의는 이념 자체에는 관심이 없고 현실보다는 미래에 대한 끊임없는 예측을 지향한다는 데 주목한다. 특히 더 공포스러운 것은 이념 자체에 관심이 없다보니, 이념에 대한 공적인 논의를 허용하지 않고, 경험을 통해 수정할 수 있는 기회마저 차단한다는 것이고, 거기에 현실을 바꿀 힘이 없으므로 논리적 일관성만 강조하면서 끊임없이 세뇌를 가한다는 것이다.

 

또 반복적인 선전을 통해 대중을 동원하는데, 이 선전 자체가 과학성을 근거로 내세우며, 예언의 형태로 제시하면서 행동의 예측 불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가 하면, 결코 오류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과 단절되어 자신만의 새로운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행위의 능력마저 파괴된다는 점을 간파한다. 즉 다양한 사람을 한 사람으로 만드는 총체적 지배하에 가둔다는 점에 주목하는데, 총체적 지배는 법적 인격을 죽이고, 개인으로서 죽을 권리를 박탈함으로써 도덕적 인격을 살해하며, 개성을 파괴함으로써 자발성을 박탈하는 단계를 거친다. 조지 오웰이 <1984>에서 빅브라더에 맞서는 방법으로 일기쓰기를 채택한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아렌트는 홀로코스트에서의 잔학성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집요하게 탐색하면서, 전체주의는 인간을 무용지물로 만들기 때문에 더 공포스럽다고 진단한다. 대중은 외부의 자극에 쉽게 무너지는데, 계급과 계급의식의 보호막마저 무너지면, 배제되었다는 사실이 분노하는 대중으로 변모시킨다고 주장한다. 대중은 수적으로는 거대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모두 원자화되어 있는 고립된 개인들이 그 중심에 서 있고, 어느 계급에도 속하지 않겠다는 심리적 기제 속에서 폭력적으로 변한다는 관찰을 서술한다. 게다가 인간의 자발성이나 예측불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 전체주의의 전지전능함은 인간의 잉여화를 추구하면서 인간의 다원성을 무자비하게 파괴한다는 점도 밝혀낸다. 히틀러가 왜 언제나 동원할 수 있는 다수의 집단보다 생각하는 소수의 개인을 주목해서 압제해야한다고 주장했는지, 아렌트는 일종의 주해서처럼 설명해주고 있다.

 

악의 평범성과 함께 아렌트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부분은 단연 공적 영역과 자유에 대한 사유일 것 같다. 그녀는 공과 사를 구별하는 핵심으로 "행위" 가능성을 들고 있는데, 다른 것들은 혼자서도 할 수있는 것이지만, 행위는 타인의 존재를 전제조건으로 하는 배태적인 특권이라고 정의한 후, 폴리스를 예로 들어 폴리스야말로 공적 영역이자 자유의 공간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공론의 영역에서는 타인과 자신을 구별하여야 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비로소 자신이 누군가가 된다는 것인데, 이렇게 하려면 먼저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밝히고 타인과 내가 공동의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있을 때 세계가 열리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다원성이야말로 자유의 토대라는 것을 인정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다원성이 내뿜는 갈등과 경쟁을 견디지 못한다면 자유는 성립되지 못하며, 다원성은 개인의 다양한 입장과 관점이 발현되는 의견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점도 강조한다.

 

아렌트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것을 인간의 능력으로 규정하면서, 내가 누구인지 답하기 위해서는 말과 행위로써 자신을 드러내는 정치적 탄생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또 진정으로 정치적인 공론의 장은 결코 폭력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폭력의 반대는 비폭력이 아니라, 권력이라고 명명한다.

 

또 정치적 의견은 다양한 이해와 관점에 따라 형성되므로 순수한 사실을 지향하는 대신 다양한 해석, 논쟁, 논의를 통해 사실적 진리를 정당화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점도 지적한다. 프랑스 혁명과 미국 혁명을 비교하면서 자유와 체제의 이행 과정을 분석한 대목이나, 미학과 정치적 판단을 비교하면서 정치를 위해 자유를 지향하는 인간들이 가져야할 것은 판단력이라고 분석한 대목도 인상깊다.

 

한 번의 독서로 아렌트의 사상을 완전히 섭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툰 시도라도 해야하는 이유를 찾는다면, 이 책이 그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사적 공간을 넘어서서 공적 영역으로 넘어가 치열하게 새로운 세계를 여는 행위가 없다면, 전체주의의 공포는 언제 어디서나 되살아날 수 있다는 그녀의 확고하고도, 일관된 주장은, 왜 이 시점에, 아렌트에  주목해야하는지 충분한 답변이 되지 않을까.

절망의 한가운데서도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시잘할 미래가 없다면, 무엇인가 시작할 수조차 없다면, 우리는 인간성을 완전히 빼앗긴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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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HOW TO READ 데리다 How To Read 시리즈
페넬로페 도이처 지음, 변성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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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이해하겠다는 소망보다는 한 장이라도 세세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면 독서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할 수 있으리란 소박한 욕심으로 시작한 까닭인지, 저자의 섬세한 설명과 역자의 명확한 번역은 오히려 예상보다 많은 부분을 배우고 익힐 수 있도록 일조했다.

 

데리다의 저작들을 소개하면서 그의 문제 의식을 설명하고 사례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전개했기에, 데리다에 관한 밀도 높은 강의를 들은 것 같기도 하다.

 

데리다는 플라톤의 저작에서 나타나는 순수성에 대한 집착을 고발하면서, 절대적 이상성, 자연성을 가진 순수성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한다고 생각한다. 순수성이 진짜 존재해서 갈망하는 것이 아니고, 순수하다고 하는 그 이데아를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를 숨기기 위해 순수성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독법을 가져야 하는데, 그 숨겨진 채 작동하는 구조와 장치를 탐색하기 위해 해체하고, 어떻게 구축되는지를 살펴봐야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약물에 의해 훼손되는 이상화된 자연적 신체는 존재하는가, 대리모 임신 등 기술에 의해 혼란이 온다고 믿어지는 모성은 정말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인지 면밀한 검토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말과 글에 대한 생각도 비판적으로 접근하는데, 플라톤은 '진정으로 아는' 환상적인 이상을 설정하고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은 앎이 아니라고 하지만, 데리다는 오히려 우리의 생각 자체가 어디서 들은 생각을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반문한다. 플라톤이 말하는 언어의 불멸성, 명확성 대신 혼돈 가능성, 애매성, 의미의 연기 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는 것.

 

데리다의 이러한 해체하기는 단일성, 통일성, 일반성 등을 표방하는 전체주의, 민족주의, 인종주의 등에도 날카로운 흠집을 내기 시작한다. 그는 관념상 한꺼번으로 추상화되고 일반화되는 그러한 말하기와 생각하기가 얼마나 폭력적인 구별짓기, 배제하기로 작동하게 되는지 설명하면서, 가령 사회가 다양한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다라는 생각은, 개인을 아주 단순한 존재로 함축시키면서, 개인들간에도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상충하는 믿음, 이해관계, 그 밖의 것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게 일순간에 사유의 영역 밖으로 몰아댄다는 통찰을 제공한다.

 

그의 독창성은 명료하게 전달되고 소통되는 언어가 가능한지 파고드는 데서 더 돋보인다. 예를 들어 개라고 읽는다고 해서, 모두에게 같은 '개'일 수 없다는 것이다. '개'라는 기호는 명확하게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종류의 연합, 치환, 결합 등에 의해서 다양한 '개'로 읽힐 수 있다는 것이다. 의미화된 개념이라는 것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무수한 관계와 네트워크 속에서 미분화되면서 발생한다는 것. 데리다의 방식으로 보고 읽으면, 각자가 바라보는 무한히 미분화되는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며, 동시에 미분화된 그 세상들이 만나고 다독여져 적분화된 세상의 외연이 존재하는 것지만, 결코 그 외연은 동일하고 고정된 것으로 굳혀질 수 없다. 시시각각으로 변화되고, 각자만의 의미가 연합되고, 결합하며 발현되는 세계의 다양성과 충만성은 가히 상상이 안될 정도다.

 

데리다는 루소의 저작을 분석하면서, 그가 위계적이고 이항적인 대립에 천착하고 있는데, 자연에 대한 결여를 대리보충하는 방식으로 관념이 만들어진다는 의견에 반대하고 오히려 자연 안에 이미 타락과 오염이 포함되어 있으며, 각 항을 뒤바꾸는 국면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에 따르면 항들이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게 아니라, 선과 악, 높음과 낮음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 즉,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것이 동시에 가능하다는 데까지 이르른다.

 

또 의사소통의 법칙으로 오해의 법칙을 채택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현대 의사소통의 수많은 효과들을 걷어내야한다고 주장한다. 의사소통이 실패하고 있다는 전제가 있어야만 기술 발달에 따라 보여지는 효과, 즉 의사소통의 즉각성, 현존성의 환상을 벗어내고, 의사소통에 있어서 비이해, 비소통 등을 직접 마주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SNS, 인터넷 등으로 끊임없이 소통하고 공동체가 확장되며 동일한 생각으로 이상을 꿈꾸고 있다는 착각이, 의사소통의 방해자라는 생각이 참신하다.

 

순수한 애도, 환대, 선물과 용서도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것들은 무조건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므로 오히려 불가능성으로부터 출발해야한다고 주장한다. 타자에 대하여 무조건적으로 개방적이지 않은 우리의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야만, 오히려 그렇다면 최대한 애도하고, 환대하며 선물하고, 용서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 탐색하면서, 현실적으로는 최선의 방책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상호성을 갖기에 애도하고, 환대하며, 선물을 주고, 용서한다고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면, 선물은 선물로, 애도는 애도로, 환대는 환대로, 용서는 용서로 간주되지 않으면서도, 제대로 작동될 수 있다는 것이다.  

 

풍부한 배경 지식 없이, 혼자서 제 수준대로 고군분투하느라 어려운 부분이 많아서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의문이 드는 대목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리다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또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 방법은 없는지,  적극적으로 찾아보도록 독려하는 마중물 같은 책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 같다.

데리다는 진보의 가치에 대해 믿지 않고, 진보를 희망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반복해서 주장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지속적인 이상들을 위해 무엇이 또는 누가 그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또한 생각해야만 한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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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0
엔도 슈사쿠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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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을 알려주는  방식 중에서 답을 직접 말해주는 방식과 답을 알아차리도록 인도하는 방식 중 어느 것이 더 깊은 여운과 깨달음을 줄까. 답이 신이라면, 답을 말해주는 종교와 답으로 안내하는 삶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엔도 슈사쿠는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답하는 방식으로 <깊은 강>을 집필한 것같은 생각이 든다.

 

신은 존재할까, 신의 존재가 인간에게 필요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마지막 장까지 읽고 나서야 그가 왜 자신이 죽거든 <침묵>과 <깊은 강>을 함께 묻어달라고 유언했는지, 감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설은 인도를 찾은 사연 많은 이들의 이야기가 주가 된다. 아내를 잃은 후 다시 태어나겠다는 아내의 유언을 기억하고 마뜩지 않으면서도 떠나온 이소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주목받기를 원하면서 젊은 날 오쓰를 유혹했지만, 이제는 다른 남자와의 결혼 후 이혼녀가 된 미쓰코, 늑막 유착에 폐렴까지 앓다가 죽음의 사선을 넘으면서 자신 대신 코뿔소새가 죽었다고 믿는 동화작가 누마다, 미얀마의 전장에서 살기 위해 동료의 살을 먹고 죄책감에 시달리다 마지막 위안을 받은 후 죽은 쓰카다의 동료 기구치, 어렸을 때부터 카톨릭 집안에서 자라 자연스럽게 신앙을 가졌지만,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구원받는다는 교리에 의문을 품고 파문당한 후 겐지스강에서 힌두교인들을 위한 장례식에 참여하다가 화난 민중들에 의해 죽어가는 오쓰. 여기에 다른 이들이 찾지 않는 인도의, 특히 죽은 자들의 생의 마지막 도착지 겐지스의 모습을 사진을 남겨 이목을 끌려는 철부지 신혼부부가 대비된다.

 

오쓰를 제외한 네 명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작가의 대변인 격인 주인공은 미쓰코라고 할 수 있다. 미쓰코는 대학시절 바보같다 싶을 정도로 신앙을 지키는 오쓰를 유혹해 불장난같은 사랑에 빠져들게 한 후 이별을 선언함으로써, 그를 타락시키고, 신에게서-삐쩍마른 십자가의 젊은 남자, 양파-로부터 그를 빼앗았다고 자부한다. 신 따위에 매달리는 고루한 그를 아무렇지 않게 내친 후에는 영민하게 적당히 계산적이고 전략적인 결혼에 성공한다. 프랑스로 떠난 신혼여행에서 그녀는 남편과 각자 여행을 즐기자고 제안하고, 평범하고 무료한 일상 속에서 권태와 위선적인 결혼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남편을 독살하려한 <테레즈 데케루>를 떠올리며 신부가 되려고 유학 온 오쓰를 만나러 간다. 자신이 신을 버렸지만, 신은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묘한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교리에 완전히 수긍하지 못하고 있는 어정쩡한 그를 만난 후 미쓰코는 신이 그를 다시 되찾아갔다고 느낀다.  이혼 후 인도에서 만난 오쓰는, 더러운 사창가 여자들의 장례까지도 도와줄 정도로 순전한 마음으로, 약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신부가 되지 못했지만, 오쓰는, 예수님이었다면 외롭고 처연한 이들의 처지를 도와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자신을 투신해서 그들을 돕다가 사소한 오해에 휘말려 죽음을 맞이한다.

 

인도 현지 무속인에게 속아 환생했다는 아내를 찾아가지만 도리어 실망하고 돌아오는 이소베, 전쟁의 참혹한 실상을 말하면서 겪은 아픔을 함께 나누고 싶어도 도무지 소통할 수 없는, 변해버린 세상에 마주선 기구치,  인도 현지에서 보답이라도 하듯 새를 사서 놓아주는 누마다의 모습은,  각자의 삶 속으로 스며드는 신의 존재 이유에 대한 답변처럼 그려진다. 각자에게 다른 이유로 필요한 신이지만, 겐지스에서 목도한 수많은 죽음 앞에 이르자, 그 너머의 시작을 위해서라도 신이 필요할 수 밖에 없다는 데 다다른다.

 

신이 아니라면 도무지 위로할 수 없고, 새롭게 시작할 수 없도록 하는 삶과 죽음의 교차로에서, 작가는 희미해져가는 영성을 되살리려 마지막 혼을 불태우는 것만 같다. 신은 존재라기보다는 손길이라고 표현하는 오쓰의 고백은, 박제화되어 저 멀리 있는 신이 아니라, 순간순간 함께 하는 따스한 그 무언가라는 작가의 생각을 대변한다. 명료하게 선언하고 당당하게 부르짖는 종교심에서 탈피해, 침묵하며 삶의 중심으로 들어가 묵묵히 신의 손길 아래 그의 도구가 되고, 그의 부활이자 환생이 되는 신앙이어야 하는 이유.  죽음의 끝에서 어쩌면 작가가 찾은 마지막 정답이었기에, 그는 잠잠한 기쁨으로 신 앞에 가져갈 최후의 선물로 이 작품을 택했으리라.  

다양한 종교가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동일한 지점에 모이고 통하는 다양한 길이다. 똑같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한, 우리가 제각기 상이한 길을 더듬어 간들 상관없지 않은가....중략, 그렇다면 자넨 어째서 우리들 세계에 머물러 있나? 선배한테 이렇게 타박을 받은 적도 있다. 그토록 유럽이 싫거든 냉큼 교회에서 나가면 되잖은가. 우리가 지키는 건 기독교 세계이며 기독교 교회이니까. 나갈 수 없습니다, 하고 오쓰는 울먹이듯 말했다. 저는 예수에게 붙잡혀 있습니다.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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