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 하버마스 : 광기의 시대, 소통의 이성 지식인마을 32
하상복 지음 / 김영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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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서론에서 관통하는 주제 의식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점이다. 근대의 주요 원리라고 할 수 있는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푸코와 하버마스의 상반된 견지를 중심으로 주요 내용이 전개될 것이라는 점을 미리 알려, 독자가 독서의 필드를 짐작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저자에 따르면 푸코가 이성과 합리성이 일방주의적인 폭력이라고 이해한 반면, 하버마스는 그것들을 미래를 추동할 긍정적인 요소로 판단한다. 


외과 의사 집안에서 태어난 푸코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폴'로 정해졌지만, 자유로운 어머니에 의해 폴-미셸로 불리웠고, 훗날 스스로 아버지에 대한 반발로 '폴'을 자신의 이름에서 삭제하는 등 반항의 인생을 구가한다. 일상의 외견에서 보여지듯 그는 정신병으로 규격화된 광기, 표준화된 성, 과학의 이름으로 포획된 해부학과 감시에 대한 남다른 통찰을 통해, 이성과 합리성이 곧 세밀한 권력 장치가 되었고, 결국은 인간을 억압하는 폭력의 도구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푸코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현대까지의 학문의 역사는 연속, 계승, 진보가 아니며, 불연속, 단절, 반복이라고 규정하면서 '에피스테메'라는 개념을 활용한다. 에피스테메는 다양한 지식에 구조적 통일성을 부여하는 관념 체계, 즉 학문을 관통하는 궁극적인 원리 또는 하부 구조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각 시기를 규정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15-16세기는 유사성의 원리를 지향했고, 17-18세기는 표상, 즉, 동일성과 차이의 원리에 의해 분류하고 체계를 만드는 일람표 식의 학문이 발달하였으며, 표상을 통해 질서가 세워지면서 사물과 존재 사이의 간극이 생기는 재현이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운동, 흐름, 변화에 주목하는 역사의 에피스테메가 등장하며 이것은 결국 언어, 생물, 경제학적 모델에 입각해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인간 과학을 지향하는 데 이르게 된다. 이러한 논의가 주는 함의는 결국 '과학', '실증'이 보편적인 학문이 아니라 19세기 에피스테메의 소산일 뿐이며 이러한 에피스테메가 변형되면 사라지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에피스테메의 변화를 고려하면,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진리와 지식이 실재와 일치될 수 없는데도 진리와 지식이 일치하고 있다는 중대한 착각을 할 수 있다는 데 착안한다. 착각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푸코는, 언어 행위와 지식을 인간의 주체적 의지의 산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푸코는 말이나 글로 표현되는 진술, 즉 언표는 사회적 공간에서 실천되면서 기능이 발휘되는데, 존재의 출현과 제한의 가능성을 규정한다고 단언한다. 예를 들어 광인의 개념은 정신병자로서의 광인이 존재한 것이 아니고 정신병자가 곧 광인이라는 언어 행위가 사회적으로 실천되면서 만들어졌고, 이 언어 행위를 하는 행위자인, 특정한 사회적 위치를 가진 법률가나 의사, 즉 객관적인 사회적인 위치를 가진 이들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점을 포착한다. 또한 이러한 언표는 광인과 구분되는 이성을 가진 정상인을 상정하게 되므로 인접한 언표들과의 관계 속에서는 존재하는 특징을 갖게 되고, 일종의 물질성까지 가지면서 하나의 사건이 된다는 점도 덧붙인다. 어제까지 즐겁게(?) 살던 정상인이었던 광인이 하루 아침에 정신병자로 분류되면서 비정상으로 전락하는 것. 


종합하면 근대의 에피스테메를 간과하면서 현재의 학문적 시각이 보편타당하다고 착각하면서, 과학적 지식을 갖춘 소위 객관적인 전문가들이 곧 진리를 알고 있다고 믿다보니, 그들은 존재를 규정하고 배제할 권한을 갖게 되었고 이성으로부터 배태된 지식이 실제로는 진리와 간극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곧바로 미세하지만 대담한 권력의 기반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권력은, 지식과 담론을 창출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 특정한 도덕률을 주조하여 일정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며  피지배자인 객체 자체가 내면화를 통해 자기 통제를 하는 예속화를 따르게 된다는 점이다. 더구나 권력은 병원, 학교, 교소도 등 사회의 곳곳에서 다양한 장치를 통해 분산된 형태로 작동하는 일종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새로운 전문가 권력은 기존의 권력과 다르게, 기꺼이 피지배자가 따르고 확산시키며 그 토대를 굳건하게 구축해 나가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고 본다. 


한편 하버마스는 구개 파열을 가진 채로 출생해 수 차례의 수술을 겪었고 다른 사람과의 의사 소통 과정에서 거부나 배척을 당하면서 자연스럽게 의사소통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서구 사회의 이성이 폭력적이고 지배적인 속성만 가진 것이 아니고 민주주의의 잠재성을 보여주는 근간이라고 생각한다. 


하버마스는 어떤 행동이 단순히 물리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특정한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둘 이상의 존재가 있어야 하며 의미 전달을 위한 의사소통 과정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부르주아 공론장의 분석을 통해서, 커피 하우스 등을 문예적 토론 뿐만 아니라 기득권을 위협하는 이념과 가치가 형성되는 공간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과시적인 군주 권력의 정당성은 전통이나 권위가 아니라, 이해 관계를 공유하는 복수의 사람들이 모여 특정 사안 등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토론하는 여론에 의하여 정당성을 획득했다고 보았다. 


또 물질적, 정신적 조건의 동등성을 갖춘 교양인들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토론이 자신들이 마주한 사적인 영역의 문제들을 사적인 문제로만 축소하지 않고 공개 토론이라는 '공증'을 거쳐 여론을 주조하면서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었지만, 국가의 역할이 확대되고 국가의 개입이 만연해지면서 부르주아 공론장의 해체 위기가 촉진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점차 문화가 감각적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상업주의에 편승하면서 가벼운 문화가 만들어지는 사이 정치, 사회, 문화에 대한 성찰이나 토론은 증발하고 있고, 공론장의 주요 역할을 담당해야할 정당이나 의회가 본래의 성격을 상실하고 있는 데서 문제가 더 증폭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푸코는 근대인들은 특정한 형태의 도덕규범을 내면화하면서 스스로를 통제하는 종속적인 주체가 되었는데, 이를 해결할 보편적인 해결책은 없다고 단언한다.  다만 외적인 가치나 원리 대신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자신만의 도덕 규범을 만들어가는 윤리적 주체가 되어 자기 영혼에 침잠해 내적인 것에 집중해야 하며, 정념, 욕망, 환상 등에 노출되어 외적인 것만 따라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참된 자기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말하는 과정을 통해 자기 성찰을 해나가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 


하버마스는 사회적 영역은 체계와 생활 세계로 구분되된다고 주장한다. 체계란 본질적으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 기능, 즉 행정과 경제를 담당하는 것이고, 생활 세계는 구성원들의 사회화, 통합, 문화 전승 등을 담당하며 교육, 문화, 종교적인 기능 등을 담당한다고 정의한다. 


체계는 사회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물질을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이를 위한 행위는 인간 도 하나의 자원으로 취급할 정도로 도구적이고 기능적일 수 있다고 본다. 반면 생활 세계의 행위는 대상이 아니라 주체의 차원으로 정체성, 내면화, 소속성 등과 관계된다고 본다. 


체계와 생활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의 근본적인 원리가 다르므로 사용되는 언어의 성격도 다른데, 체계에서의 언어가 전략적인 반면, 생활 세계에서의 언어는 의미의 공유 및 주체성의 확인을 위하여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현실 속에서 참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주체들끼리 개방적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전략적 행위에 의한 합의가 아니라 실제로 타당성을 갖는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생활 세계의 정치화로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생활 세계의 정치화를 통해 환경, 평화, 연대 등 일상의 가치들을 지향하는 새로운 사회 운동이 표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짧은 책 안 담겨진 두 거장의 주장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은 무리일수도 있지만, '이성'을 바라보는 관점을 서로 비교해볼 수 있어서 흥미롭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보여주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푸코의 주장과 하버마스의 의견이 교묘하게 교차되고 있다는 사실을 각성한 후 더더욱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느껴진다. 


다만, 푸코의 주장대로라면 자기 성찰을 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하버마스의 주장대로라면 생활 체계의 정치화를 가능하게 할, 소위 예전의 부르주아 같은 물질적, 정신적 동등성을 갖춘 계층만 의사소통의 권리(?)를 획득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남는다. 물론 의문의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독자의 몫일 수 밖에 없겠지만. 


푸코는 이성이 근대의 유일한 사회적 원리가 되어 합리적이지 않은 다른 모든 원리는 부정적이고 무용한 것들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이성을 상당히 비판적으로 바라봤다..하버마스는 근대의 이성은 푸코의 분석에 부합하는 측면도 있지만 동시에 인간 삶의 진보와 해방을 이끈 힘이라는 측면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대의 이성은 근대 문주주의의 동력이었다는 것이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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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 - 제8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39
이꽃님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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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편화된 세대들이 맞딱드린 불행은 서로를 이해할 단서나 기회가 줄고 있는데서 출발하지 않을까. 점점 좁혀지는 기회의 틈을 그나마 넓히는 것이 문학의 사명일텐데,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충실하다. 


시간 여행이나 서신 교환의 진부한 장치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묘미는 부모와 자녀가 동일한 청소년으로서 만나는 접점을 따뜻하게 조명한데다, 편지의 시작과 주고 받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주인공들의 동일한 목표 의식 때문에 스릴러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양면적인 스토리에서 기인한다. 


마침내 알게 된 부모님의 비밀을 통해 그 사랑의 깊이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청소년에게는 부모님의 사랑을 깨닫는 계기로, 부모님과 같은 어른 세대는 청소년이 겪는 외로움과 방황의 그 내밀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제목이 주는 묵직함에 가슴이 아련해진다. 

세상에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특별한 일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기 때문일 거야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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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의 배신 - 무병장수의 꿈은 어떻게 우리의 발등을 찍는가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조영 옮김 / 부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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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가능성은 무한한 꿈과 희망의 근거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현실에 잇댄 진실의 좌표를 마주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는 죽비로 치듯 인간의 한계성에 대해 주기적으로 말할 필요성이 있는데, 저자는 과감하게도 악역을 자처한다. 


건강의 다양한 결정 요인을 차치하더라도, 스스로 건강을 디자인하고, 관리하며 나아가 무병장수까지도 이루어내리라는 상상은 생각만 해도 결연한 의지에 불을 당긴다. 건강은 어느 순간부터 개인을 지배하는 세밀한 권력이 되었다. 건강을 향한 욕망은 다른 욕망과 다르게 선하게 포장되기도 한다. 더구나 건강이라는 목표가 내포한 순결성 때문에 건강을 위한-그것이 정말 건강을 위한 것인지 불분명할 때도 있다-수단은 놀랍게도 무조건 정당화되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건강이, 구체적으로 무병장수가 가능한 꿈인가, 저자는 꼼꼼한 자료와 근거를 제시하면서 건강 우선주의가 구가하는 권력을 해체하고 건강에 집착함으로써 무너져가는 우리의 일상과 인생, 사회의 단면을 추적한다. 


저자의 날카로운 시선은 목차에 고스란히 표현되는데, 의료화된 삶, 의례가 된 의료 행위, 과학이라는 허상, 운동에 미친 사람들, 마음 챙김 광풍, 도덕적 결함으로서의 질병, 갈등과 조화의 장이 된 몸, 세포들의 반란, 아주 작은 마음들, 성공적인 노화, 자아의 발명과 자아를 넘어선 진짜 세상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화학, 물리학, 생물학을 전공한데다가 예산 정책 분석, 건강권 NGO 활동  교수와 작가의 이력을 거치면서 학문과 현실, 이론과 사회를 넘나드는 통합적인 시각을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다. 


의료화의 개념은 어느 정도 확산되었다고 해도, 병원의 진료와 치료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의료 의례에 대한 시각은 신선했다. 뷔페식 건강 검사나 프라이버시 규칙을 어기는 사례, 기계화된 몸을 지배하는 의료 권력, 특히 여성이나 사회적 소수자가 겪는 환자의 일방적 복종 등은 생각해볼 문제다. 


증거기반 의학이나 실험 의학에 의해 포착되지 않는 증상을 설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환자의 내러티브가 과연 충분히 반영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제기와 함께, 통계가 제시하는 평균의 함정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성찰을 통해 의학이 정말 과학인가에 대해 질문한다. 


또 몸을 통제하고 과시함으로써 계층을 드러낸다거나 마음챙김의 광풍과 더불어 마음을 물질처럼 다룰 수 있다는 생각의 난점, 건강이 중요시되면서 질병이 개인의 책무를 등한시한 것처럼 여겨지는 문제점 등은 익숙한 관점이지만, 세포와 유기체에 대한 이해 방식은 전혀 새로운 내용이었다.


세포들이 유기체 전체의 이득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 있어 순전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방식이 유기체의 생명 현상이라면, 세포는 유기체의 부분이 아니고 일종의 동맹체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 이러한 관점을 적용하면 몸은 하나의 목표를 위해 서로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기계가 아니고, 각자 연합하며 반목하는 장이 되는 것. 실제 저자는 전공의 전문성을 살려 암의 전이에 지대한 역할을 하는 면역 세포, 즉 대식 세포의 반란을 생생하게 소개한다. 


암과 싸우는 면역 체계의 강화가 아이러니하게도 대식세포가 암 세포와 공모하도록 돕는다는 연구를 소개하는데, 물리학의 관점을 적용해 원자가 자유롭게 부유하는 것이 마치 어떤 의지를 가진 것처럼 보이듯이 세포 역시 원자처럼 어느 순간 돌변할 수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대식세포는 면역을 담당하다가 어느 순간 유기체를 파괴하하기도 한다는 것. 우주까지 확장된 물리학적 사고가 왜 몸 안에는 투영될 수 없다는 것인가.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몸을 이해하는 방식은 전면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저자는 건강한 노화가 정말 가능한가에 대하여도 진지하게 질문한다.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어떻게 운동해야 하는지 지침이 끊임없이 수정되고 있는데, 정말 해답을 알고 있는 것일까. 또 성공적인 노화를 위해 비즈니스만 횡행하는 현실을  보여주면서 자아의 발명 내지는 발견을 통해 21세기 새로운 숭배의 대상으로 떠오른 자아에 대한 통렬한 비판도 주저하지 않는다. 자신을 충족시키고, 자신을 위해 시간을 내고 자신을 축하하라는 신흥 종교적인 자아에 대한 믿음은, 일종의 상품으로 변주되면서 자아라는 감옥에 갇힌 현대인의 민낯을 드러낸다.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고, 자기 소멸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해져 자아 이외에도 생명력이 넘치는 세상을 간과하는  불행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드높인다. 지구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주어진 시간을 살다 조용히 떠나가는 겸허함이 필요하는 주장에 공감하게 된다. 


가히 건강 파시즘이라고 불러도 이상할 것 없는 건강 열풍 속에서 건강의 개념과 철학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산다는 것의 의미를 재구성해볼 수 있도록 이끄는 좋은 책.

우리가 여기서 배울 교훈이 있다면, 그건 바로 겸손일 것이다. 우리가 과시하는 지성과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다른 것들의 운명에 관여하는 유일한 존재가 아니다. 당신은 열심히 운동하며 의학적으로 유행하는 식단을 꾸릴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난 벌에게 쏘여 죽을 수 있다. 당신은 건강한 사람으로서 귀감이 된다는 의미로 날씬할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당신 몸 안의 대식세포는 초기 종양과 동맹을 맺기로 결정할지도 모른다...생략..우리가-개인적 습관을 통해, 그리고 아마도 궁극적으로는 면역세포들이 보다 책임감 있게 행동하도록 만들어줄 의학 기술을 통해-이러한 갈등으로 생기는 결과에 영향을 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통제할 수 없다. 또한 우리는 그것이 가져다줄 불가피한 결과, 바로 죽음을 미리 막을 수도 없다.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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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이긴다 - 천국과 지옥, 그리고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인간의 운명에 관하여
랍 벨 지음, 양혜원 옮김 / 포이에마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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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태 신앙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믿음이 약한 나는, 종종 엉뚱한 상상을 했었다. 천국에 가면 우리의 모든 눈물을 닦아주신다고 했는데, 막상 내가 천국에 가보니, 예수님을 믿지 않아 천국에 오지 못한 이들을 발견한다면 내 눈물을 닦아주신다고 해도 다시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는 것 아닐까. 진작 전도를 하지 못해 어떤 이를 천국 문 앞에서 돌아서도록 한 죄책감을 안고 있더라도 나는 천국에 왔으니 눈물만 닦이면 그만인가. 혹 천국에 온 기쁨에 들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잊어버려 눈물 흘릴 일이 더 이상 없어진다는 것일까.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기억하실뿐더러, 심지어는 베드로의 잘못을 아시면서도 묻지 않고 새로운 사명을 주신 것을 보면, 부활한다고 해도 우리의 모든 기억은 그대로일텐데. 


신앙이 깊어질 수록 주님의 세계는 더더욱 미궁에 빠지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그렇지만, 도스토예프스키가 그의 문학을 통해서 구현해낸 것처럼, 궁극의 그 날 우리의 잘못을 깨닫고 모든 것을 체념할 때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고 용서를 넘어서서 새로운 은혜로 휘감아지면, 너무나 기뻐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내 죄과를 내 입으로 떠벌리고 다니지 않을까, 그런 확신이 들기도 한다. 


시가 주는 상징과 함축성은 많은 것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가장 많은 것을 말하고, 세미하게 울리는 것 같지만, 한 순간 온 몸의 지축을 뒤흔들어댄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시어의 형태로,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담담히, 그러나 가장 열정적으로 담아내는 데 있다. 


가장 인상깊은 장면은, 복음이 오히려 비수가 되어 사람들의 가슴을 찌르는 장례식 삽화였다. 어느 고등학생이 안타깝게도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장례식에 참석했던 어떤 이가 그리스도인이었는지 물었고, 무신론자라고 하니, 그렇다면,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단언한 부분. 저자는 직설법으로 묻는다. 예수님이 세상에 전하는 메시지, 복음의 정수가 과연 매몰차게 "희망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인지. 


그러면서 가장 집요한 질문을 속사포처럼 쏟아낸다. 회심의 기도를 드려야만 하는 건가, 예수님은 단지 다른 어딘가로 가는 방법만을 제시하는, 그러니까 천국이냐 지옥이냐를 가르는 갈림길인가. 질문은 이어지고 이어져 본질적인 물음으로 나아간다. 어떤 예수님인가. 주기도문을 외우고 찬송가를 부르며 자녀를 성폭행한 아버지가 믿는 예수님인가, 특정인들을 배척하고 외면하면서 미워하는 행동을 칭찬하시리라 기대하는 예수님인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은 우리의 노력이나 수고, 선한 행실로 구원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데,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고백하고 믿는 것은 모두 동사이니 행하는 것인데, 행함의 결과로 얻은 구원이 어떻게 기쁜 소식이라는 것인가. 


질문은 다시 놀라운 답가같은 시어로 제시된다. 한 마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생은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는 것, 즉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이 땅에서도 함께 이루어져 하늘과 땅이 같은 공간이 되는 것, 즉 하나님의 뜻에 따라 통치되고 창조되는 하늘의 영역, 하나님의 의도대로 모든 곳이 존재하는 그 곳과 이 땅이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므로 정직한 사업, 구원하는 예술, 고결한 법, 지속가능한 삶..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 함께 해야하는 이 땅의 신성한 일들이라고 설명한다. 즉 구원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으로 참여하고 거듭남으로써 하나님과 함께 하기에 빼앗기지 않는 근원의 기쁨을 누리는 데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사는 방법을 가르치셨고, 자비, 용서, 정직, 용기, 진실, 책임 등이 우리 안에서 자라나 우리의 삶을 점령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나되는, 오는 세대의 삶에 참여하기를 원하시는다는 거다. 


특히 예수님이 쓰신 이 세대와 오는 세대에서 사용된 '아이온'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시작과 끝이 있는 기간이면서 동시에 시간을 초월하는 경험의 강렬함을 의미할 때도 사용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영생은 영원히 그냥 사는 것이 아니고 영원하면서, 강렬하고, 실제적이며,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것으로써, 영생은 죽으면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죽음도 견디고 살아남을 수 있는 생명을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는 것이라고 소개한다. 


지옥을 소위 믿음 '밖에 있는 사람들'이 가는 것으로 믿은 사람들에게, 놀랍게도 예수님은 바른 것을 믿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초점을 맞추시는 대신 분노와 탐욕, 무관심으로 물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라는 소명을 받았으나 그 정체성을 잃어버린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지옥을 말씀하셨다는 데 주목한다. 바꾸어말하면 종교성으로 치장하면서 안위하고 있지만, 정작 하나님 없는 삶으로 살아가기에 가짜들에게 매여 있는 것 그 자체가 지옥인 셈이다. 


또 결국에는 모든 민족을 다시 회복시키고, 치유하시며 모든 인간의 올곧은 변화를 위하여 사탄까지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소개하면서,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들에게서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소위 염소들이 가는 장소를 지칭하는 콜라조의 의미를 설명한다. 콜라조는 식물이 잘 자라도록 가지를 치고 다듬는다는 의미라는 것. 콜라조의 본질이자 목적도 결국 창조된 본성을 회복하는 데 있다. 


신학적 교리가 주는 힘은 대단해서 때로는 보잘 것 없는 믿음도 한껏 고양시킨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는 도식화된 교리 안에서, 가짜 믿음으로 가까스로 지켜내는 종교성의 진피는 날마다 더 두터워지는 것 같다. 


진정성이 묻어나는 시어를 통해서 저자가 제시하는 성경 말씀을 쫓다보면, 사랑의 본질이신 하나님, 그분이 결국 이기신다는 것을 더욱 붙들게 된다. 구획하고 분리하고 밀쳐내고 내쫓아내는 것이 우리가 선택하고 지향하는 자유라 할지라도, 모든 이들이 화평을 이루고 용서하고 위로하고 보듬도록 하는 그 사랑이, 결국, 이긴다. 그러므로 생명의 '복음'이다. 

사랑은 그렇게 일어난다. 강제하거나 조작하거나 강압할 수 없다. 사랑은 언제나 상대방이 결정할 여지를 남겨둔다. 하나님은 그래. 너희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결국은 사랑이 이기기 때문이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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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간 물리학자 - 명화에서 찾은 물리학의 발견 미술관에 간 지식인
서민아 지음 / 어바웃어북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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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는 것은 사실 '이해한다'를 포괄해야 '봄'의 진정한 목적으로 성취할 수 있을텐데, 돌아보면 '이해함'의 방식이 줄곧 편협하지 않았나 싶다. 기껏해야 시대로 분류하거나, 화가와 특징적 화풍을 단편적으로 연결하여 가까스로 꿰어맞추다보니, 그림을 '본다'는 것은 때로는 노동에 가까운 고역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물리학'의 프리즘을 통해 그림을 보는 방식을 하나 배우고 나니, 그림 보기가 여간 재미있는 게 아니다. 몇 가지 물리학 책을 읽은 기억도 되살아나 활자로만 읽었을 때는 이해되지 않던 개념이 명화 속에서 구현되니 그 뜻도 더 간명하게 정리된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누가 뭐래도 저자의 독특한 이력이지 않을까 싶다. 물리학 전공자이면서 화가이기도 한 저자의 전문성은 이 책의 가치를 더욱 두텁게 한다. 


첫 장부터 흥미진진하다. 흑점의 감소와 기후변화의 상관성을 먼저 읽고 그로 인한 폭설, 혹한의 풍광이 담겨진 그림이 소개되니, 화가가 살던 시대로 걸어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파동과 인상파,  빛의 산란과 오키프, 퀀텀닷의 원리와 스테인드 글라스, 원자의 진동과 댄스의 역동성, 빛의 명암과 원근법, 프레넬 효과와 빛의 특성에 따른 모네의 연작, 망막의 인식과 착시 효과를 활용한 쇠라, 세포와 칸딘스키, 보색 효과와 고흐, 옵아트의 과학, 무질서와 잭슨 폴록, 상대성 이론과 달리, 메타 물질과 마그리트, 양자역학과 피카소, 테라헤르츠와 그림의 생애 등 각각의 챕터가 흥미롭다. 


저자가 주장한대로 화가 역시 '보고 인식하는'는 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쫓는 과학자의 또 다른 이름일런지 모르겠다. 

물리학자의 시각에서 명화와 화가의 삶을 재조명할 것이다. 물리학과 미술의 상호작용으로 잉태된 작품들을 살펴보고, 현대 과학 기술을 이용한 다양한 미술작품 분석 기법에 관해서도 이야기해보려 한다. 마음을 열고, ‘물리학‘이라는 새로운 눈으로 다시금 그림을 감상한다면 그동안 느낀 것과 전혀 다른 새로운 감동을 느끌 수 있을 것이다. -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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