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이긴다 - 천국과 지옥, 그리고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인간의 운명에 관하여
랍 벨 지음, 양혜원 옮김 / 포이에마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모태 신앙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믿음이 약한 나는, 종종 엉뚱한 상상을 했었다. 천국에 가면 우리의 모든 눈물을 닦아주신다고 했는데, 막상 내가 천국에 가보니, 예수님을 믿지 않아 천국에 오지 못한 이들을 발견한다면 내 눈물을 닦아주신다고 해도 다시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는 것 아닐까. 진작 전도를 하지 못해 어떤 이를 천국 문 앞에서 돌아서도록 한 죄책감을 안고 있더라도 나는 천국에 왔으니 눈물만 닦이면 그만인가. 혹 천국에 온 기쁨에 들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잊어버려 눈물 흘릴 일이 더 이상 없어진다는 것일까.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기억하실뿐더러, 심지어는 베드로의 잘못을 아시면서도 묻지 않고 새로운 사명을 주신 것을 보면, 부활한다고 해도 우리의 모든 기억은 그대로일텐데. 


신앙이 깊어질 수록 주님의 세계는 더더욱 미궁에 빠지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그렇지만, 도스토예프스키가 그의 문학을 통해서 구현해낸 것처럼, 궁극의 그 날 우리의 잘못을 깨닫고 모든 것을 체념할 때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고 용서를 넘어서서 새로운 은혜로 휘감아지면, 너무나 기뻐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내 죄과를 내 입으로 떠벌리고 다니지 않을까, 그런 확신이 들기도 한다. 


시가 주는 상징과 함축성은 많은 것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가장 많은 것을 말하고, 세미하게 울리는 것 같지만, 한 순간 온 몸의 지축을 뒤흔들어댄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시어의 형태로,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담담히, 그러나 가장 열정적으로 담아내는 데 있다. 


가장 인상깊은 장면은, 복음이 오히려 비수가 되어 사람들의 가슴을 찌르는 장례식 삽화였다. 어느 고등학생이 안타깝게도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장례식에 참석했던 어떤 이가 그리스도인이었는지 물었고, 무신론자라고 하니, 그렇다면,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단언한 부분. 저자는 직설법으로 묻는다. 예수님이 세상에 전하는 메시지, 복음의 정수가 과연 매몰차게 "희망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인지. 


그러면서 가장 집요한 질문을 속사포처럼 쏟아낸다. 회심의 기도를 드려야만 하는 건가, 예수님은 단지 다른 어딘가로 가는 방법만을 제시하는, 그러니까 천국이냐 지옥이냐를 가르는 갈림길인가. 질문은 이어지고 이어져 본질적인 물음으로 나아간다. 어떤 예수님인가. 주기도문을 외우고 찬송가를 부르며 자녀를 성폭행한 아버지가 믿는 예수님인가, 특정인들을 배척하고 외면하면서 미워하는 행동을 칭찬하시리라 기대하는 예수님인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은 우리의 노력이나 수고, 선한 행실로 구원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데,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고백하고 믿는 것은 모두 동사이니 행하는 것인데, 행함의 결과로 얻은 구원이 어떻게 기쁜 소식이라는 것인가. 


질문은 다시 놀라운 답가같은 시어로 제시된다. 한 마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생은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는 것, 즉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이 땅에서도 함께 이루어져 하늘과 땅이 같은 공간이 되는 것, 즉 하나님의 뜻에 따라 통치되고 창조되는 하늘의 영역, 하나님의 의도대로 모든 곳이 존재하는 그 곳과 이 땅이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므로 정직한 사업, 구원하는 예술, 고결한 법, 지속가능한 삶..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 함께 해야하는 이 땅의 신성한 일들이라고 설명한다. 즉 구원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으로 참여하고 거듭남으로써 하나님과 함께 하기에 빼앗기지 않는 근원의 기쁨을 누리는 데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사는 방법을 가르치셨고, 자비, 용서, 정직, 용기, 진실, 책임 등이 우리 안에서 자라나 우리의 삶을 점령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나되는, 오는 세대의 삶에 참여하기를 원하시는다는 거다. 


특히 예수님이 쓰신 이 세대와 오는 세대에서 사용된 '아이온'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시작과 끝이 있는 기간이면서 동시에 시간을 초월하는 경험의 강렬함을 의미할 때도 사용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영생은 영원히 그냥 사는 것이 아니고 영원하면서, 강렬하고, 실제적이며,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것으로써, 영생은 죽으면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죽음도 견디고 살아남을 수 있는 생명을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는 것이라고 소개한다. 


지옥을 소위 믿음 '밖에 있는 사람들'이 가는 것으로 믿은 사람들에게, 놀랍게도 예수님은 바른 것을 믿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초점을 맞추시는 대신 분노와 탐욕, 무관심으로 물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라는 소명을 받았으나 그 정체성을 잃어버린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지옥을 말씀하셨다는 데 주목한다. 바꾸어말하면 종교성으로 치장하면서 안위하고 있지만, 정작 하나님 없는 삶으로 살아가기에 가짜들에게 매여 있는 것 그 자체가 지옥인 셈이다. 


또 결국에는 모든 민족을 다시 회복시키고, 치유하시며 모든 인간의 올곧은 변화를 위하여 사탄까지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소개하면서,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들에게서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소위 염소들이 가는 장소를 지칭하는 콜라조의 의미를 설명한다. 콜라조는 식물이 잘 자라도록 가지를 치고 다듬는다는 의미라는 것. 콜라조의 본질이자 목적도 결국 창조된 본성을 회복하는 데 있다. 


신학적 교리가 주는 힘은 대단해서 때로는 보잘 것 없는 믿음도 한껏 고양시킨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는 도식화된 교리 안에서, 가짜 믿음으로 가까스로 지켜내는 종교성의 진피는 날마다 더 두터워지는 것 같다. 


진정성이 묻어나는 시어를 통해서 저자가 제시하는 성경 말씀을 쫓다보면, 사랑의 본질이신 하나님, 그분이 결국 이기신다는 것을 더욱 붙들게 된다. 구획하고 분리하고 밀쳐내고 내쫓아내는 것이 우리가 선택하고 지향하는 자유라 할지라도, 모든 이들이 화평을 이루고 용서하고 위로하고 보듬도록 하는 그 사랑이, 결국, 이긴다. 그러므로 생명의 '복음'이다. 

사랑은 그렇게 일어난다. 강제하거나 조작하거나 강압할 수 없다. 사랑은 언제나 상대방이 결정할 여지를 남겨둔다. 하나님은 그래. 너희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결국은 사랑이 이기기 때문이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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