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다 (반양장) - 노무현 자서전
노무현 지음, 유시민 정리,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돌베개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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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대통령이 말하는 운명이란 무엇일까. 끝내 그리움으로 남는 길을 선택한 그 결정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기엔, 1년여란 시간은 처연하고, 좀스럽다. 시간이 덮을 수 없는 괴로움은 빚진 마음 말고는 그 어떤 것도 표현할 길이 없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마음을 훌훌 털고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이들의 마음을, 운명이란 짧은 답변으로 다스리라는 것은, 어쩌면 남은 이들에게 가장 가혹한 징벌일런지도 모른다.  

   그의 외로움과 정의로움에 대한 처절한 도전과 눈물과 한스러움을 진작 눈여겨보지 못한 죄과는, 그의 극단적인 결정을 마주하고서야 지독스럽게 밑바닥까지 드러날 수 있었다. 거기 탐욕이 있었고, 자만이 있었으며, 독선이 자리 잡았고, 교조적인 맹목성이 꽃피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덮고 스스로 기만인 줄도 모른 채, 정의를 노래했고, 진보를 외쳤으며, 정진을 꺼내들었고, 습관처럼 앞으로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를 떠민 것은 '우리'였다. 
 

   그는 자신으로 인해 진보 전체가 욕먹고, 부정되는 현실을 마주하기 싫어 극단적인 선택을 감행했을지 몰라도, 진보가 가져야할 진짜 얼굴과 뜨거운 가슴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반성케 한 것은, 결국 진보에게서 스스로를 분리하고자 했던 그의 결정이었다.

   방법이야 어떻든 더 잘 먹고 더 잘 살아야한다는 천박성을 마주하면서도 정치인 노무현은, 우리 시선에서 멀어졌던 낡아 빠져버린 정의로움을 화두로 꺼냈다. 어떤 사회를 꿈꿀 것인지 진지하게 물었던 정치인. 그는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좋았겠다고 고백했지만, 그가 대통령이 되었기에, 그리고 되돌릴 수 없는 그 결정으로 인해, 나같은 소시민조차, 어떤 사회여야 하는가 생각해보는, 성찰과 반성의 계기가 주어졌다고 생각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가장 큰 성과는, 암투와 모략의 공간으로 비춰지던 정치의 영역을 사색과 철학의 영역으로 돌아보게 한 것이고, 정치가와 국민들 사이에 소외되어 있던 진짜 정치의 힘을, 국민 스스로가 깨닫고 가치 있게 행사할 수 있도록 소유권 의식을 일깨웠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 슬픈 결정 없이 일깨움이 있었고, 의식의 상향 조정이 가능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결국 누군가에게 언제나 그리움으로 남는 인생이 성공한 삶이라면, 그는 운명처럼 충분히 성공했다. 아무리 그여도, 그 운명이라는 것이, 용서조차 못할 만큼 큰 서글픔을 품고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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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 問 라이브러리 2
도정일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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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심하기가 미덕이 되어야하는 세상만큼 불행한 사회도 없을 것 같다. 기술과 접목된 자본의 권력, 도태의 공포를 살포하며 끊임없이 경쟁을 자극하는 시장전체주의의 주도면밀한 내면화, 세계화 이데올로기를 뿌리에 두고 스스로를 검열하는 자기 감시의 극치, 그 뒤틀린 이면을 스스로 깨닫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러므로 시장전체주의가 뿌려대는 강력한 문제점을 철저히 해체하고, 전혀 불가능할 것 같은,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현재'를 하나하나 의심하도록 독려하는 문장들이 감사하다.

   아큐 현상에 대한 통찰이 깊이 남는다. 정체성을 잃어가면서도, 미국 문화를 여과 없이 받아들이면서 세계화를 지향하고 있다고 믿는 천박성이야말로 기를 쓰고 극복해야할 과제가 아닐까 싶다. 자본과 기술의 대연정으로 탄생한 기술권력의 미시적 분산은 두고두고 기억해야할 주제다. 감시기술의 사유화는 기술의 정치적 성격이 모호한데다, 권력 행사자가 숱한 사적 개인이며, 그 미시화된 감시 권력이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평등과 행복, 자유의 조건이라는 점. 모두가 감시의 대상이 되면서, 동시에 모두를 감시하는 사회 속에서 특정한 적은 점점 더 규정하기 어려워지고, 이 때문에 이성은 더욱 마비되어 버린다는 지적.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는 얕은 사회 의식의 팽창은 결국 기술과 자본의 연합 앞에서 인간의 가치를 철저하게 목적이 아니라 도구로 변질시킨다.

   교육의 배반과 배반의 교육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가장 가슴이 아렸던 부분. 에세이를 통해 인간의 내적 변화는 내면에서 스스로 일어나는 것인지, 아니면 환경의 변화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 스스로 주제를 선정하고, 해답의 고민을 풀어가는 미국 고등학생의 삽화가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한 까닭이다. IMF를 겪으면서 어느 순간 교육의 목표가 시장에 헌신하는 혹은 잘 적응하는 도구적 인간 육성에 집중되면서, 교육의 핵심가치는 경쟁으로 쏠리고, '돈'의 가치로 환산되기 시작했다. 자본 권력과 시장 전체주의의 만능성이 침투한 교육현장에서 최고의 교육적 성과는, 의심 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도구적 인간일 수 밖에 없다.

  시장이 과연 최선의 대안이며, 경쟁이 최고의 가치인지, 기술과 자본의 해부에 관한 한 가장 예리한 칼날을 가진, 인문학의 위기를 왜 예사로이 바라봐서는 안 되는지, 날카로운 질문과 해답의 실마리를 동시에 찾을 수 있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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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VS 프로이트 C.S. 루이스 연구서
아맨드 M. 니콜라이 지음, 홍승기 옮김 / 홍성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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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스와 프로이드는 유대인이자, 세계적인 석학이었으며, 인생의 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은 공통점을 지녔지만, 세계관에서는 극명한 차이를 드러냈다. 루이스는 무신론자였다가 추후 유신론자로 돌아선 반면, 프로이드는 죽는 순간까지도 무신론자의 세계관을 고수했다. 루이스가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으로 인생을 관통했다면, 프로이드는 인간 중심의 세계관으로 승부수를 띄웠다. 어떤 세계관을 가졌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달라졌음을 분석해낸 저자의 통찰력에 감탄해, 읽는 내내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프로이드는 철저하게 인간에게서 영성을 지워나갔다.  그 결과 결정론을 신봉하게 되었고, 정신병리나 현상의 분석에 집착했다. 그런 태도 탓에 프로이드에게 인간이란 결정론의 한계에 갇힌 존재이면서 동시에 주어진 문제를 결국은 혼자 힘으로  풀어내야 하는 외로운 검투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모든 인생과 현상의 인과관계의 꼬리를 물고 물었던 그는 끝까지 현실과 불화했다. 그러나 루이스는 미련할 정도로 인간의 영성을 탐색했으며 애써 신을 외면하려는 태도를 고의적 무지로 규정했다. 이해될 수 없는 존재를 앞에 두고, 이해되지 않는다며  애써 그 존재를 부정하면서 자위하는,  그러면서도 자신의 믿음에 확신이 없어 불안해하는 두려움. 신을 등지고 앞만 바라보면서 없다고 외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한다고 역설했다.  


  프로이드는 성의 프리즘을 통해 인간의 발달을 고찰하면서도 니체의 초인 사상을 추앙하며 스스로 금욕생활을 선택했다. 욕망의 억압을 택하면서 자연스러움을 버린 그가 과연 행복했을까. 시간이 갈수록 집요한 그의 노력은 학문적 성취를 이뤘지만, 뜻하지 않은 불안과 동요를 덧붙여댔다. 루이스는 성 뿐만 아니라 인생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신의 섭리로 이해했다. 뒤늦은 결혼, 배우자의 죽음을 겪으면서도 그는 그 안에 숨겨진 신의 메시지를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억척스런 탐색은 오히려 그에게 삶의 고비를 결 곱게 지나도록 하는 방향으로까지 인도했다. 루이스는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죽는 순간까지도 유머를 잃지 않았다.  


  인간의 영성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가끔은 구닥다리 취급을 받을 때가 있다. 첨단의 시대, 아직도 신의 존재를 믿는 멍청이가 있느냐는 식의 태도도 가끔은 마주하게 된다. 그런데 돌아보면, 인간은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존재로만 살 수 있는 존재는 결코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죽음은 정신으로 극복할 수 없는 문제이며, 사회적 논의로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과제도 아니다. 신체적 노력으로 이겨낼 수 있는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류가 생긴 이래 만고의 진리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것인데도, 영성의 문제는 터부시되어 왔다.  


  저자는 분명 유신론자와 무신론자의 삶을 단편적으로 비교하려는 의도로 이 책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영성의 문제, 그 치열한 마주함 없이 인간의 실존에 대하여, 인생에 대하여 논한다는 것은 어쩌면 가치 없는 일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큰 두 가지 주제, 무엇을 믿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는, 영성에 대한 고민 없이는, 질문될 수 없으며  답변할 수 없다. 저자는 이 책에서 영적 존재인 인간에 대한 고찰, 그 작지만 위대한 도전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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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배우는 성경 : 구약편 - 아담에서 말라기까지 인물로 배우는 성경
이용원 지음 / 홍림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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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 인물을 쫓다보면, 말씀을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삶의 무게를 지고 현실을 살았던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이므로, 인생의  좌표에서 갈 길 몰라 헤매는 내 자신의 모습과 어느 순간 겹쳐진다. 해답을 찾을 수 없어, 도저히 풀 수 없을 것 같던 실마리가 엿보기로부터 주어지는 것 같은 느낌. 은혜가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다. 

    <인물로 배우는 성경>편에서 다시 마음을 다잡게 하는 이는 솔로몬이었다.  모든 부귀와 영화로움, 명예를 가졌으면서도 하나님 없는 인생의 허무함을 깨달았던 왕.  이스라엘 분열의 단초를 제공했던 그였지만, 성전을 짓고 간구했던 기도는 그가 얼마나 깊고 넓은 영성의 소유자였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나왔다. 그리고 그가 간구하는 기도가 뒤따랐다. 왕과 그의 백성들이 그 전에 와서 하는 간절한 기도를 들어달라는 기도와, 그들이 범죄하고 그 제단 앞에서 맹세하는 기도를 할 때 선과 악을 구분하여 갚아 달라는 기도, 그들의 범죄의 결과로 전쟁에 패하거나 비가 오지 않고 흉년이 들거나 전염병이 돌 때에도 그 성전에서 기도하면 들으시고 사해 달라는 기도였다. 이방인들이라도 이스라엘 하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 성전에서 기도하면 그 기도를 들어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백성들이 전쟁을 할 때 이기게 해달라는 것과 혹 패배하여 포로로 잡혀갔을 때에는 그곳까지 와서 기도할 수는 없으므로 그 성전 있는 쪽을 향해서 하는 기도까지 들어달라고 했다' 자신의 안위와 명예를 드높이는 기도 대신 만민에 대한 축복과 회복에 대한 간구를 택한 솔로몬 앞에서 다시 숙연해진다. 모든 곳에 계시면서도 더 깊은 교제를 위하여 스스로 성전에 머무르심을 택하신 사랑과 낮아짐. 거룩한 처소에 대하여도 다시 생각하게 됐다.   


   한 시대가 지혜라고 부르고, 시류가 영민함으로 찬양했던 방법을 택한 왕들의 몰락은 한 마디로 축약된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의 떠남을 선택했다. 123인의 인생을 다 돌아본 지금, 타협과 굴종, 극복과 이김의 좌표 속에서  나는 어디에 서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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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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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과 마음, 영혼까지 갉아대는 최악의 고통 속에서도 살아낸 빅터 프랭클 박사의 나찌 수용소 이야기다.  유태인이라는 이유가 바로 죽을 이유가 된 시대 상황, 모든 지위와 명예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성도 모두 폐기된 공간 속에서 그는 로고테라피의 산 증인이 되었다. 궁극적으로는 인간 정신의 황폐화, 좌절, 영혼의 추락은 환경의 변화나 그로 인한 숱한 상처 때문이라기보다는,  삶을 왜 살아야하는지 그 목표와 의미를 잃어버리면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기심을 채우고 욕망을 성취하는 목표로서의 꿈이 아니라, 인간을 초월한 대상으로부터 주어지는 꿈이 내면화될 때, 더 가혹하고 처절한 현실을 딛을 수 있다는 주장으로 이해했다. 눈앞의 현실이 막막하고, 디딜 땅도 없이 발 잃고 쫓기는 짐승처럼 방황할 지라도, 사는 이유를 체현할 수 있다면 그 어떤 곳에서도 흔들림 없이 곧은 자아를 지켜낼 수 있다는 확신. 살아냄으로써 자신의 이론을 정립하고 발전시킨 이의 육성이라서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는 니체의 선언이나,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고백은, 빅터 프랭클 박사의 육성을 통과하면서 더욱 빛난다.  


   다이빙을 하다가 사고를 당해 목 아래가 모두 마비되었다는 제리 롱이 빅터 프랭클 박사에게 보낸 편지는 이 책이 도달하고 싶었던 목표를 가장 간명하게 보여준다.  ‘저는 제 삶이 의미와 목표가 충만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운명의 날에 대한 나의 태도가 삶을 바라보는 내 자신의 신조가 되었습니다. 나는 내 목을 부러뜨렸지만, 내 목이 나를 무너뜨리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지금 대학에서 처음으로 심리학 과목을 듣고 있습니다. 나는 내 장애가 다른 사람들을 돕는 내 능력을 더욱 향상시켜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시련이 없었다면 내가 지금 도달한 인간적인 성숙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모든 인간이 죽어야 한다는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러나 그 운명의 여정을  진짜 깊이 있는 삶의 궤적으로 바꾸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과 책임에 따른다. 정신적 황폐화, 인간성의 상실, 정신과 영혼의 타락..이 모든 것을 단순히 환경 탓으로 사회 탓으로, 다른 사람들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에게서 선택의 자유를 뺏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저자는, 결코 직면하고 싶지 않았던, 그래서 더욱 숨기고만 싶던 우리 자신 스스로의 책임은 없는지 신랄하게 묻는다. 선택의 자유의지를 인식하고, 책임감을 가질 때만이 주어지는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고, 또 건강하게 극복할 수 있다는 역설, 통렬하고 생생한 활자들이 그래서 더욱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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