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기 길 위에서 듣는 그리스 로마 신화
이윤기 지음 / 작가정신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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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가 현실은 그렇지 않더라도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한다면서 자신의 길을 개척했듯이 이윤기님은 서양의 풍성한 이야기로 삶의 아름다움과 풍성함을 가꾸셨다.

 

시간도 없고 여유도 없지만, 현실을 잠깐 잊고 싶을 때, 소소하면서도 품격있게 숨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가이드와 함께 잠깐 예술 여행을 떠날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쁠까. 이 책은 그런 욕망을 온전히 충족시켜준다.

 

너무 오래전에 듣고 읽어 이제는 기억 속에서 가물거리는 옛 신화들을 끄집어 내, 낯익은 그림, 조각들과 견주어 차근차근 설명해준다. 활자를 따라 읽다보면 황폐해져 갈라진 틈새로 습기가 잠잠히 침잠하듯 마음도 촉촉해지고.

 

갓을 형상화한 예술의 전당이 서양의 그것들처럼  전해내려오는 우리네 이야기들을 형상화한 건축물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윤기님의 아쉬워하는 탄식 소리가 내내 지면을 울리는 것 같다.

 

지극히 현실적인 삶이 더더욱 무미건조해지는 까닭. 한껏 부풀어 오르는 상상력의 부재, 앎의 즐거움에서 솟아나는 끝없는 호기심과 탐구심의 결여, 돌아보고 새겨보며 꼼꼼히 들여다보는 관찰력의 몰락, 새로운 의미를 찾아 꿰어내는 통찰력의 미흡..역설적이게도 이윤기님이 길 위에서 들려주는 그리스 로마 신화는 물질적으로는 풍족한데도 철저히 헐벗고 공허한 생이 어떻게 가능한지 신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가늠하게 한다.

어린이는 따지지 않습니다. 신화를 읽을 때도 따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른은 요조조모 따지지요. 신화는, 어른이 되면서 잃어버린 인류의 어린 시절 이야기 같은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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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 평전
윌리엄 J. 듀이커 지음, 정영목 옮김 / 푸른숲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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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전개에 있어서 특정 개인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늠해보고 싶다면, 어쩌면 호치민 평전을 읽어보는 것이 유익이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영웅에 대한 맹목적 숭배나 신격화가 역사를  왜곡하고 퇴보시킬 수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호치민이 걸어온 인생을 읽다보면,  집념으로 뭉친 인간의 끝없는 전진 앞에서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나 베트남의 독립을 쟁취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젊은 청년이 소련에서 열린 코민테른에서 식민지가 된 아시아 국가들의 독립을 의제화시키려는 노력은 가히 눈물겹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문제를 앞에 두고 절차와 순서를 뛰어넘어 의제화해나가는 과정은 사명감이 아니면 달리 설명할 길이 없을 것 같다. 동조하고 뭉쳐가며 세를 확장해야하는 조직의 틈바구니에서 그는 가야할 길을 결코 잊지 않았다.

 

숱한 위장과 탈출, 극한 긴장과 도망이 연속된 삶이었지만, 경직된 사고가 아니라 유연하고 실용적인 태도를 견지한 점은 호치민의 반대편에 선 이들에게도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되었다.

 

책을 읽으며 베트남 전쟁의 이면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중국과 소련의 공산주의 두령을 향한 경쟁과 경계, 사이공 정권의 무능, 아이젠하워, 케네디, 린든 B 존슨, 닉슨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미국의 실책, 호치민과 레두안 등 북베트남의 차세대 권력 지형의 변동, 한국전쟁과 분단 등이 얽히고 섥히며 만들어낸 사안들을 읽으면서, 단견으로 역사를 이해하는 것의 위험성을 다시 한번 각성하기도 했다.

 

호치민을 공산주의자로 볼 것인가, 민족주의자로 볼 것인가는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실현하기 위해 베트남의 독립을 지향했다기보다는 베트남 독립을 위해 공산주의를 이용한 측면이 있는데다, 단순한 민족주의자로 치부하기에도 뭔가 아쉬움이 남는다. 애국심을 고취하거나 베트남 민족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데도 일부 열중했지만, 국제적 공산주의 연대를 구상하는데도 상당히 열심을 냈기 때문이다.

 

호치민에게 배울 것은 '베트남 독립'이라는 목표 앞에서, 끊임없이 현장과 현실을 돌아보는 한편 국외적으로는 냉정한 평정심을 바탕으로 유려한 외교를 펼쳤으며, 안으로는 소탈한 지도자로서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내는 리더십을 발휘하는 균형감각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이 책의 미덕은 사료를 바탕으로 호치민을 영웅화하거나 윤색하는 대신 그의 행적을 쫓으며 인간과 역사의 관계를 덤덤히 그려냈다는 점일테다. 사심 없이 민족을 위해 일평생을 바친 호치민 같은 지도자가 우리에게도 있었더라면 한반도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읽는 내내 가슴에 묵직한 돌을 얹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가능성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어렵고 절망적이겠지만,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최신식 대포만큼 강한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민족주의입니다! 그힘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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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를 감추는 사람, 실패를 살리는 사람
하타무라 요타로 지음, 정택상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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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뿐만 아니라 '실패'마저 용납되지 않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다시 읽혀져야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 책이 아닌가 싶다.

 

동경대학교 교수인 저자는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일본의 사회 분위기가,  침체된 사회를 만들어간다고 진단하면서 '실패'를 진지하게 연구하고 대면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인간은 실패를 통해서 성장해왔고, 성공의 법칙이 있듯 실패에도 일정한 법칙이 있으므로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실패학을 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실패에는 개인의 무지나 부주의, 오판 등으로 나타나는 개인 책임의 실패, 조직 또는 기업 운영이 불량해서 생기는 실패, 행정이나 정치의 태만으로 이루어지는 실패, 사회 시스템의 부적합, 최종적으로는 미지와의 조우를 통해 나타나는 실패의 구조적 계층성이 있으므로, 이를 분석하여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또, 실패의 원인은 무지, 부주의, 차례 미준수, 오판, 조사 및 검토의 부족, 제약 조건의 변화, 기획 불량, 가치관 불량, 조직 운영 불량, 미지 등 10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실패는 단순한 사고방식, 정보단절, 실패의 방치가 가중되면서 증폭하는 성질이 있다는 것도 밝히고 있다.

 

실패를 딛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실패의 유용성을 활용하고, 전략적 비젼을 가져야 하며, 감정을 추슬러 실패를 지식화하는데까지 나아가야한다고 주장한다. 실패 정보의 관리와 관련해서는 실패 정보는 축소되기 쉬우므로 생생하게 전달하고 자주 환기할 것, 솔직하게 공개하고 공격적으로 대처할 것, 구체적으로 기록할 것, 책임 소재를 명확히 밝힐 것, 실패를 절대로 신화화하지 말 것, 남의 실패도 내 것처럼 인식할 것, 실패 당사자의 입장에서 평가할 것을 강조하면서, 실패를 지식화할 때는 제목, 상황 개요, 경과, 원인, 대처, 총괄, 지식화로 나누어 기술해야 한다는 세부 항목까지 정해서 안내한다.

 

이 밖에 매뉴얼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고 창조적으로 사고할 것, 무능한 상사와 반복적인 회의가 실패를 가중한다는 점, 실패 박물관을 만들자는 흥미로운 주장도 펼친다.

 

10여년 전에 출간된 책이지만, 2015년 현재 다시 읽어도 전혀 어긋남이 없다는 점이 오히려 안타까울 정도로, 적확하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실패를 다각도로 분석했다.

 

저자는 미국의 사법거래제도, 즉 실패를 공개적으로 드러낼 경우 양형을 줄여주거나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실패를 공유하는 문화가 부럽다며 기술했는데,  나는 동경대학교 교수가 실패학을 창시하면서 일본 사회 전체에 성찰의 화두를 던질 수 있다는 게 읽는 내내 부러웠다. 일본의 숨은 저력을 새삼 느꼈다고 해야할까.

실패학은 실패의 속성을 명확히 알고, 실패를 머릿 속에 체계적으로 분석하여 극복하고, 실패를 새로운 성공의 토대로 삼자는 취지로 제안된 것이다. 실패학은 사람을 성장시키는(혹은 퇴보시키는) 실패의 감정에 대한 대처, 새로운 출발의 기반이 되는 실패 지식의 정리, 성공의 토대가 되는 창조적 사고 기법의 훈련 등 세 가지 구성 요소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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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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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공동체는 선을 추구하며, 모든 공동체를 포괄하는 국가 공동체는, 그러므로 최고의 선을 추구한다고 단언한다. 또 모든 학문과 기술의 궁극적인 목적도 선이며 모든 학문과 기술의 으뜸인 정치도 선을 향해 나아가야 하고, 정치에서의  선은 정의임을 표방한다. 국가는 자연적으로 존재하게 된다고 주장한 점은 사회계약론에 입각한 국가론과 대비되기도 한다.  

 

아마도 <정치학>의 백미는 최고의 선을 추구해야하는 국가 공동체를 구성할 때, 어떤 정체가 합당할 것인지, 그리고 국가가 국가답기 위해서는 영토, 인구, 도시의 위치 및 설계, 교육 등을 어떻게 조합하는 것이 좋은지 철학적 사유를 덧입혀 나가는 과정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누구나 차별없이 추첨에 의해 공직에 진출하는 정체를 민주정, 일정한 자격 요건을 갖춘 자들만이 공직에 선출되는 정체를 과두정, 특정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니고 가장 훌륭한 자들로만 공직을 구성하는 정체를 귀족정, 독재자가 자기와 동등하거나 더 훌륭한 자들을 자의적으로 강압적으로 지배하는 정체를 참주정으로 구분하고, 각각의 변형과 특성을 분류해나간다.

 

눈여겨볼 것은 대부분의 국가를 위한 최선의 정체를 중산 계급에 결정권이 있는 정체로 정의한 점이다. 빈민과 부자가 양극단의 결정권을 가지면 주인과 노예의 대립 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정체의 변혁이 일어나는 이유를 사유한 점도 주목할 수 있는데, 가령 민중이 선동가의 사주를 받아 부자를 박해하면, 부자들이 단결하여 참주정체로 이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과두정은 민중이 부당하게 억압받거나 지배계급이 반목할 때 전복되는데 지배계급의 일부가 선동가 역할을 하거나 일부가 정체의 변혁을 강구할 때,  또 지배계급 내 새로운 지배계급이 생길 때 가능해진다고 진단한다. 귀족정체는 정권에 참여하는 자가 소수라는 구조적 한계 때문에 변혁을 맞이한다고 봤다.

 

정체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불법을 경계해야 하고, 공직자들은 공정해야 하며, 상벌을 분명히 하고 특정 계층이 갑자기 신분상승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한편 공직을 축재의 수단으로 삼지 말아야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민주정에서는 부자들의 재산을 아껴주고, 과두정에서는 빈민을 배려하는 것이 정체의 보존 수단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 정체에 대한 충성심, 업무 수행능력, 정의감을 갖춘 적격자가 요직에 취임해야 하며, 정체의 존속을 원하는 자들을 다수로 유지하되, 늘 중용을 지켜야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근거로 살펴보면 여전히 우리의 정치는 과두정에 가깝고 완전한 자족을 위한 국가공동체의 선을 지향하기 보다는 각개 전투의 치열한 생존들의 혼합이 국가의 민낯이 아닐까 싶은 자괴감마저 든다.

 

공정성이 와해되고 때로는 불법이 합법화되며 공직이 축재의 수단이 되고 있는데도 정체 변혁의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뭘까. 누군가의 지적대로 실제로는 과두정이며 중산 계급의 독보적 지배가 아니라 특정 계층의 독점적 지배가 창궐하는 데도, 우리는 이미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쟁취했다는 우상에 눈이 가리워져,  심연 깊은 끝까지 진지하게 사유해나가는 힘을 잃어버린 까닭은 아닐까.

 

보편적인 지식으로 정리된 편린을 암기하듯 되내이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목적을 정의내리고 다양한 관점에서 정체의 구성을 조합해나가는 사유의 과정을 따라가는 것 자체가 큰 공부가 된다.

국가 형성은 정의 실현의 전제다. 인간은 법과 정의가 없으면 가장 사악하고 가장 위험한 동물이다. 정의는 국가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해준다. 올바른 지배란 공동의 이익을 위해 동등한 자들과 자유민에게 행사되는 지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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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 (무선 제작) - 무기.병균.금속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바꿨는가, 개정증보판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사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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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문제의식은 왜 대륙마다 인류사의 발전 속도가 달라졌는지에서부터 출발한다. 일견 인종이나 민족의 특성에 주목해 성실, 창의성, 지성, 의지 등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는 답변에 천착하는 대신, 지리적 환경의 이점이 결정적인 변인으로 작용했으리란 가정을 세우고, 생물학, 언어학, 인류학 등을 넘나들며 근거 중심으로 풀어나간다.

 

애초에 인류발전의 중요한 기초가 되는 작물화와 가축화가 가능한 생물 종들이 크게 9개정도의 특정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지리적 환경에 따라 출발선이 달랐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들 특정 지역은 뛰어난 지리적 조건 때문에 곧 식량 생산이 수렵 생활을 능가할 정도로 효율성을 발휘하게 되었고,  야생동물을 가축화하면서 뜻하지 않게 동물로부터 옮겨온 감염병에 대한 면역력까지 강화할 기회를 얻었으며, 이로 인해  소수의 인원으로도 감염병에 취약했던 다수를 제압하고 정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식량의 생산력 향상으로 인구밀도가 높아지고 정주가 가능해지면서 무리에서 부족으로, 부족에서 추장 사회로, 다시 국가로의 이행이 빨라질 수 있었다는 데 주목한다. 더불어 문자는 무기, 세균, 중앙집권적 정치 조직 등과 함께 제국화를 가속화하는 힘이 된다.  문자의 발명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확산의 편리성인데, 아무리 문자가 빨리 발명되었다 하더라도 그 지역의 지리적 환경이 척박한 경우, 문자가 전 지역으로 확산되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통치나 정보 교환 등에 있어서 문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데 불리하게 작용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문명이 전파되기 좋은 대륙의 지리적 조건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경우보다는 좌우로 넓게 뻗어 동일 위도에 해당하는 지역이 많은 경우가 더 유리하므로 유라시아가 아메리카나 아프리카보다는 인류사 발전의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다고 강조한다.

 

흥미로운 점은 <총, 균, 쇠>그 후의 이야기를 통해 왜 중국이 아니라 유라시아가 세계 정복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밝힌 대목이다. 유라시아는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어서 경쟁이 촉진되어 기술, 과학, 자본주의 등이 발전될 수 있었지만, 중국은 일찍부터 통일되어 있어 정치적 체계가 중앙으로 집중되는 구조를 갖추는 바람에 제국의 통치에는 안정적인 면모를 보였지만, 현대 과학, 기술,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데 있어서는 정치적 판단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해 발전 조건의 출현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동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착안한 저자의 결론은, 혁신을 가져오는 최적의 조건은 '최적 분열의 법칙이'이 작동한다고 본다. 혁신은 분열이 최적의 중간 정도에 머문 사회에서 빠르게 진행되고, 지나치게 통합되어 있거나 너무 분열되어 있는 경우에는 제대로 발현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모든 동물은 한번쯤은 가축화될 운명에 처해 있었지만, 가축이 될 수 있는 동물의 조건은 식성, 성장속도, 감금 상태에서 번식시킬 수 있을 것, 온순한 성격, 겁먹는 버릇이 없을 것, 무리를 이루고 우열 위계를 잘 갖출 것 등을 제시하였는데, 늘 보던 가축들의 숨은 비밀을 엿본 것 같기도 하다.

 

그간 지리적 공간은 단순히 생활 터 정도의 환경적 개념으로만 이해했었는데, 역사를 가르는 주요한 변수로 작동했다는 점을 읽고 나니, 새삼 그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기술혁신과 정보사회 속에서 지리적 환경과 조건은 또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도 궁금해진다.

(오늘날) 새로운 권력으로 떠오르는 나라들은 여전히 식량 생산을 근거로 지배한 오래된 중심지로, 수천 년 전에 통합되었거나 그곳 사람들이 다시 살게된 곳들이다. B.C.8000년 당시의 역사가 지금도 우리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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