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칸트인가 - 인류 정신사를 완전히 뒤바꾼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서가명강 시리즈 5
김상환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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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계 교수님의 철학사를 읽다가 대학시절 '철학' 교양 과목을 배우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칸트의 철학을 조금이라더 더 알아보자는 의지가 생겼다. 그도 그럴 것이 칸트에 대한 소개에서, 칸트는 <논리학>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원해도 좋은가,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질문을 던지면서 인간과 세계의 의미를 정립하는 한편 <순수 이성 비판>의 해설판을 저술하면서 <학문으로 등장할 수 있는 미래의 모든 형이상학에 대한 서설>이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기술했는데, 이 보다 더 크게 호기심과 열정을 자극하는 대목은 없었다.

 

다행히 문외한에 가까운 독자도 쉽게 접근할 수 있을만큼 <왜 칸트인가>는 충분히 친절하고도 적확한 체계성을 갖추고 있어 독서의 즐거움은 물론 지적인 배움의 지평을 넓히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저자는 칸트의 저작과 철학을 '혁명과 전회'와 연결하면서 시작하는데, 칸트는 인식의 출발점을 사물에서 주체로 바꾸었으며, 덕의 윤리에서 의무의 윤리로 전도시켰고, 심미적 취향과 보편성, 그리고 기계론적 자연관에서 유기체적 자연관으로의 이행을 선도하면서 철학의 대 영토를 발견했다는 평가를 부연한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책의 구성을 칸트의 3대 비판서를 기초하여 4부로 분할했다. 1부에서는 <순수이성비판>을 근간으로 인지혁명을 통한 마음 모델의 혁신을 소개한다. 2부에서는 <실천이상비판>에 대하여 인격의 존엄성과 도덕적 판단, 최고선에 대하여 고찰한다. 3부와 4부에서는 <판단력비판>을 파고들어 미와 자유, 보편성 등에 대하여 설명하고, 자연의 목적론적이고 유기체적인 자연관에 대해 개진한다.

 

1부에서는 칸트 전후로 나뉘는 인식론의 대상 변화부터 출발한다. 칸트 이전에서는 사물이 주체의 인식 여부와 관계 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했고, 인식이란 사물을 그저 모사하는 데 그쳤다면 칸트는 사물이 아니라 주체를 중심에 둔다. 주체와의 관계, 인식 속에서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관점으로 옮겨가면서 철학은 새롭게 진보한다.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즉, 세계가 주체에게 인식되는 작동 기전을 밝히는 데 칸트의 초점이 모아진다. 칸트는 거울처럼 사물이 단순하게 비추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우리 마음의 인식이 합쳐져 현상이 나타난다는 주장을 펼친다. 칸트의 탁월함은 주체가 인식할 수 없는 물자체, 주체가 경험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현상계, 그리고 물자체와 현상계 사이를 나누면서 이어주는 초월론적인 차원이 있다고 명명한다. 인간의 경험을 경험이게 하는 선험적 원리가 초월적 차원에 존재하고 있으며, 인간의 경험 이전에 주어진 선험적 원리 때문에 인간이 인식하는 세계가 언제나 동일해진다는 주장을 펼친다.

 

칸트의 철학은 세 가치 차원과 연결지어 인식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인식과 사유의 영역을 분별하며 이론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을 나누며 한계를 설정하는 '비판'이 된다.

 

칸트는 우리 마음의 인식 능력을 감성, 상상, 지성, 이성으로 구분하고 각각 시간과 공간/도식/양, 질, 관계 및 양태의 범주/ 영혼, 우주, 신의 이념들로 범주화했다.

 

 먼저 감성에 속하는 시간과 공간의 경우, 칸트는 시공간이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을 수용하는 하나의 형식으로 본다. 지성은 감성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를 능동적으로 종합하는 능력으로 직관을 개념화하는 작업으로 규정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를 차용해 지성의 범주를 12개로 확장하고 이의 상위범주를 양과 질, 관계와 양태로 구분하면서 지성 안에 속한 범주들이 서로 연합하고 판단하면서 하나의 통일된 대상으로 조직해낸다고 보았다.

 

도식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고, 감성과 지성의 협동을 가능하게 하는 초월론적인 차원에서 생산된 선험적 그림으로, 추상적인 개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거나 개념을 직관화하도록 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성은 추론의 계열을 만들어 감으로써 지식 전체를 체계화하는 능력으로, 다양한 경험적 차원의 지식이 결국은 영혼, 우주, 신으로 수렴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외부 자연에 대한 모든 지식은 우주로, 도덕 실천에서 일어나는 모든 판단은 신으로, 그리고 심리적 사건들은 영혼으로 귀결되면서 체계적 질서를 갖는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이성의 이념들은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사유될 수 있다고 단언했다. 즉, 감성, 지성, 상상력은 인식을 위한 능력이며 이성은 사유를 위한 능력이라는 것.

 

이성은 지식의 획득이 아니라 현상계를 넘어선 사유를 위한 의무에 매진하면서 인간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는 한편, 관심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형이상학적 욕망, 즉 나는 무엇을 알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희망해야하는가를 사유하면서, 마음의 인식 능력을 각각의 질문에 맞게 기능적으로 활용해야한다고 주장한다.

 

2부에서 다루어지는 <실천이성비판>의 핵심은 윤리학의 중심을 도덕법칙, 즉 법으로 대치하면서 선은 기쁨이나 행복의 원천이 아니라 도덕법칙에 일치하는 행동이며, 도덕적 의무를 지키며 자유와 정의를 추구하는 개인의 존엄성을 강조한다. 또한 존경이라는 선험적 정서를 통해 보편성과 필연성을 갖춘 도덕법칙이 되는 정언명법,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규칙이 무엇인지 탐색하려는 의지, 도덕적 행위인 의무, 자신이 스스로 따라야할 법칙을 스스로 제정하는 능력인 자율이, 서로 기능하며 윤리적 판단을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3부에서는 <판단력 비판>의 전반부를 탐색하면서, 미학을 거론한다. 칸트는 사실에서 개념을 끌어내는 반성적 판단력을 소개하면서, 기존의 원리를 비판하고 새로운 상위 원리를 추측하면서 합목적성이 밝혀지거나 지각함으로써 즐거움을 향유하는 규칙 창조적 판단이라고 설명한다. 칸트는 예술가, 작품, 감상자를 검토하며 미학에 접근하는데, 먼저 예술가를 자연을 대신해 예술적 재현의 규칙을 새롭게 제정하는 창조적 인간이기에 천재로 부른다. 그리고 예술적 작품에는 영감의 원리인 감성적 이념이 현시되어 있어 감상자로 하여금 수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열림의 경험을 제공한다고 정리한다. 또 감상자는 무관심한 만족감, 개념없는 보편성, 목적없는 합목적성, 개념없는 필연성을 통해 나타나는 주관적 합목적성에 따라 심미적 판단을 한다고 정립한다.

 

4부에서는 <판단력 비판>의 후반부를 통해, 칸트를 통한 자연관의 변화를 설명한다. 칸트는 생명 현상의 충분한 설명을 위해, 기계적 자연관과 동시에 양립할 수 있는,자연을 살아있는 생명체로 보는 유기체론을 지지한다.  인간의 유한성을 근거로 경험이 가능한 것은 현상계뿐이며 영혼, 신, 우주같은 이념들로 구성되는 예지계로부터 이성을 지도하고 규제하는 원리이자 합목적성과 체계성을 바탕으로 한 유기체론에 대한 가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책은 칸트 철학의 위대함과 시사점을 보여준다는 데 가장 큰 장점을 발휘한다. 관점과 질문의 변화가 철학의 대전환을 일으킨 놀라운 사실뿐만 아니라 칸트의 표현대로 근대 학문의 기초와 시작점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더불어 칸트에 대한 다양한 조망 및 해설과 연결되는 또 다른 독서에의 의지에도 불을 붙이는데, 그만큼 각각의 장이 체계적이고 밀도있게 정리되어 이 책을 출발점으로 삼아 혼자서도 지식의 분지를 그려나갈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준다.  

칸트는 오늘날 인공지능 연구가 따를 수 밖에 없는 마음의 모델을 처음 제시한 철학자다. 마음을 일종의 정보처리 장치로 접근하는 이런 관점은 이론적 판단의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칸트의 첫 번째 비판서에서 처음 제시되었다가 심미적 판단과 목적론적 판단의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세번째 비판서에서 더욱 심오한 깊이를 획득하면서 최종적으로 완성된다. 그러나 인공지능 시대에 칸트가 점덤 더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이런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인공지능 시대에 망각하기 쉬운 도덕적 가치와 심미적 가치에 대한 물음을 과학-기술적 가치에 대한 물음 못지 않게 중시했다는 데 있으며, 그런 물음에 접근하는 모범적인 사례를 남겼다는 데 있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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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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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변주되고 반복되는 음악과, 결합과 생성을 통해 지속적으로 되풀이되는 영원회귀의 철학은 묘하게 닮아 있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다는 밀란 쿤데라는 영원회귀 속에서는 인생의 잔혹함이나 아름다움 따위는 염두에 둘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면서 모든 것은 처음부터 용서되며 동시에 모든 것은 냉소적으로 허용된다는 판단으로 소설을 시작한다.

 

무거움과 가벼움을 교차시키며 양분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모순이 대비되면서 동시에 조화되는 그 신비함을 파고드는 데서 작가의 문제의식은 제기된다.

 

프라하의 외과의사인 토마시는 끊임없이 여자를 만나지만 정착하지 않는다. 다처주의를 지향하는 그와 달리 연인 테레자는 토마시에게 안착하기를 희구한다. 원치 않는 결혼 생활을 한 테레자의 어머니는 딸을 구박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고, 성장과정에서 존재로써 인정받지 못한 테레자는 끊임없이 불안해 하며 온전한 사랑에 목말라한다. 우연한 사건으로 만나게 된 토마시와 테레자는 연인이 되고 아이러니하게도 테레자는 프라하에 진주한 소련군의 사진을 목숨 걸고 찍으면서 생애 최고의 행복을 누린다.

 

작가는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되며 우연한 사건을 테마로 변형한 후 그것이 반복되고 변화되며 발전된다고 표현하는데, 토마시와 테레자의 삶도 그렇게 흘러간다. 토마시는 당시 체코의 여느 지식인들처럼 체코 작가 동맹의 잡지를 읽다가 자신의 의견을 투고하는 데 그것이 실리면서 내무국과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고, 결국은 의사 대신 유리창 청소 회사의 용역원으로 일하게 된다. 테레자는 우연히 만난 기술자와 욕정에 못이겨 정사를 나누고 토마시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지만, 술취한 경찰에 의해  그가 감시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가벼움을 대변하는 토마시와 무거움을 상징하는 테레자는 실타래처럼 얼킨 삶 속에서 함께 교외로 나갔다가 사고를 당하고 한 자리에서 목숨을 잃는다.

 

또 다른 연인 사비나와 프란츠는 토마시와 테레자의 다른 버젼처럼 그려진다. 사비나는 공산주의가 뒤집어쓰고 있는 아름다운 가면의 그 추함에 대한 혐오감을 근거로 내적 저항을 키워나가는 인물로, 배신과 일탈을 추구한다. 반면 그녀의 연인 프란츠는 전도 유망한 학자이자 주어진 삶의 틀안에서 모범적인 행보를 구가하는 인물로, 열뜬 지식인의 표상처럼 대장정 같은 개념에 열광한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민주주의, 단두대, 사형제도 폐지 같은 이론이 아니라 어떤 것이든 통합하는 대장정 같은 정치적 키치에 열중하며, 대장정이라는 미명하에 캄보디아로 떠나는데, 거기서 대장정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양태로 변모하는지 작가는 놀라울 정도로 적확하게 표현한다.

 

무거움과 가벼움, 역사적 사건과 인간의 상처, 사랑과 배신, 육체와 영혼, 이론과 진영, 우연과 필연, 변주와 반복, 해석과 오해, 판단과 보류..그 숱한 교차점이 어우러지는 생의 한 가운데서 과연 고정되고 올곧은 하나의 길만 허락되어야 하는가.  모순은 조화되고, 대립은 화해하는 영원회귀의 삶이라면, 존재는 무겁지만 동시에 한없이 가벼울 수 있을테다. 히틀러를 통해 유년 시절을 떠올리며 그를 용서하는가 하면, 스탈린 아들의 죽음을 똥과 결부시키는 키치를 통해 이데올로기의 광기를 조롱할 수 있는 가벼움은 고정불변의 일회적 직선관으로는 도무지 간과할  수 없는 행태니까.

 

역사의 상처 속에서 수많은 사연을 안고 쓰러져간 사람들의 삶을 치유하는 방책으로 니체를 인용한 작가는, 스스로가 가장 많이 위로받지 않았을까 싶다.

구약성서의 신화 속에서 성장한 우리에게 전원시란 여전히 낙원의 기억으로 남아 있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천국의 삶은 우리를 미지로 끌고 가는 직선 경주와는 동떨어졌다. 그것은 모험이 아닌 셈이다. 이미 아는 것들 속에서 뱅뱅 도는 삶인 것이다. 그 단조로움은 권태가 아니라 행복이다 - P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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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투스 - 인간의 품격을 결정하는 7가지 자본
도리스 메르틴 지음, 배명자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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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개념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생경스러울만큼 신선하고, 깊이 있게 이해하는 방편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사회학 서적을 선뜻 집어들기 부담스러울 때, 가볍게 읽으면서도 자기계발과 사회학 개념을 동시에 학습하는 데 이롭다.

 

우선 저자의 기획력이 돋보이는데, 주로 경영이나 관리의 관점에서 명령이나 충고조의 식상한 어투를 버리고 '아비투스'라는 사회학의 개념을 차용해 자기계발서를 기술함으로써 독특한 재미를 선사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가 주창한 아비투스는 사회의 계층을 구별하는 개념으로 일련의 생활 방식, 태도 등을 의미한다. 이 책의 유용성은 이러한 아비투스를 심리자본, 문화자본, 지식자본, 경제자본, 신체자본, 언어자본, 사회자본으로 구분하면서, 아비투스의 파급력과 위력을 꼼꼼하게 드러내는 데 있다.

 

단순히 각 자본의 특성은 이러하고, 계급에 따라 이렇게 다르다, 식의 기술 방식이 아니라 각 자본과 관련된 인터뷰, 연구 자료 등을 제시하면서 전체의 얼개와 맥락을 파악하도록 돕는다. 특히 각각의 자본을 장으로 구분하여 기술하고, 각 장의 마지막에는 관련 전문가의 인터뷰를 실어 각 자본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구현되는지 소개하고 있다.

 

그간의 자기계발서가 개인의 노력과 헌신에 초점을 맞추면서 상대적으로 사회적 맥락을 소홀히 하여 성공 여부를 개인의 책무로 되돌렸다면, 이 책은 성공과 성취의 이면에 자리잡은 계급적 구조와 수용에 집중하면서 개인을 둘러싼 사회 문화의 경계와 이면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성공 신화의 사회적 작동 방식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능하게 한 점이 두드러진다.

 

다만, 책의 기술 목적이 자기계발에 있다보니, 각 계급의 아비투스를 평면적이고 단선적으로 설명하는 데 그치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

 

 

아비투스는 사회적 지위의 결과이자 표현이다. 아비투스는 우리의 사회적 서열을 저절로 드러낸다. 지위와 구별 짓기 게임에서는 상류층 아비투스가 모든 것의 기준이다. 그런 아비투스가 더 많은 명성을 얻고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진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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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 동서문화사 월드북 10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채수동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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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 때 혁명을 꿈꾸었던 작가가 바라본 혁명에 대한 평가는 뜻밖에도 영성과 맞닿아 있다. 죽음의 공포를 직면한 후 구원이란 무엇인가, 에 천착했던 작가의 관찰은 누가복음에 소개된 귀신들과 돼지 떼로 귀결되면서, 그가 아니라면 결코 쓰지 못할 대작으로 탄생했다.

 

<악령>은 러시아의 대 혼란기였던 1860년대의 러시아 사회와 인간 군상들을 충실하게 그려내고 있다. 후록에 실린 작품 소개에 따르면 작가는 네차예프 사건을 모티브로 작품을 구성했다고 한다.

 

자신의 처남과 같은 학교에 다니던 이바노프가 어느 공원의 늪 속에서 타살된 채 발견되었는데, 개인적인 원한에 의한 사건이 아니라 후에 네차예프라는 활동가와 그 조직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점이 밝혀졌다고 한다.  이 사건에서 영감을 얻은 도스토예프스키는 파괴를 통해 새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맹목적 혁명의 의지를 '악령', 즉 '귀신들린' 정신으로 도치하면서, 오직 목표만을 향해 일념하는 조직의 모습을 귀신이 자리잡은 돼지떼, 즉 결국에는 강으로 빠져들어가 몰살하는 돼지떼로 표현하면서 소설의 큰 줄거리를 다져나간다.

 

그러나 작가의 천재성은 이 소설을 혁명조직의 탄생과 활동가의 행동에 근거해 단편적으로 구성하지 않는 데 있다. 처음에는 스쩨빤 선생과 스타브로긴의 어머니 바르바라 부인의 사랑도 아니면서 우정도 아닌 애매하고 모호한 관계 속에서 싹트는 삽화들이 소설의 전반부를 차지한다. 거기에 정신 분열증을 앓고 있는 것처럼 거칠었다가 일순간 얌전해지는 스타브로긴의 일상이 언뜻 비쳐지지만 다소 지루할 정도로 이렇다할 사건의 전개는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그러다가 차츰 네차예프 격인 뾰뜨르가 등장하면서 지령, 5인 조직 등이 거론되고, 죽음을 극복하면서 신이 될 수 있다고 믿기에, 어차피 죽을 바에야 샤또프의 살해를 감행했다고 유서까지 쓰면서 책임을 뒤집어 쓴 끼릴로프, 스타브로긴의 아이를 가진 아내의 출산을 돕기 위해 온 거리를 활보하는가 하면 출생한 아이는 자신의 아이라며 무한한 감동에 빠지는, 그러나 뾰뜨르로부터 조직을 밀고하려 한다는 의혹을 받아 비참하게 최후를 맞는 쌰또프, 방탕한 생활의 끝에서 만난 스타브로긴의 절름발이 아내 마리야와 술고래꾼 레뱌드낀, 스타브로긴을 사랑하지만 마브리끼에 기대고 결국 폭도에 의해 살해되는 리자베따, 현의 사건들을 장악하지 못하고 쓰러지는 렘브께와 율리아 부인, 돈에 눈이 먼 탈옥수 페지까 등이 그려지면서 모든 일화는 살인, 방화, 파괴의 정점으로 치닫는다.

 

스쩨빤 선생의 아들 뾰뜨르는 작은 조직들이 곳곳에 파괴를 일삼아 사회에 혼란을 가져오면 혁명의 과업을 완수한다고 믿는 인물로, 중앙의 지령을 받고 있다는 신뢰를 얻어 5인 조직을 통솔하면서 샤또프 살해를 지시하는가 하면, 공포를 극복하는 자유의지를 선택하겠다는 끼릴로프를 설득해 샤또프 비극의 책임을 유서에 남기도록 종용한다. 특히 뾰뜨르는 사상적 고뇌에서 혁명에 뛰어들었다기보다는 파멸과 붕괴에 열정을 쏟아붓는 활동가로서, 자신이 혁명의 선두에 서는 대신 스타브로긴을 혁명 정신의 화신으로 삼기를 갈구하는데, 스타브로긴의 거절로  실패한다.

 

소설의 주인공인 스타브로긴은 어쩌면 혁명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로 방탕과 타락의 극치 속에서 어느 소녀를 추행하고, 그 결과 그 소녀의 죽음에 책임이 있지만,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는 그 비밀 앞에서 죄책감을 느껴 스스로를 용서하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찌혼 신부를 찾아가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지만, 구원의 방편을 찾지 못하고 돌아서서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러시아 구 사상의 표징이라고 할 수 있는 스쩨빤 역시 가출을 감행하다 낯선 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그 누구보다도 당당하고 위세가 대단했던 바르바라 부인 역시 아들의 죽음을 목도하고 쓰러지게 된다.

 

등장 인물 모두가 죽음과 좌절로 끝맺는 소설의 결론은 <악령>의 뚜렷한 주제의식을 보여준다. 구원과 혁명, 부활과 재생이란 결국 무엇인가. 가슴에 불을 뿜으며 열광하는 사상, 끝까지 파고드는 이성의 성찰, 집착으로 점철되는 사랑, 위풍당당한 권력, 허세와 과시로 치장된 권위,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죄책감과 번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목적 지향적 행동들, 또렷이 영혼을 구원해내지 못하는 종교적 허상..모든 것이 구원과 혁명을 지향했지만, 결국 모든 것이 한 데 어울어져 파멸과 와해로 합류되어 버리는 그 놀라운 이면을, 작가는 담담하지만 꼼꼼하게 그려냈다.

우리는 우선 혼란 시대를 야기하는 겁니다. 당신에게 이미 이야기했다시피 우리는 국민의 한가운데로 파고드는 겁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도 상당히 우세합니다..중략..백성도 취해 있고, 어머니들도 취해 있고, 아이들도 취했고, 교회는 텅 비어 버렸죠. 아아, 이 새풍조를 좀 더 발전시켜야 합니다. - P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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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계 교수의 철학 이야기 - 탈레스에서 라깡까지, 증보판
강영계 지음 / 서광사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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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분절적으로 마주한 철학의 계보와 좌표를 알고 싶다는 욕망은, 교과서처럼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으면서도 중심 사상의 핵심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책을 읽고 싶다는 욕심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결과적으로, 찾고 있던 책을 정확하게 고른 셈인데, 저자의 안내대로 '서양 철학의 무수한 갈래들을 일관성 있게' 정리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충실하다.

 

첫 장에서 달리를 인용한 철학사의 가치는 이 책의 유용성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철학사를 통해 어떤 시대에 어떤 지역에서 철학의 체계적인 생각들이 전개되었는지 알 수 있고, 어떤 곳에서는 일관성 있는 진보가 있었다면, 어느 지역에서는 왜 단절되었는지 탐구할 수 있으며, 독자적인 철학 사상을 창출하지 못한 연유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과거와 현재의 사고 양태를 반성하고 비판함으로써 미래의 삶과 세계에 대한 개방된 자세를 계획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책은 크게 그리스 철학, 중세 철학, 르네상스 철학, 근세 철학, 독일 관념론, 현대 철학의 6부로 구성되어 있다. 세계의 근본, 신과 윤리, 이성과 경험, 비판 철학, 실존, 언어, 정신분석, 실용주의, 사회주의, 실증주의, 해체, 포스트모더니즘 등을 관통하며 대표적인 철학자와 중심 철학 사상을 간결하게 정리한다.

 

가장 흥미로웠던 장은 아무래도 평소 잘 접하지 못했던 르네상스 철학 부분이었다.  쿠사누스는 우리의 일상적 인식은 피상적이고 부분적 인식으로 결핍된 인식이며 곧 무지로써, 무지의 지혜는 우리가 가진 온갖 지식을 포기하고 파악할 수 없는 방식으로 파악하는 것이 무지에 관한 지혜라고 설파한다. 또한 반대의 일치는 모사와 원화처럼 모든 현상적인 사물은 모사지만, 그 그원은 원화에 두는 일치라고 설명하면서, 반대의 일치에 접근하는 인간은 감각적이고 오성적인 앎에서, 반성의 차원에 이르고, 결국 반성의 반성을 통해 이성적 성찰, 즉 신적 통찰까지 승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파라켈수스는 현실 세계는 육체적, 영혼적, 정신적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고, 세상의 모든 영역은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실체와 관계를 맺고 있어 각 영역에 따라 달리 치료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영적 건강의 개념과도 일선상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브루노는 세계의 구성요소를 단자로 규정하거나 물활론적인 사고를 통해 자연 과학 탄생의 기반을 닦았다. 뵈메는 수축과 분산으로 생기는 회전이나 진동을 통해 물질 세계가 성립하고 높은 단계에서는 사랑, 표현, 영원한 자연, 신의 왕국 등이 성립된다고 보면서 두 단계 사이의 갈등을 섬광으로 표현하고, 이 안에서 인간의 선택할 자유가 주어진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물질 세계에 만족하면서 일상 생활을 영위할 수도, 심연의 의지로 나아갈 수도 있다고 보았다.

 

한 번의 독서로 철학의 갈래을 정리할 수는 없지만, 다른 철학 서적을 읽으면서, 그 좌표와 갈래를 짚어내는 사전처럼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또 특정 철학자의 핵심 사상을 요약해두었기 때문에, 다른 독서를 하기 전 샛길로 새지 않게 하는 울타리 역할도 훌륭하게 감당할 수 있는 책이다.

철학적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원초적 힘은 의심과 경탄이다. 의심이 없는 곳에서는 어떤 문제도 제기되지 않는다. 문제가 제기되어 그것을 해결할 때 우리들은 경탄을 금할 수 없다....중략..과거의 철학사를 암기하는 것은 단순히 일상생활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철학 이야기‘를 의심과 겅탄 속에서 읽으면서 반성하고 비판할 때 ‘철학 이야기‘는 비로소 ‘철학함‘으로 새롭게 싹틀 수 있을 것이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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