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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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변주되고 반복되는 음악과, 결합과 생성을 통해 지속적으로 되풀이되는 영원회귀의 철학은 묘하게 닮아 있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다는 밀란 쿤데라는 영원회귀 속에서는 인생의 잔혹함이나 아름다움 따위는 염두에 둘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면서 모든 것은 처음부터 용서되며 동시에 모든 것은 냉소적으로 허용된다는 판단으로 소설을 시작한다.

 

무거움과 가벼움을 교차시키며 양분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모순이 대비되면서 동시에 조화되는 그 신비함을 파고드는 데서 작가의 문제의식은 제기된다.

 

프라하의 외과의사인 토마시는 끊임없이 여자를 만나지만 정착하지 않는다. 다처주의를 지향하는 그와 달리 연인 테레자는 토마시에게 안착하기를 희구한다. 원치 않는 결혼 생활을 한 테레자의 어머니는 딸을 구박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고, 성장과정에서 존재로써 인정받지 못한 테레자는 끊임없이 불안해 하며 온전한 사랑에 목말라한다. 우연한 사건으로 만나게 된 토마시와 테레자는 연인이 되고 아이러니하게도 테레자는 프라하에 진주한 소련군의 사진을 목숨 걸고 찍으면서 생애 최고의 행복을 누린다.

 

작가는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되며 우연한 사건을 테마로 변형한 후 그것이 반복되고 변화되며 발전된다고 표현하는데, 토마시와 테레자의 삶도 그렇게 흘러간다. 토마시는 당시 체코의 여느 지식인들처럼 체코 작가 동맹의 잡지를 읽다가 자신의 의견을 투고하는 데 그것이 실리면서 내무국과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고, 결국은 의사 대신 유리창 청소 회사의 용역원으로 일하게 된다. 테레자는 우연히 만난 기술자와 욕정에 못이겨 정사를 나누고 토마시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지만, 술취한 경찰에 의해  그가 감시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가벼움을 대변하는 토마시와 무거움을 상징하는 테레자는 실타래처럼 얼킨 삶 속에서 함께 교외로 나갔다가 사고를 당하고 한 자리에서 목숨을 잃는다.

 

또 다른 연인 사비나와 프란츠는 토마시와 테레자의 다른 버젼처럼 그려진다. 사비나는 공산주의가 뒤집어쓰고 있는 아름다운 가면의 그 추함에 대한 혐오감을 근거로 내적 저항을 키워나가는 인물로, 배신과 일탈을 추구한다. 반면 그녀의 연인 프란츠는 전도 유망한 학자이자 주어진 삶의 틀안에서 모범적인 행보를 구가하는 인물로, 열뜬 지식인의 표상처럼 대장정 같은 개념에 열광한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민주주의, 단두대, 사형제도 폐지 같은 이론이 아니라 어떤 것이든 통합하는 대장정 같은 정치적 키치에 열중하며, 대장정이라는 미명하에 캄보디아로 떠나는데, 거기서 대장정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양태로 변모하는지 작가는 놀라울 정도로 적확하게 표현한다.

 

무거움과 가벼움, 역사적 사건과 인간의 상처, 사랑과 배신, 육체와 영혼, 이론과 진영, 우연과 필연, 변주와 반복, 해석과 오해, 판단과 보류..그 숱한 교차점이 어우러지는 생의 한 가운데서 과연 고정되고 올곧은 하나의 길만 허락되어야 하는가.  모순은 조화되고, 대립은 화해하는 영원회귀의 삶이라면, 존재는 무겁지만 동시에 한없이 가벼울 수 있을테다. 히틀러를 통해 유년 시절을 떠올리며 그를 용서하는가 하면, 스탈린 아들의 죽음을 똥과 결부시키는 키치를 통해 이데올로기의 광기를 조롱할 수 있는 가벼움은 고정불변의 일회적 직선관으로는 도무지 간과할  수 없는 행태니까.

 

역사의 상처 속에서 수많은 사연을 안고 쓰러져간 사람들의 삶을 치유하는 방책으로 니체를 인용한 작가는, 스스로가 가장 많이 위로받지 않았을까 싶다.

구약성서의 신화 속에서 성장한 우리에게 전원시란 여전히 낙원의 기억으로 남아 있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천국의 삶은 우리를 미지로 끌고 가는 직선 경주와는 동떨어졌다. 그것은 모험이 아닌 셈이다. 이미 아는 것들 속에서 뱅뱅 도는 삶인 것이다. 그 단조로움은 권태가 아니라 행복이다 - P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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