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정본 C. S. 루이스 클래식
C.S.루이스 지음, 김선형 옮김 / 홍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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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 책을 구상하면서 어떤 성경 말씀을 가장 먼저 떠올렸을까, 책을 덮고 난 후 엉뚱한 상상은 빌라도로 이어졌다. 누군가 내게 주제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무엇이라고 답할 것인지 묻는다면 나는 빌라도의 질문으로 답을 대신할 것 같다. 진리가 무엇이냐. 도대체 진리가 무엇이길래 30대의 젊은 청년이 죽음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그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고 지극히 이성적이면서도 예리한 정치적 판단을 바탕으로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언도한다. 


사탄의 집요하고도 끊임없는 훼방의 목적은 바로 '죄인인 인간의 실존을 깨달아 구원이 필요한 존재'임을 각성하지 못하게 하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속하셨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다시 연결되며 회복되는' 진리를 외면하게 하는 데 있다. 


믿음의 여정에서 마주하는 사탄은,  그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그저 윤리나 도덕의 타락을 인도하는 정도로만 이해하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윤리나 도덕적으로 크게 지탄받을 일 없이 그런대로 인간적 덕성을 유지하는 한, 그 앞에서 죄인된 인간의 실존에서 출발하는 영혼의 문제를 논하는 것은 괜한 분란만 일으키는 논제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전력을 다해 휴머니즘의 실천에 앞장서고 있는데, 느닷없이 죄인이라니 가당하기나 한 말인가. 저자는 사탄의 전략을 풍자하면서, 역설적으로 진리와 함께 진정한 기독교인이 나아가야 할 바를 정확하게 전달한다. 


 조카 사탄 웜우드를 가르치는 삼촌 사탄 스크루테이프는 조카가 맡고 있는 인간-인간을 환자라고 부른다-이 진리에 다다르지 못하도록 다루는 법을 가르치면서 31편의 편지를 쓰는데, 가장 먼저 인간이 실존에 눈을 뜨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데 최선을 두어야 한다고 권고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감각적 경험의 흐름에 시선을 고정하고,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실제의 삶이라고 인식하도록 독려할 것을 주문한다. 참과 진리를 따지지 않도록, 눈 앞에 매일 펼쳐지는 일상성에 매몰되어 미지의 존재를 믿지 못하며 사색하지 못하도록 붙들라고 충고한다. 


  환자가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자, 교회의 건물에 관심을 갖거나 교인들의 결점을 보면서 겸손을 배우지 못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회심을 일종의 심리상태로 간주하도록해야 한다고 첨언한다.  기본적인 의무도 등한시하면서 내면 생활에만 집중하고  주변인들의 죄를 찾아내는 데 혈안이 되도록 몰아야 하며 또한 율례를 실제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만 들여다보면서 의지로 감정을 만들어 내도록 종용할 것을 주문한다. 


  전쟁의 발발 속에서 죽음을 예감하는 곳에서 죽는 것은 오히려 원수-사탄 입장에서는 예수 그리도-쪽에 선 인간들에게는 완전한 준비를 갖추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 되니,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값비싼 요양원에서 마지막까지 제대로 죽음을 환기하지 못하게 하고 죽음이 은폐된 곳에서 맞이하는 죽음이 더 낫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영생으로 나아가야 할 죽음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게 하니 최고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계속되는 편지를 통해 삼촌 사탄은 세부적인 지침을 일러준다. 이웃에게는 악의를 품고 미지의 사람들에게는 선의를 갖게 할 것, 생명력, 성 숭배, 정신 분석 등을 통해 영의 존재를 부정하고 힘이라고 불릴만한 것들을 숭배하도록 할 것, 그리고 악마나 사탄을 희극적인 모습으로 상상하여 그 영향력을 가볍게 여기도록 할 것,  균형을 잃고 극단적인 소집단 속에서 내부인끼리만 서로 칭찬하고 추앙하는 온실 관계를 발전시키는 한편 외부에 대해서는 교만과 증오를 키우도록 할 것, 믿음의 기복을 거치는 순간을 노릴 것, '단계'같은 전문 용어를 활용해 영적 저기압 상태를 진보, 발전, 역사적 관점 같은 몽롱한 환상으로 점철하면서 지적 허영심을 만족시킬 것, 교제권에 따라 다르게 행동하도록 할 것, 경박함을 드리워 미덕이 우스운 것인 양 떠들도록 훈련시킬 것, 아무리 사소한 취미라도 뿌리 뽑아서 순수함, 겸양을 갖거나 몰입하지 못하도록 할 것, 진짜 좋아하는 것들을 버리고 다른 데 관심을 쏟도록 할 것, 겸손은 재능이나 가치를 낮게 보는 것이라고 잘못 인식하도록 할 것. 


허영심과 거짓 겸손을 갖추고 교회를 일종의 사교 클럽으로 여기게 할 것, 자기에게 맞는 교회를 찾아다니도록 하고, 설교자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을 재단하여 가르치게 할 것, 일상에서 제대로 되는 게 없다는 불만을 주입하여 '제대로'를 찾는 여정이 마침내 탐심으로 이어지도록 할 것, 하나의 사물은 다른 사물과 별개- 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식-의 지옥의 철학을 설파하면서 경쟁을 내세울 것, 영성의 제거가 안된다면 부패하도록 수단을 강구할 것, 기독교를 수단으로 이용하도록 할 것.


우리 그리스도인은 다르다는 식의 잘못된 자긍심을 갖도록 해 불신자들의 말을 우습게 여기도록 할 것, 변함 없는 것에 대해 질색하고 새로운 것에만 빠져들게 만들 것, 형식적이고 명목적인 것을 붙드는 비이기주의를 표방하도록 할 것,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적인 교제를 나눈다면서 일용할 양식과 아픈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외면하는 거짓 영성을 추구하게 할 것,  풍요로운 중년기를 보내 세상에서 내 자리를 찾았다는 느낌을 갖도록, 그러므로 과학이든 심리학이든 학문의 발전을 통해 이 땅을 천국으로 만들 날이 올 것이라고 믿게 하면서 경험이 착각의 어머니인데도 모르게 할 것, 소명을 버리고 비겁해지며 미신에 기대게 할 것, 거짓 희망을 갖게 하고 지금까지의 믿음은 환상이라고 착각하도록 할 것, 물리적 사실만 실제라고 믿고, 영적인 것은 주관적인 것이라고 믿게 할 것. 


한 편씩 꼼꼼히 읽다보면  죄의 세밀하고 정교한 그물에 포획된 인간에게 왜 구원이 필요한지 더 명료해지는 것만 같다. 게다가 상당 부분 기독교인으로 입문한 이후에 나타나는 죄의 구체성과 입체성을 기술하고 있어 쓰라린 심정으로 신앙의 좌표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네가 경계해야 할 것은 환자가 현세의 일들을 원수에게 순종할 기회로 삼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세상을 목적으로 만들고 믿음을 수단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 환자를 다 잡은 거나 마찬가지지. 세속적 명분이야 어떤 걸 추구하든지 상관없다. 집회, 팜플렛, 강령, 운동, 대의명분, 개혁운동 따위를 기도나 성례나 사랑보다 중요시하는 인간은 우리 밥이나 다름없어. ‘종교적‘이 되면 될수록(이런 조건에서는) 더 그렇지. 이 아래에는 그런 인간들이 우리 한가득 득실거리는 판이니 원한다면 언제든지 보여주마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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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아버지의 4차원 영재교육
현용수 지음 / 쉐마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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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철학, 방법 등도 시대와 사회에 따라 유행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디폴트값처럼 변하지 않고 인용되는 실례가 있다면 유대인 교육일 것이다. 실생활의 지혜를 강조한다, 질문을 통해 사고의 영역을 넓힌다, 소통을 통해 답을 찾아간다 등등 유대인 교육의 단편적인 특징을 설명한 단견은 많지만, 정작 정통 유대인 교육의 실체를 직접 체험하고, 그 구조와 방식을 교육학적으로 정리한 경우가 흔하지 않기에 이 책의 가치는 더욱 빛나지 않나 싶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가정교육인데, 그 중에서도 아버지의 역할이 강조된다는 점이다. 성경적 가치에 따라 유대인은 아버지는 사상, 힘, 권위의 상징을 가지면서 지식과 사상의 영역을 담당하고, 어머니는 사랑, 정서, 동정의 상징으로 정서의 영역을 관할하는데, 가정의 희망이 되는 자녀들을 위해 아버지는 공급자, 보호자, 인도자, 교육하며 훈계하는 자로, 히브리어는 규정한다. 


아버지는 자녀들의 일차적 스승으로 가정에서 기본적으로 토라를 중심으로 교육하는데, 식사 기간, 절기 교육 등을 통해 공동체의 건강한 일원으로 자라나도록 집중한다. 저자는 직접 유대인 가정 등에서 교육 방법을 관찰하여 정리한 내용을 전달하는데, 아버지는 자녀에게 토라를 가르치는 시간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진지함을 가지고 있으며, 인성교육과 예절교육은 식탁에서 이루어지고, 귀납적 질문 교육 방법을 주로 사용하며, 교사이자 동시에 아버지로서 친근하면서도 부드러운 자세를 가진다고 제시하고 있다.


한편 유대인들은 배움을 중시하고, 공부하는 목적이 뚜렷한데, 첫째는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주신 말씀을 자손 대대로 전수하기 위함이며 둘째,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더 선하고 아름답게 가꾸어야 한다는 목적의식이 분명하다고 증언한다. 


또 다른 유대인 교육의 특징은 4차원 교육으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인지적 교육, 즉 영재교육은 4차원으로 이루어지는데, 1차원 영재교육은 일반학교에서의 세상 학문 교육, 2차원 영재교육은 유대인의 질문식과 탈무드 논쟁식 교육을 통한 IQ 계발, 3차원 영재교육은 영리함, 현명함을 기르는 교육-악인을 피하는 등 실용지식과 관련된 교육으로 이해해도 될 것 같다-4차원 영재교육은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교육 등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다층적 차원의 교육은 오히려 높은 단계에서 낮은 단계로 이루어진다. 성경의 율례와 법도를 배우고 실천하면서 스스로 자기 훈련을 강화하고, 질문과 토론식 교육방법을 통해 그 율례와 법도가 만들어진 이유, 배경, 실천 방법 등을 모색하면서 사고의 깊이와 넓이가 폭발적으로 증강한다. 질문과 토론의 궁극적 결론은 배움의 목적과도 연결되는데, 가령 윤리적 행동의 이유도 하나님의 성품이나 창조의 목적과 연결되면서 생명존중, 공동체주의 등을 학습하게 되고 이는 자연스럽게 인성교육이 된단. 이와 동시에 각 과목이나 학문의 구체적인 철학, 내용도 성경의 토대 위에서 이해하면서 구체성과 확장성을 더해간다. 토론이나 질문식 교육은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고 언어 발달을 촉진하면서 재치와 순발력, 논리 등을 개발하도록 하므로 자연스럽게 몰입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저자의 주장과 연구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일반적인 지식 학습이라고 할 수 있는 수평적 교육과 가치관, 윤리 등을 학습하는 수직적 교육이 매우 적절하게 교차하고 있고, 특히 가정, 학교, 종교(사회, 문화)의 교육이 각각의 역할을 존중하고, 긴밀하게 연계되어 획기적인 교육적 성과를 성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말미에는 우리에게도 가치관, 지혜를 강조하던 수직적 교육 문화가 있었지만, 어느 순간 무너지고 있는 데 대한 안타까움이 넘쳐나는데, 저자의 주장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가정교육의 근간이 흔들리고 지식교육마저 입시에 포획되면서 공회전하고 있는데다, 사회나 문화의 교육은 자취를 감추고 있는 이때, 우리의 교육 철학과 기반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 기초부터 차근차근 체계화하도록 시사점을 준다. 

유대인 부모는 자녀에게 세상 학문인 학교교육부터 시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가장 높은 제4차원의 지혜교육을 먼저 하고, 다음에 제3차원 단계인 슈르드교육을 시키며, 다음 담계에서 제2차원의 질문과 탈무드 논쟁식 IQ계발교육을 한 다음 맨 마지막 단계에서 제1차원의 학교교육을 시킨다.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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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Q정전
루쉰 지음, 전형준 옮김 / 창비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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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유명해서 모두가 읽은 것 같지만, 막상 읽은 이를 돌아보면 손에 꼽을만큼  적은 작품은 수도 없이 많은데, 그 중의 하나가 루쉰의 소설들이 아닐까 싶다. 학창 시절 한 번쯤은 문제풀이용 주제 분석이나 작품 해설을 접한 터라 대강의 내용은 알고 있다는 착각 탓에 각을 잡고 읽어야겠다는 생각은 못했는데, 결과적으로 우연한 기회에 반 강제적으로 읽게 된 행운을 새삼 감사하게 되었다. 


이 책은 <아Q정전>을 대표로 루쉰의 소설을 모아 놓은 소설집인데, 현대 초기 중국 사회의 모습을 묘사했는데도, 우리의 현재 모습을 이전 시대에 미리 다른 각도에서 문학적으로 예견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독성과 재현성이 탁월하다. 역사는 결국 돌고 도는 것이고, 지혜자의 표현대로 삶의 굴레는 반복되는 것이라는 주장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현재의 좌표를 진단하는 내비게이션 같다고 할까. 


<광인일기>는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주인공의 입장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잡아먹으려 한다는 생각을 전개해 나간다. 의사, 심지어는 가족들, 그리고 나아가서는 자신도 식인의 습속으로 살아왔다고 고백하면서 우리 안의 '식인성'을 고발하고 아이들을 구하라는 메시지로 매듭을 짓는다. 


<쿵이지>는 퇴락한 지식인의 모습과 이를 비웃는 사람들의 대조가 주를 이룬다. 새로운 물결에 편승하지 못하고 밀려난 서민들은 낡은 지식에 대한 조롱을 쿵이지에게 쏟아내면서, 은연중에 그나마 술이라도 한 두 푼 지불할 수 있는 자신들의 우위를 자랑한다. 가치의 전복이 이루어지는 단면을 작가는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약>은 일종의 스릴러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는데, 아들의 폐병을 고치고자 한 아버지가 옛 비방대로 극비리에 사람의 피에 적신 만두를 구해 먹이지만, 아들은 죽게 된다. 한편 한 어머니의 아들이 혁명에 가담하는데, 그 아들은 결국 처형-이 시점에서 아버지는 누군가의 피에 적신 만두를 구한다-을 당하고 어느 무덤에 묻힌다. 이 두 아들의 어머니가 같은 무덤에서 만나게 되는데, 죽은 두 아들은 같은 무덤, 반대편 위치에서 만나게 된다. 구습과 혁명의 대조가 피와 죽음을 매개로 얽히면서 비극의 효과가 극대화된다. 


<고향>은 혁명을 꿈꾸던 지식인이 고향으로 돌아와 옛 친구를 만나지만, 어릴 때는 평등했던 친구가 계급적 지위 때문에 옛 우정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직면하게 되는 이야기. 순수했던 친구는 어느새 봉건 문화에 충실한 전형적인 군상으로 변모해 있고, 자신 역시 어정쩡하게 이를 받아들이면서도 아이들에게 막연하게 희망을 거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아Q정전>은 성경의 말씀을 빗대어 말하자면, 근대인의 형상은 갖추었으나 그 내용은 없는 혹은 태생적으로 갖추기 어려웠던 인물을 형상화 하고 있다. 아Q는 새로운 사회적 맥락에 맞게 제대로 된 연애 감정을 표현하지 못해 희롱의 모습으로 구현한다든지, 계급적 한계와 설움을 혁명의 겉모습에 기댄 채 타파할 수 있다고 믿고 행동하지만, 결국은 기득권의 만용과 혁명의 이론적 또는 이념적 체현의 미흡성으로 오히려 엉뚱한 결말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복을 비는 제사>는 자녀를 잃은 샹린댁에게 지식인으로서 사후 세계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자신으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을, <술집에서>는 한 때 혁명을 꿈꾸었던 지식인으로서 고향에 돌아와 남동생의 이장을 진행하지만 유골은 아무 것도 남지 않았고, 한 때 챙겨주려 했던 아순마저 모함에 빠져 죽게 된 사실들을 확인하면서, 한껏 진보를 향해 달렸지만 제 자리를 돌고만 있는 것 같은 상실감과 허무감에 대해 묘사한다. 


<비누>는 보수적인 주인공이 유교에 따른 윤리적 행동을 고수하면서도 자신의 아들에게는 영어를 배우라고 종용하며, 순결을 강조하면서도 거지 소녀에 대한 성적 환상으로 비누를 사서 아내에게 주는 이중성을 고발한다. 


<홍수를 다스리다>는 학문주의와 관료주의의 폐해를 풍자하면서, 홍수를 다스리는 방법이 어떻게 왜곡되고 굴절되는지 익살스럽게 표현한다. 학자의 논평과 분석은 관료들과 연합하여 엉뚱한 사실을 생산하는데, 여기에서의 백미는, 일상의 언어를 학문과 관료의 언어로 치환하는 방법을 모르는 주인공이 얼결에 민중의 대표로 뽑혀 상황을 설명하지만, 소통이 되지 않아 결국은 학문과 관료에 포획되기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는 현장에 대한 진단과 평가의 대목. 이러한 맥락에서 홍수에 대한 진실과 사실은 권좌 앞에서 새롭게 재구성므로, 제대로 된 대처가 될 수 없다. 


<관문 밖으로>는 공자에게 가르침을 주고 그의 행보를 예측할 정도로 뛰어났던 노자를 청빙하여가르침을 받겠다고 아우성을 치지만 정작 노자가 떠나자, 그 내용과 뜻도 모르면서 그가 만든 목찰을 참깨나 만두, 콩처럼 이득을 위해 바꾸어 먹는 데 이용하려는 관료들의 몰이해를 풍자한다. 


루쉰은 사회의 변혁기에 민중, 혁명가, 지식인, 체제의 변환, 지식에 대한 대응 등이 어떻게 변하고 이해되는지 소소한 상징과 소박한 이야기 속에 대담하면서도 사실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러므로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지점은 어떻게 성찰되어야 하고 재평가되어야 하는지 분명한 해답도 제시한다. 

사천 년의 식인의 이력을 가진 나는, 처음에는 몰랐었지만, 이제는 알겠다, 진짜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을! 사람을 먹은 적이 없는 아이들이, 혹시 아직 있을까? 아이들을 구하라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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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찬송이야기 - 은혜와 감동이 있는
김남수 지음 / 아가페북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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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의미와 존재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증거 중 하나가 찬송가가 아닐까.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고난과 절망에 다다랐을 때, 소소해 보이는 일상이 기적임 발견하고 평화를 누리는 기쁨을 새롭게 발견할 때 인간의 인식은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인도된다. 숱한 과학과 철학, 예술과 문학으로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영성으로 마주한 시공간에서 빚어지는 찬송가. 이 책은 찬송가 뒤에 숨겨진 작사가와 작곡가의 삶, 그리고 삽화 등을 통해 찬송가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영성의 가치를 조명한다. 


가장 많이 회자되는 내용은 인생의 역설 앞에서 탄생한 찬송가의 비화다. 사랑하는 자녀가 죽고, 아내와 남편이 떠나며 건강, 명예, 부와 권력이 떠나가서 절망의 끝에서 만난 주님은 놀랍도록 강건한 찬송가를 빚어가는 힘이 되어 주신다. 또 찬송가는 전쟁터에서, 죽음의 문턱에서, 혁명의 전선에서, 새시대의 포효와 함께 불리워졌다는 점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일례로 뜻밖의 사고로 죽음에 이른 젊은 더들리 팅 목서는 아버지에게, 일어나라, 예수님을 위해 일어나라,는 유언을 남겼고, 아버지 스티븐 팅 목사가 이를 기리기 위해 '십자가 군병들아' 찬송가의 모태가 된 시를 작사했다. 죽음에 굴하지 않고 주님 위해 일어서는 십자가 군병의 이미지는 어떤 격랑에도 흔들림 없는 믿음의 굳건함으로 승화된다. 절망과 공포를 딛고 분연히 일어서는 강직함에는 감성으로 점철된 어떤 후회나 좌절의 그림자도 없다. '어떤 상황이 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본분이 무엇인지 각성시키고 분명히 짚어준다. 


처칠과 루즈벨트 대통령이 조약 후 함께 찬송가를 부른 대목, 성부, 성자, 성령의 진리의 말씀을 명백하게 선포하는 찬양, 적군의 총부리를 앞에 두고 찬송가를 불러 목숨을 건졌는데, 집회에서 다시 만나 찬송가로 맺어진 인연, 독일군과 영국군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총을 던져두고 서로 예우하며 성탄절을 화합하며 보낸 삽화, 타이타닉 호의 침몰 시에 갑판 위에서 마지막으로 함께 찬양한 찬송, 노예와 고아와 장애인을 뛰어 넘어 시대를 위로하고 갈 방향을 제시한 찬송가의 힘 등을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언제든지 누구든지 진영과 계급, 시대와 국가를 뛰어넘어 하나의 찬송가를 통해 한 마음이 될 수 있는 서양의 토대가 부럽기도 했다. 


영성의 회복에서부터 삶을 시작하고, 시대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해온 서양 역사의 발자취를 생각하면서 문득 우리에게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함께 찬송가를 부를 수 있다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또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항일 운동을 주도하고, 학교를 짓고 문학을 가다듬어 시대 정신을 주도하면서 우리의 찬송가를 지었던 선각자들의 노력이 자꾸만 후퇴하는 것 같아 독서 내내 부끄럽기도 했다. 

많은 찬송들이 삶의 고난 가운데 믿음을 지켜낸 결과로 태어났습니다. 찬송에 얽힌 이야기는 살아 있는 간증이므로 우리는 이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습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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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 사윌 때
최시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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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으로 움츠렸던 세상이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고 싱싱한 생기가 되살아나니 저절로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코로나 이전이었다면  여행을 떠나 진기한 광경을 보고 색다른 음식을 먹으면서 즐거움을 한껏 고양하고 싶다는 소망에 들떴을 텐데, 무슨 까닭인지 잠잠히 일상을 성찰하며 이어지는 생의 소중함을 다시 돌아보고 싶어졌다. 코로나가 강탈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지속될 것 같던 일상이었기에, 의식 치르듯 제대로 복원해야 한다는 엉뚱한 생각에 빠져들자 허튼 소망은 어느새 속 타는 갈망이 되었다. 소박한 둘레길을 찾아 걷는 것이 꽤 근사한 일처럼 여겨졌고 자연스럽게 전국의 둘레길을 찾아보게 되었다. 


  돌아보면 어떤 운명처럼 임존성 둘레길을 마주한 것 같다. 내포 문화 숲길 백제 부흥군 길에 백제부흥운동의 최후 격전지였던 임존성이 펼쳐진 봉수산이 있고, 백제 사람들의 한과 투혼, 배신과 낙망이 서려 있다는 설명을 읽고 나자, 전투가 일상이었을 그들의 삶을 두고 나만의 평화로운 일상의 복구 의례 계획이 짐짓 부끄럽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는 백제부흥운동의 성쇠가 낯설게 다가와 호기심도 일었다. 역사 시간에 마주했던 숱한 암기의 조각들은 국가의 흥망과 사회상을 단 몇 단어로 일축했고, 그 숨겨진 이면의 삽화에 대해서는 들어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책을 펼쳤을 때, 나는 근래에 보기 드문 집중력을 발휘하는 동시에 임존성 둘레길을 걸으면서 물참의 회고를 직접 듣는 것 같은 상상 속으로 곧장 빠져들었다. 


  이야기는 오서 가문의 서자이자 무사인 물참이 죽은 형의 주검을 찾아 떠나는 3일의 여정이 주요 외관을 이루지만, 그 과정에서 백제부흥운동의 서사, 배신과 불신으로 망한 백제, 당과 신라의 대립, 신라에 망한 고구려의 행보, 어머니의 죽음과 향로의 의미, 국가의 패망을 마주한 다양한 인간 군상 등이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되고 증폭되면서 마침내 조국을 무너뜨린 대적, 신라와 손을 잡는 물참의 각성과 행동으로 이어진다. 


  물참은 백제 부흥을 위해 여러 전투에 참여했으나 나당 연합군에 나라를 잃은 후 갈 길을 잃고 허한 마음을 달랠 길 없던 터에, 고구려 군사들이 당이 오서악 자락에 짓고 있던 도독성을 빼앗을 때 당의 도독부 벼슬아치였던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물참은 형의 죽음에도 놀랐지만, 고구려가 나당에 망한 지 3년이 지났는데도 평양성에서 멀리 떨어진 남쪽 땅까지 내려와 당의 도독부를 빼앗았다는 소식에 의아해한다. 또 회이포에서 떠돌던 배에서 고구려 장정들이 나와 도독성을 쳤다는데 이미 망한 나라인 고구려 배가 도대체 어디서 왔으며 왜 회이포에 머물렀는지 의문을 품으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읽으면서 먼저 주목한 것은 물참의, 전투 목표의 변화에 대한 대목이었다. 소학 대신 절에 보낸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삼국이 수백 년 동안 대립하는 상황에서 집안의 부흥을 위해서는 무공을 거듭 세워야 한다며 물참에게 군사가 되어야 한다고 일갈한다. 아버지의 뜻대로 군사가 된 물참은 숱한 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어쩌면 그는 처음에는 군사이니 당연히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면서도 어린 혈기에 무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로 여겼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전쟁의 참상을 마주하면서 물참은 점차 변모하는 모습을 보인다. 임존성 전투 얼마 후에 의자왕과 왕족, 아버지와 형 일가까지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전쟁에 패한 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삶을 두고 괴로워한다. 그럼에도 백제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죽어가는 많은 병사들을 보면서 당당히 죽기를 다짐했던 그는, 정무 좌평이 흑치상지 장군에게 남몰래 자신을 보냈을 때 충성을 다하지만, 흑치상지 장군의 배신과 조정의 갈등, 왕의 질투와 오판을 목도하면서 전쟁의 명을 내리는 엄위한 조국의 민낯을 마주한다. 


   전쟁으로 와해된 세계에서 그는, 어머니의 고향으로 떠나 그저 섬에서 하릴없이 젊은이 몇에게 글과 무기 다루는 법이나 가르치며 소일하는데, 명을 내릴 이들이 이제 없고 이로써 나라가 사라졌다고 믿었기에 더 이상 버틸 무언가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형의 주검을 찾으러 간 도독성이, 망했다던 고구려군에 의해 실제로 장악된 실상을 확인하고 고구려와 신라가 연합하여 당에 대항하는 형세를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스승을 만나고, 죽었다던 형과 천득, 수탈되는 백성 등을 마주하면서 새로운 인식에 눈을 뜬다. 당과 신라의 전쟁을 누가 이기든 상관없는 적들의 싸움이 아니라, 신라, 고구려, 백제가 함께 당을 물리치며 새로운 공동체로 거듭나는 전쟁으로 의미화하면서 자신의 전투로 변용하는 데까지 이른다. 날 선 현장에 선 물참의 의식이 한 개인과 가문을 넘어서서 마침내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며 후손에게까지 확장되는 과정은, 일상에만 열떠 있어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옅은 인식의 내게는 예리한 일침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한편 읽는 내내, 자연스럽게 국가란 무엇이며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자맥질하듯 끊임없이 떠올랐다. 평소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의제였는데, 물참과 백제가 서 있는 끝자락에 함께 서고 보니 결코 비껴갈 수 없는 질문이었다. 역사는 국가가 마치 지배층의 전유물인 것처럼 마지막 전투에서 지고 지배층이 해제되자 백제가 패망한 것으로 확정하지만, 소설 속에서는 여전히 백제가 살아있다. 물참과 구디들, 그리고 백제의 백성은 멸망 이후에도 생을 이어 나가고, 물참 무리는 나당 전쟁에 백제의 이름으로 나아가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며 백성의 안존과 영속을 도모한다. 그들의 것이 아니라 나와 우리의 국가로 새롭게 인식한 이들의 생생한 분투는, 국가에 대한 관념을 새롭게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더불어 물참과 대척점에 섰던 형처럼 자기 재산과 가문을 지키는 데 국가를 이용하거나, 천득과 같이 당장 현의 이득을 셈하고 왜로 떠나는 이들을 위해 배 사업을 하면서 국가 따위야 어찌 되었든 크게 염두에 두지 않는 군상들을 훑으면서, 현재의 나 역시 그들의 주변에 서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몰락한 백제의 현실, 고구려와 신라 연합의 정치적 지형이 물참의 각성과 결단을 불러온 현실적인 이유였다면, 그의 기치를 드높인 이상적 명분은 누가 뭐래도 소설을 관통하며 현실 이상의 그 무엇을 줄곧 이야기하며 지향한 어머니와 스승의 공로가 아닐까 싶다. 


  어머니는 목숨을 잃어가면서도 향로에 대해 집착하는데, 사람과 가까운 천지의 신령이신 검님들이 이루고, 또 사는 세상을 보여주는 신물이라고 일러준다. 어머니는 칼은 목숨붙이에 거역하는 물건일 뿐 신령은 만물을 어여삐 여기고 돌보시기에 작은 것에도 그들이 깃들여 있다고 굳게 믿는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도 있으며 이를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며 전쟁에서 상처 입은 이들의, 보이지 않지만 맺힌 심상을 바로 보며 위로한다. 


  스승 역시 백제와 고구려가 한 핏줄이라면서도 복수를 주고받는 인과응보를 끊어야 하며 시절이 허락하고 마음이 모이면 누구든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고 일러준다. 묵자를 인용하면서 천하가 모두 하늘의 고을이고 사람도 모두 가림 없이 하늘의 신하 이며 나라도 얼마든지 없어지고 새로 생길 수 있기에, 사람이 구별한 나라의 이름에 집착하지 않도록 가르친다. 더 가지고 지배하려 드니까 싸우고 죽이지만, 약하고 작더라도 숨탄 것들을 알뜰히 보살피는 마음을 잃지 말라고 강조한다. 


  어머니와 스승은 전쟁의 허망한 본질을 꿰뚫어 보며, 국가를 넘어서서 생명을 소중히 하는 정신적 승화의 필요성을 물참에게 일깨운다. 다스림과 지배를 향한 탐욕에서 벗어나 생의 경이와 존중을 위해 보다 높고 숭고한 뜻으로 나아가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가르침은 결과적으로 백제, 고구려, 신라가 뜻을 모으고 공동체 의식을 공유하는 근본으로 이어진다. 이로써 물참의 진격은 얕은 협잡의 발로가 아니라 하늘의 뜻을 향한 위대한 전진으로 발돋움한다. 


  이는 자국 이기주의로 치닫는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북한과 마주 서 있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떻게 통일이 가능할까. 정치적 계산이나 현실적 판단을 뛰어넘어 먼저 군림의 욕망을 접고 새로운 한반도 공동체에 대한 소망을 함께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백제의 패망을 뛰어넘어 통일로 나아가는 물참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독서의 즐거움뿐만 아니라 일상의 새로운 의미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의 끝없는 분투로 주어진 현재의 삶은 얼마나 놀라운 좌표인가. 또 무엇보다 생명의 선거움을 벼리 삼아 물참이 그러했듯, 더디더라도 이제 일상은 나에게서 너에게로, 그리고 공동체로 확산되는 단초가 되어야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나라 역시 변한다. 세계화의 물결이 거센 오늘날, 나라 혹은 국가는 국경과 공동체 의식이 흐렸던 고대의 어느 시기와 비슷해져가고 있다. 지금 한국인은 또다시 나뉜 나라의 통일을 위해, 예전처럼 칼과 활을 들 것인가 -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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