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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 사윌 때
최시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9월
평점 :
코로나 팬데믹으로 움츠렸던 세상이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고 싱싱한 생기가 되살아나니 저절로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코로나 이전이었다면 여행을 떠나 진기한 광경을 보고 색다른 음식을 먹으면서 즐거움을 한껏 고양하고 싶다는 소망에 들떴을 텐데, 무슨 까닭인지 잠잠히 일상을 성찰하며 이어지는 생의 소중함을 다시 돌아보고 싶어졌다. 코로나가 강탈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지속될 것 같던 일상이었기에, 의식 치르듯 제대로 복원해야 한다는 엉뚱한 생각에 빠져들자 허튼 소망은 어느새 속 타는 갈망이 되었다. 소박한 둘레길을 찾아 걷는 것이 꽤 근사한 일처럼 여겨졌고 자연스럽게 전국의 둘레길을 찾아보게 되었다.
돌아보면 어떤 운명처럼 임존성 둘레길을 마주한 것 같다. 내포 문화 숲길 백제 부흥군 길에 백제부흥운동의 최후 격전지였던 임존성이 펼쳐진 봉수산이 있고, 백제 사람들의 한과 투혼, 배신과 낙망이 서려 있다는 설명을 읽고 나자, 전투가 일상이었을 그들의 삶을 두고 나만의 평화로운 일상의 복구 의례 계획이 짐짓 부끄럽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는 백제부흥운동의 성쇠가 낯설게 다가와 호기심도 일었다. 역사 시간에 마주했던 숱한 암기의 조각들은 국가의 흥망과 사회상을 단 몇 단어로 일축했고, 그 숨겨진 이면의 삽화에 대해서는 들어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책을 펼쳤을 때, 나는 근래에 보기 드문 집중력을 발휘하는 동시에 임존성 둘레길을 걸으면서 물참의 회고를 직접 듣는 것 같은 상상 속으로 곧장 빠져들었다.
이야기는 오서 가문의 서자이자 무사인 물참이 죽은 형의 주검을 찾아 떠나는 3일의 여정이 주요 외관을 이루지만, 그 과정에서 백제부흥운동의 서사, 배신과 불신으로 망한 백제, 당과 신라의 대립, 신라에 망한 고구려의 행보, 어머니의 죽음과 향로의 의미, 국가의 패망을 마주한 다양한 인간 군상 등이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되고 증폭되면서 마침내 조국을 무너뜨린 대적, 신라와 손을 잡는 물참의 각성과 행동으로 이어진다.
물참은 백제 부흥을 위해 여러 전투에 참여했으나 나당 연합군에 나라를 잃은 후 갈 길을 잃고 허한 마음을 달랠 길 없던 터에, 고구려 군사들이 당이 오서악 자락에 짓고 있던 도독성을 빼앗을 때 당의 도독부 벼슬아치였던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물참은 형의 죽음에도 놀랐지만, 고구려가 나당에 망한 지 3년이 지났는데도 평양성에서 멀리 떨어진 남쪽 땅까지 내려와 당의 도독부를 빼앗았다는 소식에 의아해한다. 또 회이포에서 떠돌던 배에서 고구려 장정들이 나와 도독성을 쳤다는데 이미 망한 나라인 고구려 배가 도대체 어디서 왔으며 왜 회이포에 머물렀는지 의문을 품으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읽으면서 먼저 주목한 것은 물참의, 전투 목표의 변화에 대한 대목이었다. 소학 대신 절에 보낸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삼국이 수백 년 동안 대립하는 상황에서 집안의 부흥을 위해서는 무공을 거듭 세워야 한다며 물참에게 군사가 되어야 한다고 일갈한다. 아버지의 뜻대로 군사가 된 물참은 숱한 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어쩌면 그는 처음에는 군사이니 당연히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면서도 어린 혈기에 무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로 여겼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전쟁의 참상을 마주하면서 물참은 점차 변모하는 모습을 보인다. 임존성 전투 얼마 후에 의자왕과 왕족, 아버지와 형 일가까지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전쟁에 패한 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삶을 두고 괴로워한다. 그럼에도 백제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죽어가는 많은 병사들을 보면서 당당히 죽기를 다짐했던 그는, 정무 좌평이 흑치상지 장군에게 남몰래 자신을 보냈을 때 충성을 다하지만, 흑치상지 장군의 배신과 조정의 갈등, 왕의 질투와 오판을 목도하면서 전쟁의 명을 내리는 엄위한 조국의 민낯을 마주한다.
전쟁으로 와해된 세계에서 그는, 어머니의 고향으로 떠나 그저 섬에서 하릴없이 젊은이 몇에게 글과 무기 다루는 법이나 가르치며 소일하는데, 명을 내릴 이들이 이제 없고 이로써 나라가 사라졌다고 믿었기에 더 이상 버틸 무언가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형의 주검을 찾으러 간 도독성이, 망했다던 고구려군에 의해 실제로 장악된 실상을 확인하고 고구려와 신라가 연합하여 당에 대항하는 형세를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스승을 만나고, 죽었다던 형과 천득, 수탈되는 백성 등을 마주하면서 새로운 인식에 눈을 뜬다. 당과 신라의 전쟁을 누가 이기든 상관없는 적들의 싸움이 아니라, 신라, 고구려, 백제가 함께 당을 물리치며 새로운 공동체로 거듭나는 전쟁으로 의미화하면서 자신의 전투로 변용하는 데까지 이른다. 날 선 현장에 선 물참의 의식이 한 개인과 가문을 넘어서서 마침내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며 후손에게까지 확장되는 과정은, 일상에만 열떠 있어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옅은 인식의 내게는 예리한 일침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한편 읽는 내내, 자연스럽게 국가란 무엇이며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자맥질하듯 끊임없이 떠올랐다. 평소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의제였는데, 물참과 백제가 서 있는 끝자락에 함께 서고 보니 결코 비껴갈 수 없는 질문이었다. 역사는 국가가 마치 지배층의 전유물인 것처럼 마지막 전투에서 지고 지배층이 해제되자 백제가 패망한 것으로 확정하지만, 소설 속에서는 여전히 백제가 살아있다. 물참과 구디들, 그리고 백제의 백성은 멸망 이후에도 생을 이어 나가고, 물참 무리는 나당 전쟁에 백제의 이름으로 나아가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며 백성의 안존과 영속을 도모한다. 그들의 것이 아니라 나와 우리의 국가로 새롭게 인식한 이들의 생생한 분투는, 국가에 대한 관념을 새롭게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더불어 물참과 대척점에 섰던 형처럼 자기 재산과 가문을 지키는 데 국가를 이용하거나, 천득과 같이 당장 현의 이득을 셈하고 왜로 떠나는 이들을 위해 배 사업을 하면서 국가 따위야 어찌 되었든 크게 염두에 두지 않는 군상들을 훑으면서, 현재의 나 역시 그들의 주변에 서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몰락한 백제의 현실, 고구려와 신라 연합의 정치적 지형이 물참의 각성과 결단을 불러온 현실적인 이유였다면, 그의 기치를 드높인 이상적 명분은 누가 뭐래도 소설을 관통하며 현실 이상의 그 무엇을 줄곧 이야기하며 지향한 어머니와 스승의 공로가 아닐까 싶다.
어머니는 목숨을 잃어가면서도 향로에 대해 집착하는데, 사람과 가까운 천지의 신령이신 검님들이 이루고, 또 사는 세상을 보여주는 신물이라고 일러준다. 어머니는 칼은 목숨붙이에 거역하는 물건일 뿐 신령은 만물을 어여삐 여기고 돌보시기에 작은 것에도 그들이 깃들여 있다고 굳게 믿는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도 있으며 이를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며 전쟁에서 상처 입은 이들의, 보이지 않지만 맺힌 심상을 바로 보며 위로한다.
스승 역시 백제와 고구려가 한 핏줄이라면서도 복수를 주고받는 인과응보를 끊어야 하며 시절이 허락하고 마음이 모이면 누구든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고 일러준다. 묵자를 인용하면서 천하가 모두 하늘의 고을이고 사람도 모두 가림 없이 하늘의 신하 이며 나라도 얼마든지 없어지고 새로 생길 수 있기에, 사람이 구별한 나라의 이름에 집착하지 않도록 가르친다. 더 가지고 지배하려 드니까 싸우고 죽이지만, 약하고 작더라도 숨탄 것들을 알뜰히 보살피는 마음을 잃지 말라고 강조한다.
어머니와 스승은 전쟁의 허망한 본질을 꿰뚫어 보며, 국가를 넘어서서 생명을 소중히 하는 정신적 승화의 필요성을 물참에게 일깨운다. 다스림과 지배를 향한 탐욕에서 벗어나 생의 경이와 존중을 위해 보다 높고 숭고한 뜻으로 나아가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가르침은 결과적으로 백제, 고구려, 신라가 뜻을 모으고 공동체 의식을 공유하는 근본으로 이어진다. 이로써 물참의 진격은 얕은 협잡의 발로가 아니라 하늘의 뜻을 향한 위대한 전진으로 발돋움한다.
이는 자국 이기주의로 치닫는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북한과 마주 서 있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떻게 통일이 가능할까. 정치적 계산이나 현실적 판단을 뛰어넘어 먼저 군림의 욕망을 접고 새로운 한반도 공동체에 대한 소망을 함께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백제의 패망을 뛰어넘어 통일로 나아가는 물참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독서의 즐거움뿐만 아니라 일상의 새로운 의미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의 끝없는 분투로 주어진 현재의 삶은 얼마나 놀라운 좌표인가. 또 무엇보다 생명의 선거움을 벼리 삼아 물참이 그러했듯, 더디더라도 이제 일상은 나에게서 너에게로, 그리고 공동체로 확산되는 단초가 되어야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나라 역시 변한다. 세계화의 물결이 거센 오늘날, 나라 혹은 국가는 국경과 공동체 의식이 흐렸던 고대의 어느 시기와 비슷해져가고 있다. 지금 한국인은 또다시 나뉜 나라의 통일을 위해, 예전처럼 칼과 활을 들 것인가 -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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