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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Q정전
루쉰 지음, 전형준 옮김 / 창비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너무 유명해서 모두가 읽은 것 같지만, 막상 읽은 이를 돌아보면 손에 꼽을만큼 적은 작품은 수도 없이 많은데, 그 중의 하나가 루쉰의 소설들이 아닐까 싶다. 학창 시절 한 번쯤은 문제풀이용 주제 분석이나 작품 해설을 접한 터라 대강의 내용은 알고 있다는 착각 탓에 각을 잡고 읽어야겠다는 생각은 못했는데, 결과적으로 우연한 기회에 반 강제적으로 읽게 된 행운을 새삼 감사하게 되었다.
이 책은 <아Q정전>을 대표로 루쉰의 소설을 모아 놓은 소설집인데, 현대 초기 중국 사회의 모습을 묘사했는데도, 우리의 현재 모습을 이전 시대에 미리 다른 각도에서 문학적으로 예견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독성과 재현성이 탁월하다. 역사는 결국 돌고 도는 것이고, 지혜자의 표현대로 삶의 굴레는 반복되는 것이라는 주장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현재의 좌표를 진단하는 내비게이션 같다고 할까.
<광인일기>는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주인공의 입장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잡아먹으려 한다는 생각을 전개해 나간다. 의사, 심지어는 가족들, 그리고 나아가서는 자신도 식인의 습속으로 살아왔다고 고백하면서 우리 안의 '식인성'을 고발하고 아이들을 구하라는 메시지로 매듭을 짓는다.
<쿵이지>는 퇴락한 지식인의 모습과 이를 비웃는 사람들의 대조가 주를 이룬다. 새로운 물결에 편승하지 못하고 밀려난 서민들은 낡은 지식에 대한 조롱을 쿵이지에게 쏟아내면서, 은연중에 그나마 술이라도 한 두 푼 지불할 수 있는 자신들의 우위를 자랑한다. 가치의 전복이 이루어지는 단면을 작가는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약>은 일종의 스릴러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는데, 아들의 폐병을 고치고자 한 아버지가 옛 비방대로 극비리에 사람의 피에 적신 만두를 구해 먹이지만, 아들은 죽게 된다. 한편 한 어머니의 아들이 혁명에 가담하는데, 그 아들은 결국 처형-이 시점에서 아버지는 누군가의 피에 적신 만두를 구한다-을 당하고 어느 무덤에 묻힌다. 이 두 아들의 어머니가 같은 무덤에서 만나게 되는데, 죽은 두 아들은 같은 무덤, 반대편 위치에서 만나게 된다. 구습과 혁명의 대조가 피와 죽음을 매개로 얽히면서 비극의 효과가 극대화된다.
<고향>은 혁명을 꿈꾸던 지식인이 고향으로 돌아와 옛 친구를 만나지만, 어릴 때는 평등했던 친구가 계급적 지위 때문에 옛 우정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직면하게 되는 이야기. 순수했던 친구는 어느새 봉건 문화에 충실한 전형적인 군상으로 변모해 있고, 자신 역시 어정쩡하게 이를 받아들이면서도 아이들에게 막연하게 희망을 거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아Q정전>은 성경의 말씀을 빗대어 말하자면, 근대인의 형상은 갖추었으나 그 내용은 없는 혹은 태생적으로 갖추기 어려웠던 인물을 형상화 하고 있다. 아Q는 새로운 사회적 맥락에 맞게 제대로 된 연애 감정을 표현하지 못해 희롱의 모습으로 구현한다든지, 계급적 한계와 설움을 혁명의 겉모습에 기댄 채 타파할 수 있다고 믿고 행동하지만, 결국은 기득권의 만용과 혁명의 이론적 또는 이념적 체현의 미흡성으로 오히려 엉뚱한 결말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복을 비는 제사>는 자녀를 잃은 샹린댁에게 지식인으로서 사후 세계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자신으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을, <술집에서>는 한 때 혁명을 꿈꾸었던 지식인으로서 고향에 돌아와 남동생의 이장을 진행하지만 유골은 아무 것도 남지 않았고, 한 때 챙겨주려 했던 아순마저 모함에 빠져 죽게 된 사실들을 확인하면서, 한껏 진보를 향해 달렸지만 제 자리를 돌고만 있는 것 같은 상실감과 허무감에 대해 묘사한다.
<비누>는 보수적인 주인공이 유교에 따른 윤리적 행동을 고수하면서도 자신의 아들에게는 영어를 배우라고 종용하며, 순결을 강조하면서도 거지 소녀에 대한 성적 환상으로 비누를 사서 아내에게 주는 이중성을 고발한다.
<홍수를 다스리다>는 학문주의와 관료주의의 폐해를 풍자하면서, 홍수를 다스리는 방법이 어떻게 왜곡되고 굴절되는지 익살스럽게 표현한다. 학자의 논평과 분석은 관료들과 연합하여 엉뚱한 사실을 생산하는데, 여기에서의 백미는, 일상의 언어를 학문과 관료의 언어로 치환하는 방법을 모르는 주인공이 얼결에 민중의 대표로 뽑혀 상황을 설명하지만, 소통이 되지 않아 결국은 학문과 관료에 포획되기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는 현장에 대한 진단과 평가의 대목. 이러한 맥락에서 홍수에 대한 진실과 사실은 권좌 앞에서 새롭게 재구성므로, 제대로 된 대처가 될 수 없다.
<관문 밖으로>는 공자에게 가르침을 주고 그의 행보를 예측할 정도로 뛰어났던 노자를 청빙하여가르침을 받겠다고 아우성을 치지만 정작 노자가 떠나자, 그 내용과 뜻도 모르면서 그가 만든 목찰을 참깨나 만두, 콩처럼 이득을 위해 바꾸어 먹는 데 이용하려는 관료들의 몰이해를 풍자한다.
루쉰은 사회의 변혁기에 민중, 혁명가, 지식인, 체제의 변환, 지식에 대한 대응 등이 어떻게 변하고 이해되는지 소소한 상징과 소박한 이야기 속에 대담하면서도 사실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러므로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지점은 어떻게 성찰되어야 하고 재평가되어야 하는지 분명한 해답도 제시한다.
사천 년의 식인의 이력을 가진 나는, 처음에는 몰랐었지만, 이제는 알겠다, 진짜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을! 사람을 먹은 적이 없는 아이들이, 혹시 아직 있을까? 아이들을 구하라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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