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의 신화 읽는 시간 - 신화에서 찾은 '다시 나를 찾는 힘'
구본형 지음 / 와이즈베리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시간이 지날수록 중요한 것은 은유와 비유로 말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직접적이고 명확한 개념들이 주는 사실이 결코 진실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해야 할까. 


역사가 신화가 되고, 신화가 역사가 되는 것은, 그 사실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관점의 문제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일견 공감하게 된다. 


신화는 단순히 다양한 신들의 개성 또는 그들의 서로 뒤엉킨 관계를 추적하는 재미있는 이야기로 치부되거나, 길고 복잡한 신들의 이름을 우아하게 부르면서 잰체하기에 좋은 소재 정도로 여겨지는 게 일반이라면, 이 책은 인간이 가진 본성, 인생에서 마주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을 풀어내는 수단으로서 그리스 신화를 한껏 활용한다. 


게다가 신화의 교훈을 적용하는 일차 독자를 자신으로 삼고 있다는 데서 탁월함이 돋보인다. 저자가 이 책을 쓰던 당시에는 미처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훗날의 독자로서는, 비교적 빨리 찾아온 작가의 소천을 생각해보면, 그의 치열했던 중년에 대한 존경은 물론, 신화로 자신을 걸러내며 바른 삶을 갈망했던 그 의지를 반추하게 되면서, 더욱 책에 몰입하게 된다. 


저자의 꼼꼼함은 책의 차례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신화의 주인공들과 그들이 드러내는 가친 및 의미를 함축하면서도 본인의 사색과 연결되는 지점을 대응시켜 소제목을 붙여놓았다. 이러한 배열 덕분에 언급되는 다양한 주인공들을 한 눈에 헤아려보는 동시에 신화가 말하고자 하는 목적과 그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어떻게 다루어질런지 가늠해볼 수 있다. 


본문에서는 신화의 본래 이야기를 충실하게 다루면서도 문학, 미술, 예술가들의 삽화 등을 배치하여 깊이 있는 이해를 돕도록 구성했다. 그리고 신화경영의 모토를 내세운 책답게 마지막에는 다짐이나 소회 등을 덧붙였다. 


책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하나의 주제에 대하여 다양한 분야와 융합하고 통섭하는 과정을 통해 이야기를 빚어가고, 그 결과를 교훈이나 전략으로 연결해가는, '독법'의 방식을 배운 것 같다. 

이 책을 통해서 나는 판도라라는 인간의 마음상자를 뛰쳐나간 나쁜 것들, 조직세포 하나하나가 갈망하는 육욕의 냄새를 신화 속에서 하나씩 채집해보려 한다. 원초적 본질인 그것들, 깊숙이 숨겨둔 신들의 축복과 저주, 사람들의 얽힌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온갖 종류의 작동 원리를 탐험해보려 한다. 지금 어떠한 삶 속에 있든지 우리는 살아내야 할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 희망이 등불이 되어 우리를 이끈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이 우리를 낫게 하고, 우리를 타락하게 한 것이 우리를 청결하게 하고, 단명한 것이 영원으로 우리를 구원한다. 그래서 중국 선불교의 육조 혜능은 기가 막힌 명언 하나를 남겨두었다. 우리의 순수한 정신은 타락한 정신 속에 있다. - P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마 황제처럼 생각하는 법 - 스토아주의자는 어떻게 위대한 황제가 되었을까
도널드 로버트슨 지음, 석기용 옮김 / 황금거북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분야가 접목되고, 각 분야의 관점에서 서로를 투사할 때 나타나는 생경한 시각은 그 어떤 것보다 흥미롭고 창조적이다. 


살아갈 수록 당혹스럽고 불안이 가중될 수 밖에 없기에, 어떻게 하면 평온하게 흔들림 없이 살 수 있을까, 하는 관심 때문일까, 사회적으로도 자연스럽게 정신의학, 심리치료에 대한 초관심으로 이어진 것 같다. 근래 들어 인지 행동 치료는 이성적인 인간의 면모를 드높여 인간의 품위를 지켜내는 데 발군의 역량을 발휘했기에 더욱 관심이 쏠린 듯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독자 입장에서 쉽게 이해하면서도 스스로 실천하도록 독려하는 책을 찾기란 난망했다.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은 명상록의 저자이자 로마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삶을 훑으면서, 스토아주의자였던 그가 어떻게 삶 속에서 정진해 왔는지 소개하고 스토아 철학의 핵심을 설명하는 한편, 거기에 대비되는 인지 행동 치료의 실제 기술을 교차시켜, 자연스럽게 저자의 의도를 강조하고 중첩시키는 데 있다. 이 작업은 매우 자연스럽게 전개되어 어느 순간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인지 치료 기술을 미리 알고 스스로에게 적용한 것은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다. 


저자는 서문에서 심각한 정서적 문제에 대한 예방적 접근을 위해서는 스토아 철학과 인지 행동 치료의 조합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책 전반에 걸쳐 이 목적의 방향성을 잃지 않는 것도 유익한다. 


먼저 스토아주의자의 특징으로, 이들은 인간이 성숙해질수록 자신의 이성 능력과 일체가 되며 타인과도 일체가 되기 시작한다고 믿었고, 인간의 좋은 감정을, 지혜와 덕이 있는 삶으로부터 얻는 희열과 평화, 양심, 명예, 존엄, 고결 등과 같이 악덕을 혐오하는 건강한 감정, 우정, 친절, 선의를 통해 본인과 타인을 돕고자 하는 욕망 등 세 가지로 구분하면서, 불합리한 욕망이나 바르지 않은 쾌락을 이들 좋은 감정들로 교체해야 한다고 믿었다는 점에 대해 소개한다.  


스토아주의에서는 어떤 불안이나 위기가 주는 첫 인상을 원형적 정념이라고 하는데, 이 때 중요한 것은 이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선택하는 것으로, 수사학적 표현에 주목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수사학적인 덕, 정확한 문법과 풍부한 어휘, 표현의 명료성, 필요 이상의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간결성, 표현 양식의 적절성, 저속함을 회피하고 예술적 우수성을 추구하는 탁월성에 주목한다. 상황에 대한 적확한 표현은 원형적 정념에 무방비로 휩쓸리는 것을 막아준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과장된 가치판단을 회피하고 파국화가 아니라 탈파국화하기로 전환하게 하며, 마침내 생각에 대한 생각, 메타인지를 통해 인지적인 거리두기가 가능해져 '정화'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을 익히는 데 주요한 전략으로 마르쿠스가 실천한 글쓰기와 상상하기를 권고한다. 또한 자신의 가치관에 부합한 일관된 삶을 위하여 스토아주의자들이 중시했던 명상을 권유한다. 이 때의 핵심이 '가치명료화'인데, 내 삶에서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내가 죽은 후에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로 기억되고 싶은가, 내 묘비에 어떤 비문이 써지기를 원하는가 등 소크라테스의 문답처럼 가치 기준을 성찰하도록, 질문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함으로써 실천에 옮길 수 있다는 것이다. 


마르쿠스는 현명한 사람이 얻는 삶의 궁극적인 환희는 덕에 부합되는 일관된 행동으로부터 나온다고 단언하면서 자신과 타인의 덕을 사색하고 자신의 운명을 환대함으로써 이를 성취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고통의 극복 방법에 대해서는 인지적 거리두기, 기능적 분석, 객관적 표상, 분석에 의한 가치저감, 유한성과 비영속성 사색하기, 덕을 사색하기 등을 설명한다. 또한 역경을 미리 사색하고, 정서를 습관하는 방법의 중요성도 강조하고 있다. 


분노에 대해서도 자기 탐색, 인지적 거리두기, 유예, 덕 모델링, 기능적 분석을 토대로 인간은 서로 돕는 존재라는 점, 한 사람의 성격을 전체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점, 아무도 완벽하지 않으며 일부러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점, 다른 사람의 동기를 확신할 수 없으며 우리 모두가 죽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는 점, 우리를 망치는 것은 스스로의 판단이며, 분노는 우리를 해롭게 하고, 자연은 이미 우리에게 분노를 대처할 수 있는 덕을 주었다는 점, 다른 사람이 완벽하기를 바라는 것은 미친 생각이라는 점 등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은 인지 행동 치료가 단순한 기술적 실천이나 방법론이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과 세계에 대한 폭넓은 인식에 바탕을 둔 철학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스토아 철학은 이성을 발휘하는 인간을 넘어서서, 신과 교통하는 인간으로서의 바른 삶을 지향하는 영성을 가진 인간과도 연결될 수 있을 것 같다. 총체적인 인간이라는 관점 대신 단순히 기술과 방법을 투영하는 기계론적 인간에 대한 접근이 강화되는 요즘, 대담한 통찰력을 제공하므로 더욱 반갑다. 

아도는 이런 철학적 수행들을 초기 기독교의 영적 훈련들에 비교했다. 정신 요법 치료사로서 나는 그가 확인한 철학적 혹은 영적 훈련들 대부분이 현대 심리치료의 심리적 훈련들에 비견된다는 사실을 즉각 알아챘다. 실제로 스토아주의는 가장 명시적으로 치유를 지향하고 있으며, 자유로이 활용할 수 있는 심리 기법들로 꽉 찬 가장 큰 설비 혹은 공구통을 갖춘 고대 서양 철학의 학파였다는 것이 내 눈에는 보자마자 명백해졌다 - P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5분 뚝딱 철학 : 생각의 역사 - 2021년 올해의 청소년 교양도서 선정, 2021 세종도서 교양부문 5분 뚝딱 철학 : 생각의 역사 1
김필영 지음 / 스마트북스 / 202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철학 분야의 책을 읽다 보면, 지도나 연표처럼 계보와 분류를 한 눈에 나누어 내가 지금 어디를 읽고 있으며 무엇과 연결되고 대비되는지 알고 싶은 욕구가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된다. 전공자가 아닌 이상, 그리고 충분한 시간과 여유가 없는 이상 스스로 터득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데, 이런 맥락에서 이 책의 진가는 발휘된다. 


운동을 하다가 우연히 유튜브를 보면서 컨텐츠를 보게 되었는데, 광고를 통해 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에 바로 구매를 해 읽었다. 


이 책은 서문에서 일종의 철학사 지도를 제공한다. 철학의 세 분야인 진, 선, 미를 구분한 후 이성과 지성의 진에서는 존재론, 인식론, 논리학, 과학철학, 수학철학, 언어 철학을, 의지와 도덕의 선에서는 윤리학, 종교철학, 정치철학, 심리학을, 욕구와 욕망의 미에서는 미학의 분과로 분류하여 제시한다. 그리고 다시 고대, 중세, 근대, 현대의 시대적 구분과 교차하여 각각의 주요 주제와 문제 제기, 그리고 대표하는 사상가를 표로 도식화하고 있는데, 저자의 주장대로 철학과 친해지는 공부 방법의 근간이 된다. 또한 철학은 생각을 명료화하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의견에도 공감하게 된다. 


철학의 방대한 분과를 비교하거나 대조하면서 짧지만 굵게 훑는 장점이 있다 보니, 전반적인 부분을 살펴볼 수 있는 장점이 있는데, 흥미로웠던 분야는 아무래도 생소했던 과학, 수학, 언어 철학 등이었다. 


인공지능은 생각하는 것인가, 이 논란은 앞으로 논의가 확대될 수 있는 문제라는 생각이 드는데, 튜링은 어떤 사람이 채팅에서 상대가 인간인지 인공지능인지 분별할 수 없다면 생각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존 설은 일종의 중국어 방에 중국어를 모르는 어떤 사람이 있어 계속해서 질문에 대한 정답을 책 목록에서 찾아 제시하면 방 밖에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이 중국어를 할 줄 아는 것으로 착각하는데, 인공지능은 인간처럼 대화를 하는 것일 뿐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항변한다. 이에 대해 시스템 논변은 그 사람이 중국어를 몰라도 완벽한 중국어 답변이 나오면 과정이야 어떻든 그 사람, 그가 있는 방, 질문과 답이 적혀 있는 책, 중국어로 된 질문과 답 등 이 모든 것을 시스템으로 보아서 시스템 자체가 중국어를 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시되어 있다. 


융의 집단 무의식에 대한 통찰, 행복한 삶의 세 가지 측면, 즉 즐거운 삶, 좋은 삶, 의미 있는 삶에 대해 고찰한 셀리그만이나, 일을 잘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안니라 질문을 바꾸어 일의 가치를 묻는 왜 하는가를 먼저 생각하고 이후, 그렇다면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생각하며, 이후에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고민해야한다는, 사이먼 사이넥의 골든 서클의 개념도 신선했다. 


1권을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2권에 대한 독서 의지도 불타게 되는데, 저자의 철학 공부 방법으로 설계된 유튜브와 이 책의 장점을 생각해볼 때, 당연한 귀결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짧은 지면에서 다루다 보니 깊이 있는 공부를 위해서는 다시 저자들의 세부 저작을 읽는 것이 필요하다. 

...철학자들이 가졌던 문제의식을 살펴보는 거예요.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어떤 질문을 던졌으며 그에 대해서 어떤 대답을 내놓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죠. 저는 이런 작업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철학자들이 시대별로, 분과별로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질문을 던졌는지 알면, 철학이 뭔지 느낄 수 있고 서양철학사의 전체 숲을 볼 수 있기 때문이예요....철학의 진정한 효용성은 ‘생각의 명료화‘입니다. 자기 생각을 명료하게 만드는 법을 알면, 살면서 마주하는 많은 문제가 생각보다 단순해져요 - P5...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브리치 세계사 즐거운 지식 (비룡소 청소년) 17
에른스트 H. 곰브리치 지음, 클리퍼드 하퍼 그림, 박민수 옮김 / 비룡소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좋은 책을 평가하는 여러 기준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책을 통해 사고나 관점의 전환이 있었는가 하는 점이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허튼 생각을 즐겨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나는, 종종 현대인의 우울은 너무 세미한 들여다보기의 습관 내지는 문화가 일부 일조하고 있지 않을까 짐작해볼  때가 있다. 온갖 미디어를 통해 실시간으로 시야에 들어오는 '현재'의 모습을 뒤로 하고, 잠깐만 멀리서 또는 높이서 '지금'을 조망할 수 있다면 한결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 한껏 우울하고 힘겨울 때 역사서를 읽으면 어떨까. 


이 책은 누가 뭐래도 그 허튼 생각을 뒷받침하는 굳건한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줌 앤 아웃이 명확한 장점이 있다. 세세하게 시대를 구분하고, 특징을 비교하며 어떤 교훈을 끌어내는 방식의 역사서가 아니라 저자의 손녀가 저자의 서문을 인용한 대로, 학교에서 읽히는 교과서와는 전혀 다르다. 저자가 손자, 손녀들에게 들려주듯 이야기 형식으로 쓰여 있어 이해하기 쉽다. 


그러므로 이야기 형식의 장점을 적절하게 살려낸다. 인위적으로 시기를 구분하는 대신 시대 전환의 배경과 현상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또 화자의 재치 있는 평가가 이야기에 첨언되어 사뭇 진지해질 수 있는 분위기를 유쾌하게 전환한다. 역사는 암기로 기억해야할 학문이 아니며, 사람들이 살아가고, 싸워내고, 지켜냈던 이야기라는 점도 꽤 근사하게 인식시킨다. 


가령 왕과 교황의 다툼 이면에 놓인 토지 분배와 사제 임명의 권한 분쟁이라든지 오스트리아의 뒤늦은 제국 확장 의지와 1차 세계 대전의 발발, 독일 연방을 해체하고 제국을 세운 비스마르크의 분명한 목적 의식, 나폴레옹과 그 형제들의 지배 등 각 장마다 독서의 흥미를 유발하는 숱한 뒷 이야기가 숨어 있다. 


다만, 세계사라기 보다는 유럽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저자에게 조금만 더 풍성한 시간과 여유가 있어 한, 중, 일의 역사를 다루거나 동남아시아나 남미 역사 등을 다루었다면 어땠을까 아쉬운 상상도 하게 된다. 


역사가 품고 있는 다양한 이야기는 승패, 흥망의 어떤 원리가 들어맞는 것처럼 느껴지다가도 우연한 기회와 뜻하지 않은 영웅의 출현으로 한순간에 뒤집히기도 한다. 게다가 100년도 못 사는 인간들이 얽히고 이어져 장구한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 어떤 힘에 압도되는 것 같은 전율도 느끼게 된다. 돌아보면 억울하고 원통할 일이 무엇이 있을까.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삶은 한 데 모여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들려줄 짜릿한 이야기가 될 것인데. 

이 책은 학교에서 사용되는 역사 교과서를 대신할 의도로 집필된 것이 아니다. 이 책은 학교에서 읽히는 교과서와는 전혀 다른 목적을 갖고 있다. 나는 독자들이 필기를 하고 또 이름이나 연대를 외워야한다는 부담 없이 느슨한 마음으로 읽어 나가기만을 바란다. 그리고 제대로 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꼬치꼬치 질문을 하지 않으리란 점도 약속하겠다. - P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돌이켜보면, 코로나 팬데믹의 서막은 전혀 요란스럽지 않았다. 2020년 설 연휴 동안 나는 가족들과 함께 미리 계획해 두었던 대만 여행을 떠났고, 현지에서도 1~2명 정도 코로나 환자가 발생했다는 뉴스만 간간이 들릴 뿐, 대만도 거의 사회적인 동요가 없었다.   아무런 방해 없이 짧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일상에 복귀한지 얼마 되지 않아 2월 중순에 이르자 코로나는 본 모습을 삽시간에 드러내기 시작했다. 


  대구에서 31번째 환자가 발생한 이후부터 코로나의 공포는 유례없이 두드러졌고, 급기야는 학생들의 전면 개학이 취소되고 비대면 학습이 전격 도입되었다. 일부 회사 역시 재택근무로 전환했다. 행사는 취소되었고 거리는 텅텅 비었으며, 가게마다 우중충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사회적 거리두기, 마스크, 큐아르 코드, 백신 같은 단어들이 곧 일상을 지배했다. 그것들은 아무렇지 않게 생활의 규범으로 자리를 잡아 새로운 행동과 모습의 기준으로 붙따랐다. 


   코로나의 횡횡은, 카뮈의 <페스트>처럼 정부와 국민의 당혹스러움, 일부의 이기적 또는 이타적인 행태, 고립과 회피, 망각과 원망, 저항과 패배, 성실과 과로, 희생과 작은 승리 등이 한데 어우러져 무엇이라 규정할 수 없는 유다른 재앙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쨌든 총력을 다하여 2년여의 사투를 치러냈고, 마침내 코로나 확산의 저지선을 꺾은 듯했다. 그런데, 이제 드디어 일상이 다시 회복된다는 설렘이 충만하기도 전에 감염력이 더 강력한 변이 바이러스가 유행한다는 맥 빠지는 소식이 들려온다. 


  한편 형편을 추슬러 포스트 코로나 사회를 대비해야 한다는 각성이 일기도 한다. 누군가는 연대를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시스템 개선을 주장하며, 누군가는 비대면 온라인 사회로의 이행을 화두로 던지면서 코로나 사회의 출구 전략을 제시하지만, 무언가 핵심이 빠진 듯 공허한 울림처럼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전문가들은 세련된 언어로 코로나를 설명했지만, 현장에서 경험한 실체는 미묘하게 달랐으며, 무언가 이상하다고 나만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발언은 표출할 권리를 얻지 못하거나 종종 가볍게 무시되었다. 


  나름대로 끊임없이 마주하고, 항거하며, 이겨내려 노력했지만, 제 속성대로 신출귀몰하며 기어이 공포와 불안을 흩뿌린 코로나를 앞에 두고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코로나는 숨 고르듯 한 번의 파고를 넘자 다시 기지개를 켜니, 의지는 스멀스멀 해체되고 무참함은 전신으로 스며든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최선을 다했으니 그뿐인가. 차라리 <페스트>에서처럼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감염병이 다시 갑자기 사라질 것을 기대하며, 감염병은 잊고 될 대로 되어 가는 것을 목도하는 것이 지혜일까. 걷잡을 수 없는 의문들 때문에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그러므로 우연히 읽게 된 <다섯째 아이>의 메시지는, 골칫거리 코로나 앞에서 잔뜩 움츠러든 내게 충격에 가까울 정도로 신선하게 다가와, 마지막 장을 덮고도 한참이나 어떤 울림이 가슴 깊은 곳에서 잘그랑대는 것 같았다. 


  소설의 줄거리는 꽤 단순한 편이다.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직장 파티에서 만나 결혼하는데, 이들은 당시의 개방적이고 개인 중심적인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옛 신념을 고수하기라도 하듯 다소 보수적이다. 소박한 가정을 이루어 아이들을 낳아 단란하게 사는 것이 꿈인 이들 부부는 형편보다 무리해서 저택을 구입한다.  네 명의 아이를 낳아 기르는 동안 경제 또는 물리적인 버거움은 다소 있었지만, 데이비드의 이혼한 아버지, 어머니 가정, 해리엇의 어머니와 자매 등이 휴가 기간에 저택을 방문하고 교류하는 등 부부는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간다. 


  더욱이 데이비드의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아들을 돕고, 육아를 위해서 해리엇의 어머니 도로시가 저택에 상주하면서, 이들 부부의 어려움은 좀처럼 절망스러워 보이지 않고, 오히려 행운처럼 느껴질 정도다.  적어도 이들의 행복은 다섯째 아이 벤을 낳기 전까지는 어떤 근본적인 삶의 원리를 획득이라도 한 것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나 다섯째 아이 벤의 등장은 일순간에 가정의 평온을 바스러뜨렸다. 


  해리엇은 벤을 임신하면서부터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한다. 네 명의 아이를 낳았던 그녀는 예전과 다르다며 담당 의사에게 유도 분만을 요구하지만, 의사는 자신은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고 답한다. 해리엇은 “왜냐하면 선생님은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받아들여지 않는다. 전문가의, 별반 다르지 않다는 규정은 순식간에 그녀의 다르다는 절규를 압도한다.

 

  벤은 성장 과정 역시 남달랐다. 기괴한 모습의 아이는 여느 아이들과 달리 난폭했고, 고성을 질렀으며, 아이들과 부부, 나아가 친척들에게조차 평화를 위협하는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했다. 의사는 여전히 벤은 신체적으로 정상이며, 말이 느릴 뿐이라고 판단했지만, 마침내 데이비드는 이전의 가정을 되찾기 위해 벤을 어딘가로 보낸다. 벤의 증발과 함께 가족은, 작가의 표현대로 잠시 물에 불린 꽃처럼 피어나지만, 해리엇은 이내 어떤 의무감처럼 벤을 찾아 나선다. 


  데이비드에게서 받아든 주소지를 무조건 찾아간 해리엇은 음산한 수용소 같은 곳에서 짐승처럼 방치된 벤을 집으로 다시 데려온다. 벤의 재입성은 가족을 천천히 와해시킨다. 데이비드는 점점 더 일에 몰두하고, 네 아이들은 제 삶을 찾아 제각각 집을 떠난다. 해리엇은 간간이 수용소에서의 기억을 끄집어내 가까스로 벤을 통제하는 시늉만 낼 뿐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돌봄에 지친 해리엇은 흉측해진 정원을 돌보기 위해 존이라는 청년을 고용하고 이후 빈둥거리며 떠돌아다니는 존과 무리에게 벤의 돌봄을 맡기는데, 유일하게 벤은 그들에게 마음을 붙인다.  이런 와중에 학교에 입학한 벤은, 학교로부터 거부 내지는 방출될 것이라는 해리엇의 예상과는 달리, 놀랍게도 느리지만 정상적으로 성장하는 아이라며 무사히 진학까지 한다. 


  존이 떠나고, 상급학교에 진학까지 하면서 벤은 어떻게 아이들과 소통했는지 모르겠으나 불량한 아이들과 어울려 저택을 점차 점거한다. 그들은 냉장고를 한껏 털어먹거나 어디선가 음식을 사 와서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 채 저택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기 일쑤여서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저택을 팔고 단둘이 새집으로 이사할 계획을 세운다.  해리엇은 벤의 등장을 신의 형벌, 우주의 진화 등을 떠올리며 나름대로 해석해보려 하지만,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소설은 그녀가 자신들이 저택을 떠나면, 벤은 무리와 함께 갱단처럼 지내다 대도시 지하 세계로 내몰려 거기에서 우두머리로 살아갈 것이라고 예상하는, 열린 결말로 마무리된다. 


  다복한 중산층 가정에 벤이라는 기묘한 아이가 출생하고 그로 인한 가정의 굴곡진 변화를 담담히 그려낸 소설의 단순한 줄거리와 달리 작가는 곳곳에서 허를 찌르면서도 대담한 시선과 질문을 여과 없이 쏟아낸다.


  가장 파격적으로 느껴진 대목은 ‘벤’에 대한 규정과 인식의 문제였다. 벤을 직접 임신하고 양육하는 해리엇의 목소리는, 의학이나 교육의 공식적인 전문가의 규정 앞에서 무용지물로 여겨진다. 작가는 나의 오롯한 경험일지라도 전문적인 판단과 용어로 치환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제일지라도 인식되거나 인정되지 않는 현실의 좌표를 명징하게 드러내고 있는데, 실존이나 존재는 전문가적 식견으로 재구성되는 것인가, 아니면 누구든 상관없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그의 인식 자체로 표출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는지 질문한다. 


  이와 더불어 소설 전체를 관통하며 평행선을 달린 또 다른 질문은, 그렇다면 경험하는 것이 곧 올곧게 인식하는 방식인가 하는 생각이었다.  ‘벤’이라는 유례없이 새로운 존재의 출몰은 다양한 인간 군상들에 의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인식된다. 데이비드는 유전자의 변화로, 해리엇은 우주의 진화까지 들먹이면서 벤을 이해하려고 하고, 아이들과 친척들도 나름의 생각대로 벤에게 접근하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벤에 대한 ‘공포’, ‘적의’에만 머물러 있다. 놀랍게도 소설에서 각자의 인식은 대화나 만남 등에서 소통되는 것 같지만, 전적으로 각자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있고 따라서 해석도 자기 안에 갇혀 있다. 지금껏 본인들이 가지고 있던 경험, 지식, 인격 등을 총동원하여 벤을 바로 보려 하지만 ‘보고 싶은 것만 보기에’ 번번이 좌초한다. 


  오히려 벤은 허랑방탕한 존과 무리, 개념 없이 들떠 있는 불량한 녀석들 속에서 어울려 다니는 것이 가능하다. 다만 그들이 벤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자세히 그려지고 있지 않지만, 그 어울림 속에서는 벤에 관한 규정과 인식이 크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은 언뜻 벤과 함께하는 것 같지만, 벤은 일종의 사물처럼 하필 그들과 함께 동일한 시공간을 동시에 점유한 것일 뿐 과연 함께 하는 것이 맞는지 의문을 품게 한다. 


  또 눈여겨본 대목은, 다양한 시선의 교차 속에서 정작 벤은 스스로를 표현하는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벤은 숱한 규정과 인식 속에 머물러 있거나, 어떤 물리적 존재로서 사물인 양 함께 하는 것으로 관찰되고 있을 뿐, 벤 자체의 목소리는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몸짓, 소리, 행동은 소설 곳곳에서 내내 특유의 일관성을 갖지만, 그 누구도 그를 ‘바로 보지 않기에’ 각각의 공동체와 대비되어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겨우 괴성이나 단답형의 응답만 가능한 것으로 묘사되는 벤을 보면서, 전지적 시점에서 전말을 이끌어온 작가가 의도적으로 벤 자신의 주장과 생각을 배제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이러한 장치는 독자마저 겉도는 관찰자로 머물게 하면서 벤의 행동, 모습, 소리 등을 더욱 생경함으로 점철하는 효과로 나타나, 한껏 이상하고 기괴하며 섬찟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으므로.


   벤은 분명히 자신으로부터 배태되었지만, 그 새로운 존재는 내 통념과 상식, 예측을 벗어나므로 타도와 통제의 대상이며, 그러므로 아웃사이더들과 어울리며 내가 머물러 온 안온 너머의 지대에만 머물기를, 그리하여 내가 꿈꾸던 화평과 행복을 더 이상 침습하지 않기만을 바라는 해리엇의 간절함은 과연 그녀만의 소망일까. 


   작가는 지독하고도 집요한 추적을 통해 중산층 가정에의 희구가 주는 환상 또는 신념을 순간 깨뜨리면서, 돌발 상황이나 뜻밖의 존재를 마주할 때 동시에 저마다 다른 인식, 규정을 쏟아내기에 앞서 있는 그대로를 편견 없이 보며, 올곧게 인정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만 같았다. 


  낯설고 새로운 존재를 그대로 관찰하고 이를 토대로 인식하되, 편벽진 의식에 기댄 개별적인 인식이나 규정의 고립을 넘어서서, 진정한 소통과 교류를 통해 불완전하더라도 어떤 공통의 상을 확립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닐까. 


  독서를 끝내고 죽비 같은 작가의 일침에 코로나를 마주하며 표류했던 마음이 바스스 다시 일어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소설을 읽은 후 전율했던 까닭은 벤과 코로나가 전혀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코로나는 벤처럼 어느 순간 일상의 평온을 파고들었다. 데이비드와 해리엇처럼 코로나를 마주하며 당혹했고, 어떻게든 제어하며 떼내려 했다. 곳곳에서 각자 다른 감성과 평가로 경험한 코로나의 인식은 공포와 불안을 증폭시켜 제대로 공유되지 못했고, 전문가의 규정만이 꽤 그럴듯한 해석인양 덥석 수용되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새롭고 낯선 모습으로 등장한 코로나를 다시 앞에 두고,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개별의 인식, 전문가의 규정, 치우친 해석과 예측으로 제각각 섣부르게 나아가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코로나의 존재를 그 자체의 입장에서 살펴보고, 누구랄 것 없이 평등하고 자율적으로 소통하는 토대 위에서 모두의 철저한 관찰을 함께 모아, 제3의 인식으로 도약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야말로 신념이나 경험으로 재단하여 삶을 통제하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생의 여정을 사는 방식에 대하여, 작가가 던지는 해법의 실마리가 아닐까. 

벤이 살해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은 여자, 그녀는 입 밖에는 내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격렬하게 자신을 옹호했다. 자신이 속한 사회가 신봉하고 지지하는 가치관으로 판단해 볼 때 그녀는 벤을 그 장소에서 데려오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살해당하는 것으로부터 그 애를 구했기 때문에 그녀는 자기의 가족을 파괴했다 - P15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