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믿는데 기쁨이 없어서
마이크 메이슨 지음, 윤종석 옮김 / 꿈꾸는인생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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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과 알콜 중독에 빠졌던 저자는 우연히 90일 간의 기쁨의 실험에 착수한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주님 안에서 기뻐하겠다고 작정하면서 그 여정을 꼼꼼히 작성했다. 항상 기뻐하라고 명하신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기로 결심하면서, 과연 어느 때든지 기쁨을 누리는 것이 가능한지 스스로를 실험 대상으로 삼아 일지를 작성하듯 어떻게 기쁨이 가능했는지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놀라움은 첫 장부터 시작된다. 저자가 기쁨의 실험에 착수하기로 결정하기 10일 전, 친구의 10대 자녀 둘이 교통사고로 동시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이었던 그들에게 닥친 불행을 앞에 두고 슬픔에 잠을 못 이루던 밤에 갑자기 기쁨에 대한 실험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이 책을 그들을 위해 헌정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출발한다. 무모함을 넘어서서 부적절하기까지 한 이 생각에 압도되었는데, 그는 이것이 하나님의 생각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고백한다. 


비극과 기쁨의 혼재가 만들어낸 상황 속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인의 기쁨이 어두움, 혼돈, 무의미, 슬픔과 닿아 있으며 반은 천국에 있고, 반은 지상에 있는 거룩한 친구의 가정을 통해 기쁨은 현실 세계의 냉엄함과 얽힌 실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표현한다. 


90여일간의 여정을 통해서 저자는 기쁨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 은혜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우리의 상황과 조건을 뛰어넘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저 기뻐해야한다고 주문을 외우고, 의도적으로 기쁨을 쥐어짜는 것이 아니라 기쁨의 원천이 되는 근간을 이해하고, 기쁨을 인식하기에는 너무나 혼탁해진 세상을 비집어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누려야 하는 개념이라는 점을 공고히 한다. 


그러므로  기쁨의 소식인 복음을 두고, 두렵고 불안하며 불행하고 미묘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복음을 놓치고 있다는 점도 성찰한다. 기쁨이 사라질 때 예수님을 처음 영접하던 자리로 다시 돌아가야 하며 기쁨은 계속해서 커지는 속성이 있고, 근육처럼 사용하지 않으면 위축되며, 기분이 항상 좋은 것이 기쁨이며 행복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오히려 기쁨에서 오는 행복은 역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며 나 자신에게 충분한 여유를 주는 것이며 행위에 압박감이 들지 않도록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내 것으로 누리는 것이라고 재정의하면서, 정죄, 무기력, 자기연민, 혼란이 올가미가 되지 않도록 경계하도록 간구한다. 


기분이 침울해지면 감사 기도를 통해 기쁨을 복구해야 하며, 하박국의 가르침대로 기쁨은 상황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선택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선포하면서 같은 맥락에서 불행은 중독이라는 점도 분명히 한다. 


작고, 어려운 매일의 선택을 통해서 내가 하도록 되어 있는 일을 찾아 전심을 다하는 것,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성령충만, 이 땅의 모든 문제를 천국의 능력으로 이기겠다는 결단, 어려움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대적하는 것, 여전히 죄인이면서도 죄에서 분리되어 의로워질 수 있는 복음의 기적, 100%의 헌신, 주님을 기뻐하는 것, 복음의 메시지에 대한 바른 이해, 엉뚱한 실수까지 포함되는 일상의 곳곳, 십자가의 그림자, 절제와 성찰 등을 통해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매일 만나를 거두어들이듯 기쁨도 매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난과 기쁨을 연결하는 것은 인내이며, 기쁨은 하나님이 원천이기에 기쁨이 없다면 복음이 아니라고 까지 가르친다. 


저자는 기쁨은 감정이 아니며 안식이며, 실체이며 즐거움이며 누림이자 행복이라고 자신의 실험을 결론짓는다. 


찬찬히 읽다보면, 죄에서 벗어나 천국에서 영생을 얻으니 기쁘다라는, 다순한 교리로 이해하는 기쁨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삶에 드리워진 영적인 기쁨을 발굴하고 채집하는 실험록에 공감할 수 밖에 없다. 우울증을 앓고, 고통과 상실의 경험자이면서도 누구보다 더더욱 기쁨을 말하고 누리는 역설이라서 더더욱. 

오랫동안 잠자던 봉오리에서 예쁜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기쁨의 실험을 통해 전혀 새로운 차원의 기독교가 내 앞에 열렸다. 이 새로운 영성은 아주 달콤하고 밝고 은혜로워서 나를 완전히 사로잡는다..중략..나는 믿는다, 드디어 나는 성경이 주는 영원한 기쁨을 충분히 믿어, 이 놀라운 약속이 나 자신의 삶 속에 이루어지는 것을 본다. 나는 결코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거짓말과 휘장은 찢어졌고 이제 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본래 기쁨에 흠뻑 젖도록 되어 있음을 확실히 안다.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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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 다스리기 30일
데보라 스미스 피게 지음, 김태곤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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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듯이 목적이 뚜렷하다. 행동하기 전에 태도의 절제,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태도의 금식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태도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전제한다. 


감정이나 인지에 의해 촉발되는 방식으로 태도를 다루는 것이 일반이라면, 이 책은 성경 말씀에 비추어 성취해야 하는 중요한 목표를 저자가 나름대로 5가지를 분류하고, 그에 따라 대립되는 태도를 12개씩 뽑아 30일 동안 돌아보는 방식으로 기술한다. 중요한 목표는 소망을 안겨주는 태도 갖추기, 상처를 치유하는 태도를 갖추기, 관계를 열어주는 태도를 갖추기, 승리를 가져다주는 태도 갖추기, 삶을 풍성하게 하는 태도 갖추기로 설정되어 있다. 


이러한 기술 방식의 가장 큰 장점은 먼저 대충만 훑어봐도 60가지의 태도가 상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기껏해야 긍정적이거나 부정적, 진취적이거나 나태한 정도의 태도 정도만 떠올리는 내게는 다양한 태도의 직조가 삶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가 뽑은 것만 해도 60가지가 넘는데, 그동안 얼마나 많은 태도를 간과하고 있었던 것일까.


기독교 상담가답게 성경 말씀에 기초를 두면서, 매우 쉬운 삽화와 용어로 설명하면서도 독자에게 좋은 태도를 갖도록 끊임없이 견인하는 탁월함이 돋보인다. 


개인적으로 가장 도전이 되는 대목은 다투는 태도와 온유한 태도, 운명론적인 태도와 감사하는 태도,  완고한 태도와 유연한 태도, 조급한 태도와 인내하는 태도, 부족의 심리를 지닌 태도와 풍요의 심리를 지닌 태도, 피해의식을 갖는 태도와 과거를 극복하는 태도, 대충하는 태도와 탁월함을 추구하는 태도 등이었다. 


매혹적인 입맛의 자극은 없을지라도 곱씹을 때마다 새로운 맛을 내는 맨밥처럼 담백하면서도 영혼을 살찌우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내가 평범할지 탁월할지, 불안할지 평온할지, 편협할지 관대할지, 또는 다른 어떤 습성을 드러낼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나의 태도임을 깨달았다. 선택이 나의 몫이기에 나는 관계적으로, 감정적으로, 재정적으로, 신체적으로, 영적으로 삶의 모든 면에서 건전한 쪽을 택하기로 결심했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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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의 꿈 열린책들 세계문학 123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박종소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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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중 처음으로 공연되었으며, 그의 아내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종종 이 소설의 주요 인물인 늙은 공작처럼 연기하는 것을 즐겨했다는 설명은, 독서의 도화선이 되기에 충분했다. 


소설의 줄거리는 매우 간단한다. 신분 상승의 천박한 꿈에 젖은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나이 들어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공작의 새로운 신부로, 자신의 딸인 지나이다 아파나시예브나가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어떻게든 노인 공작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애쓴다. 


그녀는 온 동네가 알아주는 허영심 많은 전략적 인물로, 침상에서 죽어가는 가정교사를 사랑하는 딸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오락가락하는 공작의 기억을 조작하고, 공작이 얼렁뚱땅 자신의 딸과의 결혼을 대중 앞에서 발표하도록 온 힘을 기울인다. 주도면밀한 그녀는 남편인 아파나시 마뜨베이치에게도 공작을 집에 초청했을 때 해야 할 말들을 미리 일러주지만, 그는 융통성이 없는 데다 통찰력도 부족하여 우스꽝스러운 면모만 보여준다. 


한편 지나이다 아파나시예브나를 마음에 두고 있던, 비열한 관리 모즈글랴꼬프는 그녀에게 청혼하고 답변을 기다리던 중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의 계략을 몰래 듣게 된다. 이에 격분한 그는 공작을 설득해서 그가 지나이다에게 청혼한 것은 꿈에서 했던 것이라고 공표하게 함으로써, 마리야의 모든 계획을 훼파한다. 


이 모든 소동이 지나가고 이후 빠벨 알렉산드로비치 모즈글랴꼬프는 모르다소프를 떠나지만 여전히 색을 좇고 청혼하며 퇴짜를 맞는 생활을 이어간다. 그러다가 멀리 떨어진 지방의 도시 시장 부인이 주최하는 무도회에 갔다가 충격을 받는다. 눈부신 야회복을 입고 온몸에 다이아몬드를 반짝이면서 거만하게 자신을 맞은 시장 부인이 지나였기 때문. 그러나 그녀는 최상류 사회 출신의 어머니를 둔 고상한 자녀로 둔갑되어 있었다. 자신을 알아보고 잠시 흠칫했지만 이내 빼쩨르부르그의 지체 높은 공작의 이름을 들먹이고 고관들과 어울리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무도회에서 돌아온 모즈글랴꼬프는 울적하고 허탈감에 빠져, 출장 명령을 받자마자 황급히 떠난다. 도시를 떠나면서 공상에 빠진 그는 세 번째 역에 이르자 다시 본연의 자신으로 돌아온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들의 욕망은 서로 부딪히며, 욕망은 각자의 삶을 추동하는 중요한 동기로 작동한다.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딸을 통한 신분상승을, 늙은 공작은 아가씨와의 결혼을, 모즈글랴꼬프는 지나와의 결혼을 꿈꾸다 좌절하자 마리야의 계획을 실패로 견인하는 데 집중한다. 욕망들은 뒤엉키고 대립하면서 소설가의 표현대로 '메피스토펠레스의 조소'와 같은 결말로 나아간다. 


아마 마리야의 실패와 모즈글랴꼬프의 성공에서 소설이 마무리되었다면, 매우 밋밋했을 것 같다. 그런데, 노련한 작가는 마리야가 놀랍게도 부활하여 지나이다를 장군의 아내로 시집보내는 데 성공한 결과를 보여줌으로써 모즈글랴꼬프 뿐만 아니라 독자의 허를 찌른다. 더구나 순수한 사랑을 갈구하는 것 같던 지나이다는 모즈글랴꼬프를 한 숨에 제압할 정도로 농염한 귀부인으로 변신해 그 생활을 마음껏 즐기는 것으로 그려진다. 모녀의 달라진 삶에 놀란 모즈글랴꼬프 역시 잠시 충격을 받을 뿐, 다시 여정을 떠나면서 다시 본성으로 돌아가 크게 변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작가가 개인의 욕망을 세밀하게 조망하는 부분도 탁월하다. 가령 지나가 사랑한 가정교사는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데, 그는 아름다운 죽어감을 위하여, 오랫동안 가슴에 병이 있었음에도 그대로 두었음을 고백한다. 그는 다른 방식이 아니라, 폐병에 걸려 죽게 되면 지나가 자책하면서 자신을 찾아와 무릎을 꿇게 될 것이고, 그러면 자신은 그런 그녀를 품에 안고 서서히 죽어가는, 달콤하고 로맨틱한 장면을 연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개인의 욕망들은 마치 지류가 합류하여 강으로 나아가듯 어느새 한 줄기로 합쳐져, 사랑의 퇴색과 도구화를 철저히 뒷받침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악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일까. 악은 의식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일까. 대작가는 단순한 이야기 속에도 큰 질문을 감춰둔다. 

어쩐지 그는 자존심이 상하고 모욕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춤을 추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울적하고 허탈감에 빠진 듯한 표정과 메피스토펠레스의 조소와 같은 웃음이 이날 저녁 내내 그의 얼굴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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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와 사랑 일신서적 세계명작100선 13
H.헤세 지음 / 일신서적 / 198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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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가 이 작품을 발표하고 20년 후에 '새로운 문제와 새로운 인간상으로 새로운 창작에 착수할 생각이었으나 자신의 장편은 대부분 지와 사랑에서 제기된 문제와 인간상을 변형시켜 되풀이한 작품'이었다고 회고했다는 대목을 읽자, 독서를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는 인간 삶의 궁극적인 지향점에 영원한 진리에 대한 탐구와 사랑을 두고, 그것을 찾아가는 방법론에 몰두하면서 대조적인 두 인물을 창조해낸다. 


부단한 수련과 지적인 사색을 통해 진리를 인식하는 방법과 욕망을 바탕으로 경험 및 감각으로 부딪히며 진리와 맞닿는 여정을 교차시키면서, 결국에는 이 두 가지 방법론이 목표를 성취하는 데 있어서 서로를 보완하는 동시에 각자 정당하며 옳은 과정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지"를 대표하는 나르치스는 흠잡을 수 없는 태도를 지닌 데다 조용하며 뛰어난 학습 능력을 구사하는 신동으로, 수도원에서 교사의 역할까지 감당할 정도로 학자의 천재성을 발휘하는 인물이다. 그의 명징한 논리와 체계적 인식은 그 누구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뿜어내므로 쉽게 다가가기 힘들 정도. 감성이라고는 전혀 없을 것처럼 냉철한 그는 어느 날 수도원에 들어온 골드문트를 남다르게 여기며 그를 각성시킨다. 


골드문트는 '사랑'을 드러내는 인물로,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수도원에 들어온다. 그는 나르치스의 겸비함과 절제력, 지적 성취를 우러르며 그를 닮고자 하지만, 점점 요원해지고 오히려 작은 유혹에도 쉽게 흔들리고, 어머니를 희구하며 수도원을 나와 방랑길을 떠난다. 


골드문트는 좀처럼 정착하지 못하고 수 많은 여인들과 사랑을 나누고, 금화를 지키려다 잠시 함께 했던 빅토르를 우발적으로 죽이기까지 한다. 그러다가 고해성사를 하려고 어느 수도원에 들렀다가 성모 마리아상을 보고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영혼의 아름다움과 생기를 느낀다. 그는 신부에게 소개를 받아 마리아상을 만든 니콜라우스를 찾아가 스승으로 모시며 조각의 세계에 빠져든다. 그는 나르치스를 생각하며 사도 요한 상을 조각하지만, 완벽한 기술로 완전한 미를 창조하기 위해 자신의 자유와 경험을 희생할 가치가 있는지 회의하면서 스승을 떠난다. 


이후 페스트가 휩쓴 마을들을 지나면서 또 다시 사랑과 방랑의 길을 헤맨다. 그러다가 우연히 한 교회 옆을 지나다가 천사, 사도, 순교자 등의 경건한 석상을 보면서 가슴 속에 외경심, 헛되이 낭비한 지난 시간에 대한 공포심에 휩싸이게 된다. 아무도 없는 교회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간음하며 도적질한 자신의 삶을 고백하면서 왜 인간을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느냐며 이제는 신을 알 수 없다고 자조한다. 그리고 일체의 어떤 답변도 없는 그 자리에서 무너진 인간의 세계와 상관 없이 품위와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초연히 서 있는 석상들에게서 무한한 위로를 느끼게 된다. 또 자신이 사랑한 여인들과 스승도, 비록 그 이름과 생애가 알려지지 않더라도 그 석상과 함께 서 있기를 희망하다가, 언젠가 그 석상과 함께 무언의 상징으로 조용히 함께 서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골드문트는 스승의 도시를 찾아가 스케치로 연명하지만, 이내 다시 새로운 방랑을 시작한다. 이후 백작의 아내 아그네스와 사랑에 빠지지만, 백작에게 들켜 사형에 처할 위기에 빠지게 된다. 그는 죽기 전 미사를 위해 찾아올 신부를 죽여서라도 어떻게든 생명을 지켜야겠다고 다짐하는데, 뜻밖에도 수도원장이 된 나르치스가 나타난다.


나르치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골드문트는 함께 수도원으로 가게 되고,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의 배려 덕분에 수도원의 작품의 조각한다. 이 과정에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대화를 통해 지와 사랑의 세계에 대해 표현하고 교류한다. 


나르치스는 사색은 형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개념과 공식에 의해서 만들어지며 형상이 끝나는 곳에서 철학은 시작되지만, 곧 인간의 불완전성을 깨닫게 된다고 일갈한다. 그러면서 존재란 부분적이며 완전한 존재는 신뿐으로, 인간은 무상하며 변화 과정에 있고,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힘에서 행위로 나아가며, 가능성에서 실현을 향해 나아갈 때에만 완전한 신성을 닮아간다고 설명한다. 이것이 곧 자아실현으로, 예술가는 인간의 우연적인 요소를 해방시켜 순수한 형체의 인간상을 만들어낼 수 있고, 순수한 사색 역시 수학처럼 어떤 심상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사고를 통해 문제를 풀어내듯 관찰하고 추정하는 가치를 끊임없이 응용하면서 완전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수도원의 작품을 완성하고 잠깐의 여행을 다녀온 골드문트는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나르치스는 우리에게 평화는 없으며 매일 부단한 싸움으로 쟁취하여 새롭게 해야 하는 평화가 있을 뿐이라고 이야기 한다. 골드문트는 죽어가면서 어머니가 자신을 유혹하고 가슴에서 심장을 끄집어낸다며 자신은 형상을 만들었으므로 기꺼이 죽어야 하며 어머니 없이 어떻게 사랑할 수 있으며 죽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나르치스의 가슴에 불을 지핀다. 


골드문트의 삶을 살았다고 고백한 헤세는 속세에 있는 우리 삶의 객기와 방랑을 옹호하면서 그것이 영원성과 결합할 때 진실한 도약이 있으며, 때로는 세속에서 벗어나 순수한 지적인 세계를 동경하지만, 그것 역시 불완전하여 사랑이나 신비와 접목될 때 완전성을 획득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통해 이성과 감성의 두 양면을 가진 인간의 특성과 그 나아갈 바를 읽어가는 즐거움이 크다. 

어쨌든 간에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 주었다. 즉 고귀한 곳에 예정된 인간은, 분방한 생활의 혼란 속에 아득한 정신으로 빠져들어 육체에 먼지와 죄가 깃든다해도, 비겁함과 뒤엉키지는 않을 것이요, 심중에 신성을 멸치 않을 거요, 심연의 흑암 속에서 길 잃어 방황해도 그의 영혼의 깊은 곳에서는 신성한 광명과 창조성이 단연코 빛을 발한다는 것을 깨우쳐 준 것이었다.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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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엔 원년의 풋볼 (무선) 웅진지식하우스 일문학선집 시리즈 4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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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가장 큰 손실은 영적인 감각을 잃어버린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사실과 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삶이 놓인 다양한 층위를 외면하면서 모든 것을 단순하게 평가하고 편견으로 매몰시켜 버리는 태도는 점점 팽배해진다. 멀찍이 떨어져서 갖은 힐난을 쏟아부으면 그만이다. 나의 성결함은 한껏 고무되고 그러므로 나에게 구원은 필요 없다. 


그런데, 만약 내가 서 있는 좌표가 폭력의 중심부로, 내가 폭력을 목도한 증인이라면, 아니, 내가 폭력의 가해자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엉뚱하게도 소설을 읽으면서, 전쟁을 일으킨 일본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았다.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마땅한 징벌만 받으면 그것이 속죄이고 그뿐일까. 기계적이고 도식적인 방법론으로 모든 것이 예전처럼 회복될 수 있을까. 나는 왜 가해자가 되었으며 가해자인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하는 걸까. 


작가는 피해자와 가해자 너머에 놓인 폭력을 배태하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부터 탐색한다. 그리고 폭력에 스며들어 태어나고 살아가는 인간의 실존을 다룬다. 주인공 미쓰사부로와 다카시는 네도코로가의 형제로, 가문을 관통하는 사건에 대해 정 반대의 입장을 취하며 상반된 삶의 태도를 보인다. 


미쓰사부로는 대학의 전임 강사이자 번역가인데, 어느 날 기괴한 모습으로 죽은 친구에게서 어떤 것도 공유하지 못하므로 괴로워하며 침잠을 꿈꾼다, 장애아가 있지만 시설에 맡기고, 알콜 중독에 빠진 아내와 메마른 결혼 생활을 이어나간다. 다카시는 미쓰사부로의 동생으로 학생운동을 하다가 전향한 후 미국으로 가서 참회 연극을 한다. 그러다가 일본으로 돌아와 형과 형수, 그리고 그를 숭배하는 청년 호시오, 모모코와 함께 가문의 고향인 시코쿠로 떠난다. 


미쓰사부로와 다카시의 가문인 네도코로가는 세번의 주요한 봉기와 연관되어 있는데, 첫째는 만엔 원년의 봉기로, 번주에게서 돈을 빌릴 수 없자 네도로코가에게 골짜기 주민들이 돈을 빌리지만 이자가 너무 높아 폭동을 일으킨다. 이 폭동의 중심에 청년 집단이 있는데 그 주동자가 증조부의 동생으로, 이 폭동의 파급력은 점차 현 전체로 확대된다. 한편 증조부는 이러한 폭거 앞에 총으로 무장하며 끝까지 맞서고, 폭동을 진압하기 위한 외부의 토벌대에 의해 청년 집단은 처형된다. 그러나 증조부 동생만은 어떤 이유로 사라진다. 증조부의 동생은 청년 집단을 탈출에 숲으로 간 것으로 알려졌다가 소설 중반부에는 여러 서신이 발견되면서 미국으로 건너가 일상적인 생활을 한 것으로 그려진다. 


둘째는, 주민들이 감춘 쌀을 조선인이 몰래 판매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불량 청년 집단들을 동원해 조선인 부락을 습격하는 폭동이다. 이 과정에서 희생양으로 네도코로가의 S 형이 죽게 된다.  


미쓰사부로와 다카시는 증조부의 동생과 S형에 대해 전혀 다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데, 미쓰사부로는 그들을, 폭거를 일으키고도 제 목숨만 부지하기 위해 도망치거나 무의미하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무기력한 이들로 받아들이는 반면, 다카시는 더 큰 구조적인 폭력에 대항해 싸운 불굴의 의지를 지닌 이들로써, 모든 폭력의 죄를 대신 진 구원자로 이해한다. 


사실과 진실의 해석에 있어서 대척점에 놓인 형제는 자연스럽게 삶의 행보와 궤적이 달라지는데, 다카시는 증조부의 동생과 S형의 의기를 이어받아 골짜기 주민들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슈펴마켓 천황에 대한 항거를 준비한다. 그는 마을의 부랑배를 모아 풋볼 팀을 조직하고, 염불춤을 통해 슈퍼마켓 천황에 대한 마을 주민들의 적개심도 하나로 엮어내는 등 탁월한 지도력을 보인다. 


다카시의 진두지휘 아래 폭동은 짐짓 성공에 이르는 것 같지만, 결국 슈퍼마켓 천황 백승기는 다시 자신의 권력을 쟁취한다. 그리고 다카시는 어느 날 밤 염불제에서 만난 아가씨를 강간하다 죽였고 자신은 살인자로서 죽어 마땅하다면서 미쓰사부로와 마지막 대화를 나눈다. 미쓰사부로는 증거를 살펴볼 때 다카시가 아가씨를 죽인 게 아니며, 다카시가 아무리 자신의 죄를 입증하려 해도 확신에 차서 자신이 죽인 것으로 증거를 날조할 뿐이라고 믿는다. 이 과정에서 다카시는 장애가 있던 여동생과 근친상간을 했고, 임신중절까지 한 여동생을 자살하도록 내몰았다며 자신의 과오를 고백한 후 죽음을 선택한다. 


미쓰사부로는 다카시가 동생에 대한 죄책감을 없애고, 강간을 서슴없이 시도하며 절대 권력에 대항해 폭거를 일으킬 정도로 강력한 폭력의 지도자로 남고 싶다는 위선 때문에 죽음을 선택했다고 그를 심판하는데, 슈퍼마켓 천황 백승기 무리가 발견한 곳간채의 지하에서 증조부 동생의 자취를 마주하게 된다. 


소설의 말미에 이르기까지 미국에서 살면서 과거를 잊고 소시민으로 살아간 것으로 믿었던 증조부의 동생은, 실제로는 지옥도가 그려진 지하에서 죽을 때까지 투쟁을 위해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미쓰사부로는 그제서야 증조부 동생과 다카시에 대한 재심을 결심하면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지옥에 살면서 지옥을 극복하기 위해 끝없이 항거했으며 심판을 받아야할 당사자는, 모든 것을 바라보면서도 무심하게 앉아 지옥을 마주하지 않았던 자신임을 자각한다. 


그는 다카시가, 중국에서 무슨 일인가 꾸미다가 돌아가신 아버지와 정신 질환이 생긴 어머니, 거기에 전쟁에서 큰 형이 죽고, S형이 죽은 상황에서 장애가 있는 여동생과 함께 친척집에 맡겨졌고, 불안하고 경계하는 심리 속에서 근친상간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또 다른 폭력의 실상도 이해하게 된다. 또 다카시의 몰락 속에서,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폭거를 지지했으면서도 금새 돌아서서 다카시와 부랑배들 앞에서 침묵한 골짜기 주민이나, 다카시의 죽음 이후에 그의 곁에 아무도 남지 않은 풋볼 팀들을 상기하면서, 오히려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는 마침내 다카시의 아이를 임신한 아내와 시설에 맡겨진 장애 아이까지 챙겨 함께 아프리카로 떠날 결심을 한다. 


폭력적인 구조 속에서 탄생하는 인간은 다시 폭력을 만들어가는 환경의 인자가 되고, 폭력으로 폭력을 극복하는 아이러니에 빠지기에, 삶은 지옥으로서 존재한다. 그렇다면 가만 앉아서 매일매일의 삶 속으로 투척되는 폭력의 상황을 회피하는 것이 최선인가.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모순 속에 놓여 있을지라도 백기 투항은 안된다는 것, 어떻게든 살아내고 품어내 지옥을 극복하자는 데 있지 않을까. 단순히 폭력을 정당화하여 가해를 옹호하고 피해를 축소하려는 것이 아닐테다. 작가는 미쓰사부로의 1인칭 관점을 고수하면서, 증조부 동생과 다카시의 치열한 투쟁은 높이 평가하지만, 그 폭력적인 방법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미쓰사부로의 마지막 결단을 통해, 자신에게 가해자가 된, 동생의 아이를 가진 아내를 품고 자신의 손으로 시설에 맡긴 폭력의 피해자인 장애아를 안으면서 자신의 무기인 번역을 붙잡아 아프리카에서 통역을 해보려 한다. 폭력이 낳은 지옥 앞에서 폭력 말고 분투할 수 있는 제 3의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다. 


폭력이 자꾸만 재생산되는 구조 속에서 누군가를 폭력의 화신으로 밀어넣으면서, 실상은 폭력의 이득을 착복하는 시코쿠 주민들은 아니었나 생각해보게 된다. 희생양이 되고, 속죄양이 되는 줄 알면서도 끝까지 저항했던 증조부의 동생과 다카시에게 뉘라서 쉽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그렇게 공동체는 늘 희생양을 필요로 하면서 자신의 유지와 증식을 위한 힘을 기른다. 조선인이라는 외부인을 만나 마을이 단합하면서 보여주는 활기는, 공동체주의의 잠재된 폭력성일 수 밖에 없는데 가시화되지 않기 때문에 더 문제적이다. 나아가 오에는 한 사회가 잉여적 존재를 만들어내 그들을 외부자의 침입을 막기 위한 희생물로 이용해왔던 구조까지 보여주고 있다 - P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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