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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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장을 기어이 비집고 올라와 핏물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흘린 적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기뻐 좋아 날뛰면서도 인간의 무력함이 신물 나고 가련하여 헛헛하게 웃어댄 적이 있기나 했었는지 좀처럼 되살려낼 수 없다. 그저 작은 일상에 취해 우물거리고 히죽이면서도, 차오르는 공허함은 채 한 줌도  되지 않았다. 제대로 살지 않은 까닭이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완벽한 평화, 온전한 자유, 깨질 것 같지 않은 단호한 이성...삶은 날카로웠지만, 나는 잠잠했다.  


   그런데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로 단숨에 뻣뻣해진 내 목줄을 따버렸다. 심장이 헐떡이고, 퀭한 눈 속에 눈물이 차오르고, 송곳 같은 통증이 혈맥을 관류하면서 온 몸이 스멀스멀 아파온다. 인간은 결코 관념적이고 피상적일 수 없는 존재라는 것, 인간의 한계 그 너머를 갈망하며 성큼 성큼 걸어나가 버리는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라는 것, 더러움과 오물 속에서도 꽃을 찾고 성스러운 것을 발견해내고 싶어 안달하는 존재라는 것, 인간의 굴레를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결국은 굴레 속에서만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 설명할 수 없는 것도 많고 납득할 수 없는 것도 많은 세상이지만, ‘사는 것’말고는 그 어떤 저항도, 반항도 허락되지 않은 존재라는 것...아픔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조르바는 <생의 한 가운데>의 니나 부슈만을 닮았다. 날것으로의 생을 가공하지 않고 두려움을 참아가며 벌컥 벌컥 들이킨다. 힐난도, 훈계도, 질책도, 야유도 그에겐 소용없다. 틈만 나면 하나님이 없다고 소리치지만, 조르바야말로 가장 하나님께 가까이 간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분명 하나님이 아담을 만들고 키스하라고 손을 내밀자, 사내는 이봐요, 영감, 비켜 줘야 가든지 말든지 하지! 소리쳤을 거라는 대목에서, 조르바의 표현 때문에 한참을 웃었다. 인본주의 본향, 그리스에서라면 하나님을 이런 방식으로 상상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조국 그리스를 위하여 터키인들을 죽이고 나서야, 인간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에 염증을 느꼈다고 고백하는 조르바, 늙고 병든 오르탕스 부인을 때로는 희롱했으면서도 가장 애처로이 사랑하고 존중했던 한 사내, 금식과 금욕에 지친 수도승에게 악마에게서 벗어나려면 파라핀을 들고 수도원에 불을 지르는 게 구원이라고 일갈했던 인간, 신성한 야만이란 게 무엇인지 삶으로 보여준 구도자..조르바의 이야기를 읽는 내내 활자는 그가 켜는 산투르가 되고, 그의 춤사위가 되는 듯 했다.  


...나는 사느라 시간이 없어 글을 쓸 수 없고, 두목은 쓰는 데 시간을 뺏겨 살지 못하는 겁니다..두목..당신은 믿으시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마구간에서 태어났다는 말? 어릴 적에 할머니는 갖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나는 한마디도 믿지 않았어요..그러나, 지금, 나이를 먹은 지금..나이 먹으면 대가리가 물렁물렁해지는 걸까요, 나는 그런 이야기를 다시 믿기 시작했어요...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가진 걸 다 걸어 볼 생각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두니까. 이러니 줄을 자를 수 없지요...그리고 나는 오늘 문학의 아름다운 징표를 찾아냈다. 
    

     조르바가 버찌를 잔뜩 먹어 버찌를 이겨 냈듯이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책을 쓰고 읽으면서 책을 극복했듯이 나는 이제 불평을 멈추고, 덴덕스럽고 물컹이는 삶의 편린들을 잘근잘근 씹어 삼킬 참이다. 내게 주어진 삶대로 사는 것, 부활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는 확신을 얻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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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주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問 라이브러리 3
최장집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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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기를 미루고 있던 <후불제 민주주의>를 건듯거리며 넘기다가 우연히 최장집 교수님과  관련된 대목을 읽고, 이 책부터 읽기로 작정했다. 최장집 교수님의 정당정치에 큰 틀에서는 공감하면서도 날선 정치 현실에서는 실제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는 듯한 어투가 불을 당긴 셈이 됐다. 결과적으로는 독서의 순서가 제대로 잡힌 것 같다. 현실 정치인으로서는 뜬구름잡는 이상주의라고 불편해할 수 있겠지만, 제 3자의 관점에서 독서를 시작한 나로서는 이상을 먼저 알고, 현실 이야기를 듣는 것이 훨씬 효용적이라는 판단이 든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덕주의, 민족주의-국가주의, 신자유주의의 관점이 상호교차하고 결합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정치에 있어서 참여의 투입을 축소하고, 효율적인 정책 산출 중심의 체제로 전환시키는 효과를 보이고 있다고 진단했다. 민주화를 지향하는 민중운동이 갖는 ‘총체성’의 비전은 강력한 힘의 결집, 혁명적이고 전투적인 방식으로 전개되지만, 민주화된 이후에는 단일 동맹을 유지하기 힘들고, 대중들의 사회경제적, 계층적 지위와 역할에 따라 필연적으로 해체될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는데,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은 앨버트 허쉬만의 갈등에 대한 소견이었다. 갈등은 나누는 것이 가능한 갈등이 있고, 나누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갈등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사회 경제적인 문제는 나눌 수 있는 갈등이고, 민족문제는 나눌 수 없는 갈등이라는 것이라는 것.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노동, 사회 복지 문제 같은 나눌 수 있는 갈등의 문제를 다루면서 나눌 수 없는 갈등의 관점과 틀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국가냐 시장이냐, 기업이냐 반기업이냐, 세계화냐 반세계화냐 하는 등의 적대적 정치로 대립하고 있다고 일갈했다. 적극 공감. 

   기득권의 경험이 없던 진보 진영이 관료들에게 끌려 다닐 수 밖에 없음을 분석한 대목은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시려졌다. 어느 교수님의 지적대로 한 편은 영혼이 없고, 또 한 쪽은 정책이 없다는 쓴 소리를 확인한 것 같은 마음도 들었다. 

  가장 큰 문제는 진보 진영에서 과연 진보라며 추구하고 있는 바를 스스로 제대로 정의하고 있나 하는 점 아닐까 싶다. 민중운동을 통해 정치인으로 자라난 세대를 바라보면서 내가 모순이라고 느끼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진보와 정진의 정의를, 시민이 아니라, 민중의 힘을 딛고 자라난 정치인이 인정하고 힘을 실어야만 진짜 진보라고 귀결되는 것 같은 외관을 갖는다는 점. 스스로 깨닫든 그렇지 못하든, 어느 순간 자신 스스로가 진보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체득하고, 그 틀에 갖힌 후에는 현실의 다양한 목소리와 주장을, 단순히 진보를 와해하는 세력으로 일순간에 몰아갈 수 있다다는 것이다. 즉 내가 보기에는 진보의 독점 내지는 독식의 현상이 나타난다. 총체성의 비전을 가졌던 세대가 물밀듯이 몰려오는 다양성을 감당할 능력을 갖출 시간이 부족하다보니, 오히려 소통의 문이 좁아졌고, 누구는 눈밖에 나면 오히려 적으로 낙인찍기가 스스럼 없이 가능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갈등 문제의 본질적인 내용 대신 껍데기에 천착하다보니, 혈관으로 스며드는 세밀한 정책이 제 때 생산되지 못한다.

  씁쓸한 것은 진보라고 불리우는 정당들이, 또는 국회의원이나 정치인들이 틀을 바꾸는 법안이나 정책을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틀을 바꾸고 싶어 하는 시민과의 연계가 소원하다고 이해한다면 너무 편견에 사로잡힌 단견이 될까. 민주화를 위해 뛰어온 주역들이 직업 정치인이 되자, 개인의 의지를 떠나서, 누구든 지배와 관리의 논리를 가질 수 밖에 없었고, 결국은 스스로가 죽는 십자가를 져야만 틀 바꾸기가 가능한데, 죽는 것도 힘들어졌다고. 아이러니하게도 뿌리에 손을 못 대니, 보수나 진보나 내놓는 정책이 별반 다를 것 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냉소는 의식의 결여가 아니라, 불을 지피는 정책의 고갈에서 비롯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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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 - 법학자 김두식이 바라본 교회 속 세상 풍경
김두식 지음 / 홍성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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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태신앙으로 자라온 나는 심각하게 신앙, 믿음의 문제를 고민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교회에서 배운 대로, 목사님의 말씀에 따라 모든 사안을 판단하면 100% 진리라고 믿었다. 죄와 죄가 아닌 것을 구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으며,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이나 말이 선의의 태도로, 결국은 예수님께서 그토록 싫어하신 정죄를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 본적 없이 잘도 지냈다. 목사님들의 지루한 설교 말씀은 전혀 은혜스럽지 않아도, 여기서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은 내 영성이 매우 부족한 까닭이라고 바로 결론 지었다. 무슨 말을 하든지 막힘없이 성경 말씀을 따박 제시하는 친구들 앞에서, 야곱이 요셉의 아버지인지, 다윗의 아내가 누구였었지, 예수님의 열 두 제자의 이름을 모두 외우지 못하겠는 내 신앙이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었다. 성경의 숱한 이야기를 모른다는 것은 곧 믿음이 약하다는 증거라고 믿기까지 했다. 사춘기 시절 신앙의 방점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개괄하여 줄줄 읊어대는 데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믿음은 점점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그리고 나와 이웃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이지, 관조적으로 해석하고,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됐다.  다행히 기복 신앙에서 약간 벗어난 모습으로 성장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내 신앙은 철저하게 “나”중심의 믿음에만 갖혀 있었다. 내게 유익이 되는 방향의 믿음을 추구하니, 마음은 언제나 평안했고, 만족스러웠다. 나 자신이 꽤 그럴듯한, 나 정도면 적어도 욕은 안 먹는 크리스챤이라고 대견하게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사실 김두식 교수님의 <헌법의 풍경>을 검색하다가, 새롭게 <교회속의 세상, 세상속의 교회>를 출간하신 소식을 알게 됐고, 순전히 호기심이 동해 먼저 읽게 됐다.  


지금까지 지내면서  한 번도 신앙의 삶에서 멀어져 본 적 없는 나는-불성실한 예배자였기는 했지만-지금 교회의 모습은 불완전해도 온전하며, 그리고 이단은 당연히 앞뒤 따지지 말고 멸절해야하며, 명백한 죄의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는 이들은 분명히 죄인이라고 선포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며 참된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이해했었다. 사회는 개혁하고 바꿔 나가야 하지만, 교회는 예수님의 몸된 처소이기에 나같은 믿음 약한 성도가 그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조차 때로는 불경스러운 것으로 오해하기까지 했다. 교회에 약하고 병들고 가난한 자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전혀 깨달음이 없었으며, 크리스마스 때 잠깐, 선교 시즌에 잠깐 눈에 띄게 헌신하는 것으로써 내 역할은 충분하다고 자만하고 있었다. 성공해야 하나님께 영광이고 실패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망설임 없이 단정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내 편이라고 생각했던 것, 흔들림 없이 이것을 확신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굳건한 신앙의 척도라고 이해했다.  


책장을 넘기면서, 나는 어떤 크리스챤이었는지 다시금 돌아보게 됐다. 예수님께 너 때문에 정말 하나님을 만나야할 사람들이 떠나고 있다고 꾸짖음 당했던 그  바리새인이 아니었는지. 번지르르한 말로 평화와 화평을 이야기하면서도 스스로 죽는 것보다는 죽이는 쪽에 거리낌 없이 편승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아이들을 만나면서 나는 상황 속에 놓인 죄인을 사랑하셨던 예수님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줄곧 그 놓인 상황과 맥락을 벗겨내고 분리되어 단독으로 서있는 죄인을 향해 있는 힘껏 돌을 던지면서, 이것이야말로 잘 믿는 믿음의 표징이라고 떠들고 있는 내 자신을 보게 됐다. 낙태와 씨름하는 아이들, 죽음을 꿈꾸는 아이들, 명백한 죄에 빠져서 고통 받고 신음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처음...조금이라도 생각해보게 됐다.  


답을 구하고 있던 내게, 이 책은 더 큰 위안과 힘이 됐다. 구호를 외치고, 높아지고, 명징하게 분석해내는 그것이 아니라, 낮아지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부족해도 숨어서 헌신할 수 있다면, 그것이 정말 예수님이 원하시는 신앙이며 교회라는 사실을 다시 확신하게 됐다.  

 어디서고 제대로 들을 수 없었던 기독교 피의 역사와 국가와 교회의 연합에 대해 읽을 수 있었던 것이 감사하다. 신앙을 내세우며 외식을 행하고, 신앙으로 감싸 안으며 정의를 왜곡할 수 있는 지점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도 아울러 함께 읽은 것 같아 기쁘다. 내가 서 있는 지금, 이 지점에서 꼭 듣고 싶었던 많은 조언, 서릿발처럼 차갑고 아랫목처럼 따뜻하다. 그러므로  더욱 다른 이들에게도 읽도록 적극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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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지음 / 사회평론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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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책장을 덮고 글쓴이가 검사가 아니었더라면, 변호사가 아니었더라면, 그리고 삼성에서 근무하지 않았더라면..엉뚱한 궤적의 질문을 나도 모르게 쏟아냈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법치 위에서 살아가는 어느 재벌가의 모순을 적확하게 담아내려면, 법리를 아는 동시에 재벌을 직면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책의 족적은 김용철 변호사의 이력과 간담이 아니면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으리란 확신 때문이었다. 저자 스스로는 어렵고 힘들어 어떻게든 비껴가고 싶은 길이었는지 몰라도, 책을 읽는 내내 그를 위해 예비된 길이었던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이유야 어떻든 무노조 삼성, 신경영 삼성, 도전정신과 글로벌 마인드로 무장했다는 초일류 기업 삼성을 두고, 경제가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는 요즘 시대, 누가 이렇게 솔직하고 직설적인 화법으로 예리한 칼끝을 겨눌 수 있을까.  


   회사와 회장의 이익을 저울질할 때, 자연스럽게 회장 일가의 권익으로 기우는 구조조정본부의 핵심 참모들, 비자금을 관리하고 현금 다발 수송에 참여하는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들, 법조계와 언론을 향한 치밀하고 치열한 전방위 로비, 단 61억으로 그룹을 장악하려는 불법 승계, 사위와 외척을 배제하고 검증되지 않은 능력으로 직계끼리만 벌이는 경영 혈투, 수장이 독단과 아집으로 결정한 사업 실패를 불평 한마디 못하고 우량 회사가 떠맡아야하는 왜곡된 그룹 문화, 기형적인 출자구조와 이를 막기는커녕  우회로를 터줘 결국 이건희 회장의 삼성 그룹 전체 지배구조를 강화하는 데 한몫 단단히 한 사법부의 이해 못할 판결들, 막도장과 거짓 서류로 이사회를 꾸며 회사법을 농락하는 수려한 삼성 행정력, 도덕과 원칙 없는 경제 제일주의가 현실을 얼마나 더 암담하고 처참하게 만들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끔찍해진다. 이렇게 곪고 썩었는데도, 삼성이 여지껏 잘 버틴 것은 그나마 음지에서 땀흘린 노동자와 전문 기술 인력 때문이라는 발견도 위안이 되지 못한다. 저자의 표현대로 ‘실력도 신통치 않고, 인품이 썩 뛰어난 것 같지도 않은데 대단한 실력자 취급 받은 사람’들이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바뀌어도 반칙과 변칙을 무기 삼아 철옹성을 쌓고 거칠 것 없이 경주하는 한, 판도는 크게 바뀌지 않으리란 영리한 판단이 앞서는 까닭. 
    

  책을 읽기 전 김용철 변호사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삼성 문제로 직격탄을 날릴 때만 해도 결과야 어떻든 그 시작의 행보만으로도 가장 잘 한 일이라고, 이쯤에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난 후 삼성을 고발한 것보다 이 책을 집필한 것이 가장 훌륭한 결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치 민주화의 기치를 들 때 시대를 깨우는 책들이 있었다. 활자들이 격려했고, 무너진 가슴들을 세워 나갔다. 경제 민주화를 위한 시대적 과제를 앞에 둔 지금, 역시 양심을 뒤흔들고 영혼을 깨우는 책이 필요하다. 이 책이야말로 그 시발의 첫 걸음이 되리라 생각한다.  


  삼성을 끝내 배신한 배신자, 뭔가 이득을 챙기려고 꼼수를 부리는 몸부림...고발을 바라보는 이견들이 난무했었다. 저자에게는 로댕의 연인, 끌로뗄의 한 마디를 남기고 싶다. ‘바람이 불면 순식간에 사라질 사람들이 아니라, 폭풍우가 불어도 끝까지 곁에 남아 있을 사람들을 바라보라’는 것, 그리고 힐난하고 비난하는 이들에게는 홉스의 조언을 덧붙이고 싶다. 누가 이 일로 이득을 보는지 따져보면 실체를 알 수 있다고 했다. 김용철 변호사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폭로와 고발로 얻은 이득이 무엇이었는지 따져보면 좋을 것 같다. 힘없고 이름 모를 이들과의 숱한 연대, 그리고 삼성의 실체를 알려 국민에게 경제 민주화의 시초를 당긴 것이, 과연 그들에게 어떤 실제적인 이득이 될 수 있는지 의문인데 말이다. 
   

  저자는 모든 독자에게 숙제를 남긴다. 정의가 패배하도록 방치하는 게 옳은 일이 될 수 있도록 공범이 될 것인지, 아니면 결국에는 ‘역시나’를 뒤집고 끈질기게 경제 민주화의 길로 나아가는 행보에 의연한 박수를 보내며 작은 힘이라도 더하는 동지가 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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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를 위하여 2
이문열 지음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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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택>이후 거의 10여년 만에 이문열씨의 소설을 읽게 된 것 같다. 소설의 내용보다는 문체를 탐닉하는 데 집중했던 시절, 작가의 무게감 있는 필력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전적으로 기존 체제에 순응했던 장씨 부인의 삶을, 주입되고 강요된 것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며 거창한 주제로 포장하고, 나를 위시한 많은 여성에게 ‘인간’이 아니라 먼저 ‘여자’로 살기를 강요하도록 하는 데 작가가 앞장서고 있다는 배신감은 한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 같다.  


<황제를 위하여>를 읽고 난 후 이제는 앞으로 한동안 치열한 시대 속에서 살아야했던 작가의 삶의 처세를 잊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시대를 거부하는 것보다는 삶과 역사는 원래 그런 것이라고 이해하면서,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것, 그래서 투쟁하고 저항하는 모든 행동들을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부질없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는 자신감을 깃들이는 것. 그리고 이러한  지적 근거들을 고전으로부터 수렴하여 빼어난 필력으로 뽑아내는 작가의 천재성에 대해 내내 씁쓸한 감탄을 되내일듯 싶다. 지적으로 뛰어난 이들은 언제나 자신의 행보를 논리성과 합리성으로 뒷받침하지 못하면 안절부절하곤 하는데, 이런 의미에서 <황제를 위하여>는 모든 불의를 바라보고 있으나, 가만 앉아 있던, 또는 가만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이들에게는 큰 위안이며 안식처가 아니었을까, 잠시 허튼 생각도 스쳤다.  


 서문에서 작가는 요새의 젊은이-그러니까 1980년대 후반-들이 서양의 철학이나 고전을 숭상하면서,  동양의 원류를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어 동양적인 것의 소중함과 귀중함을 일깨우기 위해 소설을 집필하게 됐다고 주장했지만, <정감록>을 드리우고 엉뚱한 황제를 앞세운 소설의 결과는 결국 노장사상을 덧입힌 허무주의, 무정부주의로 이어져, 시대의 중심에서 치열하고자 했던 젊은 가슴들을 일순에 소강시키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의심마저 든다.  


 자신이 천명을 받은 황제라고 믿었던 정씨의 실록을 옮기면서, 작가는  4․19까지만 해도 제법 황당하고 어수선하게 느껴질 정도로 굵직한 삽화들을 배치했지만, 이후 군사정권의 도래와 맞물려서는 정처사의 도가에의 몰입에 지나치게 지면을 할애한 것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처사의 늙음 때문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구한말, 일제시대, 한국전쟁을 관통하며 이어지는 소설의 맥은 결국 고전과 역사를 들춰보면 이 모든 것이 이미 전에도 있어왔던 것이고, 결국 변화와 정진을 주장했지만, 나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식의 한탄으로 이어지기 때문. 시지프스의 바위처럼 올려놓아도 끊임없이 굴러 떨어질 돌덩이를 두고 전력질주하는 것은 결국 어리석음이라는 거짓 달관자의 단언처럼 느껴졌던 까닭도 있었다.  


 어쨌든 소설로서의 재미는 진중한 문체와 방대한 고전의 인용, 돈키호테식의 이야기 배치로 한껏 살려냈다. 아쉬움이 있다면, 소설의 도입부와 마지막 부분의 지면이 상대적으로 작아 본론으로 들어가고, 본론으로부터 나올 때, 이야기의 매듭이 다소 매끄럽지 않은 느낌이 있다. 작가 스스로도 인정한 부분이고 보면, 편집과 출간 사이에서, 작가도 시간에 쫓겼던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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