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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평점 :
어느 순간 좌파 기독교란 단어는 우리 사회에서 참 많이 낯설어졌다. 굳이 우파라는 말을 붙이지는 않더라도, 기독교는 우파의 상징인양 정형화되고 있다.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는 것은, 진보라면서도 자본주의 사회의 틀은 그대로 수렴하면서 조금씩 고쳐나갈 뿐이라고 믿는 개혁주의자들이라고 일갈하는 김규항. 독설가가 쓴 <예수전>이라니. 대표적인 좌파 논객이라고 불리우는 그가 만난 예수님은 누굴까.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치실 때, 성경에 기술된 "측은히 여기시고"란 대목에 그는 집중한다. 설명을 들어보니, 원어로는 "애가 끊어진다"는 표현이며, 처음 만난 병자들을 보면서 "애가 끊어질 수 있는" 예수님이야말로 혁명가라는 것이다.
영성 없는 혁명, 혁명 없는 영성을 논하며 닭의 목을 비틀 듯 어떤 망설임도 없이 위선을 뒤틀어버린다. 삶으로 보여주지 못하는 혁명, 사는 것이 되지 못하는 영성. 그 언저리에서 구호만큼 매력적인 것이 또 있을까. 잘 살고 있다고, 바른 방향으로 진리의 편에 서 있다며,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기는 얼마나 쉬운가. 이미 누릴 것을 누리면서, 배울 만큼 배운 지식으로 감동을 이야기하고, 미래를 그려나가는 교양인들에게, 어쩌면 위선의 몸짓과 언어인줄도 모르고 거칠 것 없이 질주하는 무심한 내 심연을 향해, 촉을 세워 그가 내던지는 한 마디..'측은히 여기시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오른 뺨을 때리는 자에게 왼쪽 뺨도 내밀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는, 인간 자존감의 회복까지 승화시키고 있다. 오른 뺨을 맞는다는 것은 상대가 손등으로 때렸다는 것이며, 왼쪽 뺨을 내민 것은, 비굴하게 여기도 때려달라거나 단순히 상대를 용서하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맞는 나 역시 존엄한 인간이니 다른 사람들과 같이 오른쪽 뺨을 손등으로 때릴 것이 아니라, 때리려거든 왼쪽 뺨을 때리라는 비폭력 저항 정신의 발로라는 것이다.
죽기까지 각오하고 처자식과 재산을 버리고 떠난 제자들에게, 혁명의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이는 예수는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웠으나, 도무지 이해 못할 역설의 십자가를 택하는 모습을 보면서 변화산에서 졸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스승의 행보를 마지막까지 인간적으로 존중하고 싶어 자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식의 상상력도 발휘한다. 부활 사건을 겪고 로마의 박해를 받은 후 쓴 복음서에 대해, 당시 시대적, 사회적 정황을 곁들여 세세히 분석하면서, 인간 예수에 대하여 제자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했을런지, 저자는 철저하게 불의 언어로 되살려내고 있다. 이 책만큼 예수님의 부활을 확증하는 책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예수님은 영성을 갖춘 진짜 혁명가의 삶을 사시고, 다시 살아나셨다.
불행한 시대와 억압받는 사회 속에서 한 인간으로써 철저히 주어진 삶을 사신 예수님을 만난 저자가, 왜 궁극적으로 불온한 좌파일 수밖에 없는지, 김규항의 다른 책은 읽지도 않았는데, 감이 온다. 돈과 명예와 기득권의 논리로 점철된 세상을 깨고 싶다며, 철저하게 세속의 논리로 다스려지는 세계의 심장을 겨누면서, 언제나 가지지 못한 자, 가난한 자, 억압받는 자 곁에 섰던 살아있는 예수님을 만났는데, 좌측으로 걷지 않고 어떤 길을 갈 수 있을까, 저자는 많은 고민을 했을 것 같다. 영성에 관한 한 이 책만큼 도전이 되었던 책은 없었다. 혁명에 관한 한 이 책만큼 에둘러 말하지 않고 정곡을 겨누는 날카로운 책은 만나보지 못했다. 영성과 혁명의 두 이정표를 가지고 다시 복음서를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