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러의 감정수업 - 내 마음의 주인으로 살기 위한 감정 선택 훈련
게리 D. 맥케이. 돈 딩크마이어 지음, 김유광 옮김 / 시목(始木)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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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러 열풍 이후 실제 감정의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안내하고 실습하도록 하는 일종의 지침서격인 책이다.

 

트라우마는 비합리적인 사고 체계를 거쳐 일종의 목적을 가진 감정이 만들어낸 허상일뿐이므로, 트라우마는 없다는, 아들러의 관점을 성실히 반영한 실용서답게 매 장마다 기본 전제에 충실하다.

 

첫 장에서는 감정은 선택할 수 있으며, 일상에서 표출되는 다양한 감정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특히 감정은 평소 우리의 믿음이나 관점이 결정하는 것으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면 감정이 변한다는 점을 설명한다. 바꾸어말하면 관점의 스펙트럼을 넓혀야하고,  현재 시점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여러 맥락과 중층의 진실들이 교차하며 표출된 결과라는 점을 이해하도록 강조한다.

 

또 감정 선택의 8가지 원칙으로, 감정과 생활 양식 탐구하기,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과거에 얽매이지 않기,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깨닫기, 감정의 목적을 인식하기,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기, 언어습과 바꾸기, 감정을 바꾸는 구체적인 계획 세우기 등을 제시하면서 감정을 컨트롤하기 위해서는  더 고차원적인 인지체계가 작동해야 함을 드러내고 있다.

 

다양한 감정의 목적이나 그러한 감정에 쉽게 노출되는 유형을 분석한 대목은 흥미롭다. 가령 분노는 타인이나 상황을 통제하려 하거나 경기에서 승리의 열정을 고취하기 위하여, 그리고 상대에게 복수하거나 억울한 경우 권리를 보호하려는 목적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우울의 궁극적인 목적은 '책임회피'이며 부정적인 사고 방식,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은 사람,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높은 사람, 화를 잘 내는 사람 등에서 발현율이 높아진다는 점에 주목한다. 죄책감의 목적은, 본인을 스스로 처벌해 심리적 자유를 얻기 위함, 의무를 저버리려는 목적, 스스로를 변명하기 위함. 타인에 대한 우월감을 표시하거나, 분노를 감춤 또는 자신의 선의를 입증하기 위함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불안은 위험요소는 과대평가하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과소평가할 때 나타나며 나쁜 일이 벌어진다는 가정하에 행동할 때 생긴다는 점도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아들러 관점을 반영하여 기쁨이나 행복도 지속적인 훈련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ACE 방법을 활용하라고 제시하는데, A(인정), C(선택), E(실행)의 3가지 절차가 그것이다. 자신과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이해하고, 새로운 목적과 믿음, 감정을 선택한 후 새로운 선택을 위한 행동을 실행하라는 것이다.

 

실용서답게 아들러 철학의 기본을 소개하기 보다는 실제 감정을 다루는 기술에 대하여 집중하고 있는데, 다양한 감정의 목적과 유형을 소개하고, 실천적인 전략을 제시한 점은 긍정적이지만, 실제 실천하고 실습하는 부분이 더욱 구체적이어야 저술의 소기의 목적에 더욱 가까워지지 않을까 싶다. 덧붙여 같은 상황, 같은 감정을 두고 프로이드나 아들러식의 접근법으로 다룰 때 어떤 점이 달라지겠는지 비교하는 부분이 있다면 더 깊이 있는 저작이 되지 않을까 싶다.

똑같은 사건을 보고도 전혀 다른 감정을 느낀다면, 결국 관점이 감정을 결정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나의 감정은 나의 관점을 변화시킴으로써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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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HOW TO READ 융 How To Read 시리즈
데이비드 테이시 지음, 박현순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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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건강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면서 찾아 읽게 되었다. 프로이트, 아들러가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상정하고, 개인의 심리적 치유에 접근한 반면, 인간의 존재를 영적인 존재로까지 확장하면서 정신 그 이상의 접목을 통해 영혼의 치유까지 나아가야한다고 보았던, 그러므로 개인을 넘어서 민족, 사회, 역사의 치유까지 확장되는 융의 생각을 개괄적으로 알아보는 데 더할나위 없이 좋은 책이다.

 

융의 저작에서 직접 발췌한 내용을 통해 융의 목소리로 융의 주장을 정리하므로, 비교적 짧은 시간에 깊이 있게 사색하는 데 도움이 된다.

 

융은 성역할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생각과 반대로, 성역할은 심리적이며 생물학적인 영향으로 정해진다고 믿는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음과 양처럼 공존하는 것으로 여성은 주로 연결성과 사랑을 의미하는 여성 원리에 의해 지배되고, 남성은 변별력이나 인식과 관련되는 남성 원리에 의해 지배된다고 주장하면서 남성은 무의식적으로 여성적인 측면인 아니마를 가지고 있고, 여성은 남성적인 측면인 아니무스를 가지고 있는데 문화나 종교적인 의식을 통해 남성성이나 여성성은 본성으로부터 성취되는 것이라는 견해를 밝힌다. 융은 사회적인 통과의례가 희미해지면서 남성성과 여성성의 전도 또는 와해가 일어나는 점을 지적하면서 반대성의 본성이 인격에 통합은 되어야하지만 원형적인 남성성과 여성성의 보존에 방점을 찍는다.

 

융은 또한 신경증은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신경증이 우리를 치료한다고 주장하면서 정신과 질환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살지 못한 삶은 무의식에 축적되는데, 신경증의 발현은 편향된 정신적 에너지의 고갈을 알게 하는 동시에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상황이 임박하기 전 우리에게 경고하는 일종의 신호로 작동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신경증이 발현되지 않았다는 의미는 정신 에너를 집중하여 인간으로서의 이상적 삶, 즉 본질에 집중하는 대신 적당하게 타협하면서 살고 있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친다.

 

융에게서 무의식은 영적인 세계와 연결되는 일종의 통로로 해석되는 측면이 있다. 자아가 내면의 상들과 대화하며 확장된 의식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명상, 일기 쓰기, 묵상 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꿈은 우리를 원형의 삶으로 이끄는 일종의 상징이며, 의식과 무의식을 화해시키는 장이 될 수 있다는 데서 다른 학자들과 견해가 달라진다.

 

융은 영적인 의미를 삶에 부여함으로써 정체감, 내적 현실감과 실체감을 부여하여야 하며 이것은 내면의 자기를 대면하게 함으로써, 사회적 가면을 벗어버리고 그 이상의 것을 각성하게 하는 동시에 건강의 근원이 된다고 단언한다. 융은 시, 음악, 예술, 의례, 의식 등과 같은 종교를 통해, 자아 바깥에 존재할 줄 아는 묵시이자 상징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고, 그 결과 자아중심성에서 벗어나고 합리성의 전복을 극복할 수 있다는 데까지 주장을 확장시킨다.

 

그는  우리의 병은 영혼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상징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다고 진단한다. 상징적인 삶을 살지 못하므로 진부한 삶을 견디지 못해 탈출 경로를 찾기 위해 춤, 여행, 스포츠, 오락 등 온갖 형식을 만들어내 떠들석한 행위와 특별한 진기함에 중독된다고도 주장한다. 초월된 영적인 의미와 통합됨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상징과 같은 일종의 그림 언어로 이해된다면 일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생의 편린들은 결코 진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평범하고 소소한 삶이 인간 그 이상의 영적인 의미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통합을 추구하면서 초월을 위한 신중한 수단을 탐색해야하는 데, 그것이 약화되면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형태로 표출된다고 주장하면서 그 대표적인 예로 전쟁을 든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융은 사람들이 전쟁을 기뻐하는 모습을 포착하게 된다. 그 이유로 사람들이 전쟁을 사회나 정치의 문제로 떠넘기면서, 이성이 의례적으로 파기되는 것이 가능해지면 온갖 비합리성이 허용되므로, 마침내 전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통찰력도 발휘한다.

 

융의 주장이 다소 과학적이지 못하고, 비합리적인 주장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탈과학을 통한, 새로운 지평에서의 개인, 사회적 치유에 일종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하게 된다.

 

 합리성과 효율성에 천착하는 시대, 영적 건강의 문제가 도외시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개인을 넘어서서 우리 민족, 우리 사회의 아픔과 병적인 현상들을 이해하고, 치유하는 데 융의 앞선 생각들이  도움이 되리라는 데 확신을 준다.


사람들이 신경증에 걸리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삶이 너무나 합리적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내가 다른 어떤 존재라는 것, 또한 그 속에서 내가 신성한 삶의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 중 한 사람으로서 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는 그러한 상징적인 생활이 결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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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8
헤르만 헤세 지음, 박병덕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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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는 일상의 지겨움과 나태함을 정면으로 반격하면서, 일상성을 위대한 깨달음과 단숨에 연결시키는 미덕을 지녔다.

 

주인공 싯다르타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고자 유일자인 아트만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 고민하며 친구 고빈다와 함께 고행자의 무리들에 합류한다.

 

싯다르타는 사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자아를 버리는 목표를 추구하지만 여의치 않자 해탈의 경지에 오른 고타마를 찾아 나선다. 부처의 경지에 오른 고타마를 만나 가르침을 받지만, 고타마 자신이 성취한 해탈의 경험은 결코 언어로 배울 수 없다는 점을 깨닫고 고타마도 떠나게 된다.

 

이후 싯다르타는 카밀라를 만나 부와 권력을 쟁취하고 육체적 즐거움에 몰입하면서 인생의 기쁨들을 만끽하며 깨달음을 추구하지만, 여전히 자아를 버리고 아트만과 일체화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결국 카밀라를 떠난 싯다르타는 배움 짧은 뱃사공의 조수로 살아가게 된다.

 

싯다르타는 끊임없이 흐르지만, 늘 동일한 물인 강물을 바라보면서, 카밀라에게 얻은 아들을 직접 키우면서, 생의 의지대로 각성하지는 못했더라도 삶의 본능에 충실한 사람들을 마주하며 아트만과 하나가 되는 일체성을 경험하게 되고, 모두와 하나가 되는 체현 과정을 겪는다. 비록 깨달음이 없어도 주어진 일상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아트만과 온전히 통합되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침내는  하나의 얼굴이었다가 모두의 형상으로 흘러가며 다시 하나로 모아지는 범아일여의 경지를 마주한다.

 

죽고, 살고, 만나고, 헤어지고, 성장하고 늙어가는 그 모든 것이 단일성과 동시성을 갖는다는 싯다르타의 마지막 고백을 통해 헤세는 따지고, 나누고, 인식하고, 분절하는 서양적 사고에 균열을 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확신하게 된다. 인식과 삶이 하나가 되도록 통합시키는 일상성의 회복을 통해 삶의 위대함과 깊은 의미를 드러내고자 하는 작가의 결연한 의지와 더불어 흐르는 강물처럼 끊어지지 않고 유려하게 이어지는 문장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감탄하게 되는 작품이다.

 

이 돌멩이는 돌멩이다. 그것은 또한 부처이기도 하다. 내가 그것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까닭은 그것이 장차 언제가는 이런 것 또는 저런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리고 항상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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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 사도신경 강해설교 그리스도교문헌총서 2
토마스 아퀴나스 지음, 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사상과문화연구원 편찬, 손은실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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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의 대가답게 이해하기 쉬운 삽화를 통해 비유를 들어 풀이하는 방식이 아니라 성경 말씀으로 다시 말씀의 의미를 해석하는 정공법을 택한다. 성경의 권위에서부터 시작되는 사도신경 강해는 그러므로 오히려 담백하면서도 묵직한 울림을 준다.

 

서문에서 그는 믿음이 가장 필요한 이유로 네 가지를 꼽는데,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 연합되고, 우리 안에서 영생이 시작되며, 믿음을 통해 현재의 삶이 인도되는 동시에 믿음으로 우리가 숱한 유혹을 이겨낼 수 있다고 설명한다. 특히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은 어리석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에 대하여도 우리 지성의 불완전함을 성찰하고, 자신의 이해를 넘어서는 진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하며, 누군가의 말은 어떻게 믿는지 반문하면서 믿음이 없으면 우리 삶 자체가 구성될 수 없다는 점을 되돌아본다면 보이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을 믿지 않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

 

무엇보다 오직 한 분 하나님이 계시며, 만물의 통치자이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데 우리가 다수의 신을 생각하는 이유로 네 가지 이유를 든다. 인간 지성의 연약함,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인간을 향한 아첨, 자녀와 친족을 향한 육적인 사랑, 악마의 악의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고, 모든 만물을 지으시고 통치하시며 섭리하신다는 데 대한 인식이 흔들리면, 자칫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악마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믿는 마니교 같은 오류가 생길 수 있으며, 세상이 영원하다고 믿거나 또는  하나님이 선재하는 질료로 세상을 창조했다고 하는 생각에 빠질 수 있다는 데 경각심을 준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믿으면 하나님의 위대성을 인식하게 되고, 감사의식이 생기며, 역경 가운데에도 인도되고, 피조물을 바르게 사용하는 데까지 인식이 미칠 수 있게 되며, 마침내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인식으로 인도될 수 있다고 해석한다.

 

또한 하나님이 아버지이자 그리스도가 참된 아들이심을 믿어야 하는데, 그리스도가 선한 사람들과 차이 없는 방식으로서의 하나님의 아들이라거나 예수님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것이 아니라 피조물로 만들어졌다거나 영원이 계시지 않다거나 또는 하나님과 한 본질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식의 오류에 대하여도 성경 말씀으로 반박한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성육신하셨다는 것에 대한 잘못된 이해도 지적한다.  예수님이 동정녀에게 태어나신 것은 동의하나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자격을 얻었다거나, 참된 육신을 가진 것이 아니라 외견상으로만 육신을 취한 것이라든지, 그리스도의 몸이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잉태된 것은 별도의 천상의 육체를 가지고, 다만 마리아를 통과할 뿐이라는 주장, 예수님께 영혼은 없다는 것 등 다양한 이단적 생각을 구체적인 성경 구절을 통해 배격한다.

 

하나님의 신성이 아니라 철저히 인성이 죽는 죽음을 경험함으로써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신 십자가 사건을 바라볼 때, 사랑과 인내, 겸손과 순종, 땅에 속한 것들에 대한 경멸의 모범이 되신, 부끄러운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권고한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한 모든 벌을 감당하기 위하여 음부에 내려가셨고, 다시 부활하심으로써 우리도 그의 권능을 힘입어 다시 살게 되는 그 의미에 대하여도 섬세하게 되짚어준다.

 

저자는 형식적으로 되풀이하는 신앙고백으로서의 사도신경이 얼마나 위대하고 깊은 의미를 가지는지,  한 구절 한 구절씩 집요하게 탐색함으로써 말씀의 권능과 권위를 다시 인식하게 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창조, 사랑,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의 교리를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한편 아퀴나스의 강해설교를 따르다보면 연옥의 존재나 부활의 모습 등 개신교와 천주교의 교리상 차이점도 설핏 이해하게 된다. 또 교리의 중요성에 대한 자각과 동시에 지나친 논증이 오히려 말씀을 제한할 우려에 대하여도 생각하게 된다.

 

독자에게 읽히는 의미는 제각각일지라도 사도신경에 담겨진 엄청난 의미를 되짚어보면서 믿음과 신앙을 다시 점검하고, 묵상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인 것만은 분명하다.

한 사람으로 인해 죽음이 들어왔기 때문에 또한 한 사람으로 인해 죽은 자들의 부활이 옵니다...중략..영생에 있어서 첫째 요소는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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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세트 - 전3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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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표면적인 줄거리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방탕하고 이기적인 노인인 아버지 표도르 카라마조프가 누군가에 의해 피살되면서 살인마를 추적하게 되고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는 과정이 그려진다.  큰 아들 드미트리는 약혼녀가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애인을 사랑하는 다혈질 청년으로 아버지를 죽였다는 죄를 뒤집어쓴다.  둘째 이반은 형의 약혼녀를 흠모하는, 이지적이고 냉철한 인격의 소유자로  모든 것이 가능하며 신은 인정하더라도 신이 만든 세계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신념을 설파한다. 셋째, 알렉세이는 온유한 성품의, 사제를 꿈꾸는 청년으로 비참하다못해 처참한 현실을 영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인물로 묘사된다. 스메르자코프는 표도르 카라마조프의 사생아로 추정되는 인물. 하인이자 요리사로 뇌전증을 앓고 있으며, 이반의 신념에 동조하면서 표도르 카라마조프를 실제로 살해한 범인이지만, 법적으로는 무죄로 추정되는 가운데 스스로 유명을 달리한다.

 

일견 단순해 보이는 소설인데도 극찬을 받은 이유는 아마도 다양한 인물들로 투영되는, 작각의 본심이 날카로운 삽화로 제시되면서 독자들을 매료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특유의 철학, 신앙, 신념 등을 소설 곳곳에 배치하면서 문학과 인생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능숙하게 드러내면서도 소설의 줄거리를 추적하는 시선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감성, 이성, 영성으로 대비되는 세 아들과 인간의 죄된 본성을 직접적으로 표출한 스메르쟈코프를 통해 인간에게 구원은 무엇이며, 진정한 혁명은 어떠해야하는가를 집요하게 묻는다. 삶과 죽음, 법과 정의, 사실과 진실이 뒤엉키는 현실을 두고 우리의 시선은 어디에 머물러야하겠는지 질의한다.

 

기억에 남는 삽화는 아마도 누구에게나 이반이 읊는 대심문관 편일 것이다. 15세기의 어느 날, 웅장한 화형대에 100여명이 넘는 이단자들이 처단되는 그 틈으로 예수님이 재림하시게 된다. 다시 예전처럼 아픈 자를 치유하고 눈먼 자를 눈뜨게 하며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베푸는 가운데, 아흔살인 대심문관 추기경이 지나가게 되고 곧장 예수님을 잡아들인다. 그는 한눈에 재림하신 예수님인 것을 알고 비좁은 감옥에 가둔 후 한 밤중에 몸소 횃불을 들고 찾아간다. 그리고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재림해서 대심문관의 일을 방해하는지 따져묻는다. 오늘은 열광하지만 내일은 또 다시 민중들이 죽이려 들 것을 뻔히 알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광야에서 사탄이 건넨 세 가지의 유혹에 대해 예수님처럼 영구적이고 절대적인 이성을 가지고 겸허하게 비켜갈 사람은 많지 않은데 그 길을 유동적인 이성을 가진 인간들에게 보여준 것이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인간은 빵이 필요하고, 권력이 필요하며, 명예가 필요한 단순한 존재인데, 왜 진정한 자유의 길을 제시하여 번민에 빠지게 하냐는 것이다.  대심문관인 추기경을 비롯하여 우두머리들은 천상의 빵을 고대하기 어려운 수많은 인간들에게 지상의 빵을 대신 줌으로써 그들의 자유를 대신 짊어졌고, 연약하게라도 예수를 사랑하게 했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예수를 사랑하고 그 길을 걸을 수 있는 이들은 소수인데, 그렇다고 다수의 인간을 버려두는 것이 옳으냐는 역설로 예수님을 몰아붙인다.그리고 대심문관은 예수님처럼 기적, 신비, 권위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은 거의 없다면서 예수님의 답변을 기다리지만, 심연을 꿰뚫는 온화한 미소만 짓고 대심문관에게 입맞춤을 한다. 대심문관은 문을 열고 다시는 오지 말라면서 소리치면서 예수님을 놓아준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과의 입맞춤을 통해 가슴이 불타오르지만,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또 다른 삽화는 알렉세이의 스승 조시마 장로가 만난 신비스러운 방문객에 관한 부분이다. 오랜 시간 동안 관직생활을 한 후 높은 지위의 부유한 사람으로써 자선가로 활동했던 사람이, 위험을 무릅쓰고 경멸을 마다않고 옳은 일을 감행한 조시마 장로에게 그가 느끼는 큰 기쁨을 자신도 소유하고 싶다며 찾아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죽였고, 그 죄를 다른 이가 뒤집어쓰고 죽은 사실을 고백하게 되고 조시마 장로는 진실을 공표하도록 설득한다. 그를 위로하기 위해 우연히 펼친 말씀이 밀알 하나가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부분이었다. 이후 그는 진실을 밝히고 유죄를 입증하는 모든 증거를 내밀었지만 사람들은 그가 정신이 나간 것이라고 단정하고, 수사도 중단된다. 그는 이후 죽어가는데, 마지막으로 만난 조시마 장로에게 영혼 속에서 난생 처음 천국을 느끼고 있고, 하나님이 어여삐 여기셔서 자신을 부른다고 고백하면서 사실은 진실을 말한 그 날, 조시마 장로까지 죽이고 싶었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셨다면서 찬양한다. 그의 죽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행했으며, 오히려 조시마 장로가 그를 어지럽혔다면서 온 도시가 장로에게 대항했다는 것이다.

 

마지막 삽화는 가난한 퇴역 대위 스네기료프의 어린 아들 일류사의 죽음 이야기로 카라마조프가의 불행과 병행되어 배치된다. 일류사는 아버지가 드미트리에게 모욕을 당한 이후 알료사에게 돌을 던지며 알렉세이와 엮이게 되는데  짐짓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떠난 어린 소년은 시체에서 냄새도 나지 않았다. 알렉세이는 바위 위에서 일류사를 위한 조사를 하면서 한 때는 일류사와 적대적이었지만, 나중에는 하나로 뭉치게 된 소년들에게 어떤 험난한 일이 있어도, 아름답고 선량한 감정으로 결합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것과 인생에서 성스럽고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갖게 된다면 평생 구원받은 셈이라는 것을 설파한다. 선량하게 살며, 성실하게 살고, 서로 서로 잊지 말자는 당부를 하면서 일류사 때문에 모두가 한평생 기억하고 싶은 추억을 갖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초라한 신발을 신고도 불행하고 죄 많은 아버지를 위해 온 학급을 상대로 분연히 일어났던 일류사를 영원히 기억하자는 조사를 통해 참되고 좋은 일을 하면 삶은 좋은 것이라고 강조한다.

 

표도르 카라마조프를 죽인 범인으로 지목된 드미트리의 재판 장면은 범죄심리학, 법학, 철학을 넘나들며 세밀한 묘사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검사 키릴로비치는 지상의 형벌은 자연의 형벌을 경감해주면서 범죄자의 영혼을 절망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필요하다면서 드미트리의 유죄를 확신한다. 반면 변호사는 명백한 증거와 치밀한 상황 구성을 통해 드미트리의 무죄를 변론하여 일순간에 법정의 분위기를 반전하는 듯 하지만, 뜻하지 않게 드미트리의 약혼녀 카체리나가 히스테리적 반응을 일으키면서 삽시간에 드미트리는 유죄로 확정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뛰어난 감성과 면밀한 이성이 갖는 한계를 스메르쟈코프를 통해 죄된 본성으로 구현해낸다. 이반의 사상에 감수된 스메르쟈코프는 정말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표도르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최고의 이성이 넘나드는 법정이 카체리나의 허튼 감성과 맞닿자 드미트리는 순식간에 죄를 짓지 않았으나 율법상 죄인이 된다. 반면 이반은 스메르쟈코프를 만나고 온 후 자신이 실제 살인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나 살인을 교사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닫고 악마와 싸우며 쇠약해간다. 물론 이반은 율법상 무죄다. 이 모든 과정의 순간마다 연결고리로 등장하는 알렉세이는 당장은 무력하고 무의미해보이더라도  진실의 이면, 선과 악, 구원과 속죄의 문제가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과제인가를 드러낸다.

 

드미트리와 이반으로 사는 생 위로 알렉세이의 시선을 드리우는 작가의 역량은 단순히 그가 천재여서만은 아닐테다. 청소년 시기 맞닥뜨린 어머니의 죽음, 농장에서 살해된 아버지, 한창 때 자신과 함께했던 형의 죽음, 두번의 결혼과 어린 자녀들의 죽음, 혁명을 꿈구다 사형 집행 직전 강제노동형으로 감형되었던 경험 등 일반인으로서는 견디기 힘들었던 그의 인생 역정이야말로 삶으로 구현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아니었나 싶다. 원래는 알렉세이가 혁명군으로 변모하는 데까지 소설은 구상되었다고 한다. 어쩌면 여동생과 상속 문제로 다툰 후 폐동맥 파열로 사망한 것 역시 그분의 섭리가 아니었나 싶다. 혁명의 성공과 실패, 알렉세이의 변모는 어쩌면 거대한 역사, 장엄한 인생의 진실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 아래서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닐테니까.

 

인생에 대해 알아야할 것은 모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안에 있다-커트 보네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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