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 - 개정판, 원문 영어 번역문 수록 현암사 동양고전
노자 지음, 오강남 풀어 엮음 / 현암사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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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종교학자가 풀이하는 노자는 어떨까, 단순한 호기심은 책을 읽고 난 후 그동안 얼마나 노자 사상을 오해했는지 뼈아픈 각성으로 뒤바뀌었다.

 

그저 자연과 하나가 되고, 마음을 비우자는 의미로 노자를 이해했던 단견은 순식간에 뿌리째 마르고, 진리는 어떤 식으로든 통한다는 깨달음으로 대치된다.

 

노자는 '도'는 모든 것의 근원이 되므로, '도'라고  이름 지을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일 수 없다고 정의내리면서, 그릇처럼 비어 있어 얽힌 것을 풀고 부드럽게 하며 하나가 되게 하고, 고요하게 하는 깊은 그 무엇이라고 명명한다. 더욱이 하늘과 땅이 영원한 이유는 자기 스스로를 위해 살지 않고 참삶을 살기 때문인데, 이처럼 자신을 비우는 것을 통해 자신을 보존하는 것이 성인이 되는 지름길이라고 주장한다. 도는 결국 '없음의 세계'를 통해 '참 있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는 성찰이 돋보인다

 

도를 온전히 이해하면, 악과 선을 구분하는 이분법 세계 너머를 통찰하게 되므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은 오히려 낮은 인식의 삶임을 깨닫게 된다는 점도 지적한다. 구분하고, 가르고, 정죄하고 판단하는 그것 자체가 도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 그러므로 소박하게
있는 그대로를 감사하며 모든 일을 하고도 겸손하게 물처럼 자신을 내려놓는 것, 그것이 도를 지향하는 이들의 미덕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총 81장의 짧은 글을 통해 남성다움을 알면서도 여성다움을 유지하고, 흰 것을 알면서도 검은 것을 유지하며, 영광을 알면서도 오욕을 유지하라며 단편적인 시야를 걷어내고 통합의 시선으로 보듬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다듬지 않는 통나무처럼 이름을 갖지 않도록 멈출 수 있는 의지, 억지로 하지 않으나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무욕, 웃음거리가 되는 역설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지혜, 하루 하루 쌓는 대신 하루 하루 없애 가며 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는 자세, 갓난 아이처럼 하루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 자연스러움을 통한 영원과의 합일, 선한 사람이나 선하지 않은 사람까지 모두 끌어안는 포용성, 도의 참지혜를 결단하고 실행하는 실천력, 공평, 균형, 조화를 추구하는 공영의 추구 등을 설명한다.

 

모든 것의 근본이므로 이름을 붙일 수 없다거나 선과 악을 넘어서는 영원성의 존재, 도로 채우고 자신을 비우는 원리 등은 흡사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닮았다.

 

동양의 도덕경과 서양의 성경이 닮았다는 점을 인식한 저자의 해박한 주석과 유려하면서도 소담한 풀이는 독서의 묘미를 한껏 끌어올린다. 도덕경을 가까이 두고 읽기를 반복했다는 석학들의 진의에 공감하게 된다고 할까.

노자님이 말하는 근본 뜻이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을 잊어버리고, 생래적 무지 속에서 희희 낙락하면서 천진스럽게 살아가게 하여 독재자가 마음 놓고 억압하고 착취하기 쉬운 사회로 만들라는 것일까? 그보다 우리에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받들고 있는 그 훌륭하다는 것, 귀중하다는 것, 탐날 만하다는 것이 진정으로 바람직한 궁극 가치인가 하는 근본적 물음을 가져 보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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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 강의 - 오늘날의 문제들에 답하는 인류학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지음, 류재화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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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학제 연구와 심도있는 공부가 필요한 이유를 꼽으라면 아마 인류학이 그 예가 될지도 모르겠다. 협소한 관점과 시선으로 현상을 탐구하겠다는 자세가  경로 이탈을 예고하는 단초가 된다는 점을 깨닫게 하는 데 망설임 없는 강연. 레비 스트로스가 이시자카 재단의 초정으로 도쿄에서 진행한 세 번의 강의를 옮겨놓은것으로, 나처럼 문외한도 인류학의 목표와 방점을 이해하는 데 제 격인 입문서다.

 

레비 스트로스는 서구 문화 패권의 종말, 성-경제발전-신화적 사고 등 세 가지 현안,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재 인식 등 세 가지 주제 강연을 통해 인류학의 지향점과 성취를 소개하고, 왜 우리가 겸비한 자세로 인간 현상에 접근해야하는지 강조한다.

 

<서구 문화 패권의 종말>에서는 시대와 공간을 가로질러 연구하다보면 인간의 삶과 활동이 차이가 나기도 하지만 어떤 특징이 일관성 있게 나타난다는 점을 소개한다. 인간 현상을 연구하면서 차이를 찾아보면 어느 순간 독특하고 이상한 것들이 일관된 방식으로 정렬된다는 점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원시 사회를 통해서 인간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상황을 탐구할 수 있다는 점과 함께, 어떤 사회의 가치를 객관화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사회를 바라보는 사고 방식 자체까지 객관화하고자 하는 객관성에 도달하는 것, 사회생활의 양상이 모두 유기적으로 연관되는 하나의 체계를 보고자 하는 전체성이 인류학의 목표가 된단는 점을 설명한다.

 

원시 부족과 현대 사회를 비교하면서, 경쟁과 대결로 치닫고 있는 현대 사회와 문화가 유일한 가치이며 이상적 현태라는 오만을 버려야한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우리와 전혀 다른 비합리적이고 충격적인 문화의 풍속이나 모습도 하나의 체계이며, 현대 문명과 충분히 양립할 수 있다는 것도.

 

<세 가지 현안: 성, 경제발전, 신화적 사고>에서는 원시 부족의 풍습을 소개하면서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오히려 사회의 내적 논리에 의해 배태된 것일뿐이며, 우리가 혐오하는 것들이 다른 사회에서는 충분히 받아들여지는 모습을 통해 순리대로 버려둘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사회는 내부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식으로 어떻게든 균형을 찾아가므로 너무나 성급하게 법률적 규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기보다는 사회의 내적 논리를 통찰하면서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경제발전과 관련해서는 하나의 경제 모델만 상정하는 것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저개발 사회의 단순성과 수동성은 개발주의적 사고가 투영된 것이며, 원시 사회가 사회의 통일성을 선호하고 자연의 힘을 존중하며 진짜 경쟁 정신을 배제하면서 경제적 불평등을 제로에 가깝게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면서, 자연과 초자연, 인간 본성의 조화를 추구하는 모습 속에서 우리가 지향해야할 새로운 경제 모델의 단서를 보여준다.


 

과학적 사고, 역사적 사고, 신화적 사고의 유사성도 소개한다. 역사를 객관적 진실보다는 편견이나 열망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이해한 점,  과학의 진보를 넘어서서 우리의 정신능력을 벗어나는 현상이 매 순간 확장되는 때, 특정한 사고 방식으로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화두를 던지면서 과학적 사고, 역사적 사고, 신화적 사고를 별개로 투사하는 편벽진 관점이 아니라 각각의 사고 방식에 있어서 친밀감을 이해하는 데까지 대담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문화적 다양성>에서는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척하면서 오히려 축소하려 했던 현대 문명의 가짜 진화론적 사고를 배척하고, 동일한 발전선상에서 순차적으로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각 문화는 평행의 길을 따르면서 상황과 맥락에 따라 일치하지 않는 선택을 한다는 점을 이해하도록 설득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치판단이나 동기, 관념, 주요 관심사에 매몰된 참조 체계가 다른 문화나 세계를 왜곡되게 인지하거나 아예 간과할 수 있는 위험성에 주의하면서, 비교 가치를 따지고 판단해 도식화하는 것을 금하는 한편 각 문화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야한다고 강조한다.

 

자신의 관점이나 사고 방식이 스스로 속한 문명과 사회의 산물임을 잊지 않는 객관성을 견지하면서도 사회의 유기적 체계를 관통하는 전체성의 시야를 갖추려는 인류학의 학문적 목표는, 열린 사고를 통해 제 3의 세계를 지향하는 이들에게도 묵직한 시사점을 준다. 서구 문명 찬양 일색인 우리 시대, 우리 사회에서는 더더욱 읽혀져야 하는 책이 아닐까 싶다.

전 세계가 점차적으로 기술, 삶의 방식, 의상, 심지어는 오락마저도 모두 서구의 것을 빌려서 하고 있지 않습니까?..서구 문명이 자신을 의심하고 시작하고 있는 마당에, 이제 막 서구로부터 독립한 민족들이 서구 문명을 계속해서 권장하고 있는 것입니다...개인 또는 집단 간에 필수 불가결한 장애물이 약해지면, 교환이 너무 쉽게 이루어져 다양성이 사라지고 획일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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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하버드에 오다 - 1세기 랍비의 지혜가 21세기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는가
하비 콕스 지음, 오강남 옮김 / 문예출판사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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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비 예수'라는 안내문이 독서를 도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수님을 수단화하여 학문의 지식으로 뽑아내는 것은 아닌가 하는 단견은 첫 장을 펴는 순간까지도 마음의 갈등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구원의 통로로서 믿음의 대상이자 목표가 되는 예수님이 아니라, 인간의 선을 이루는 방안으로써의 예수님이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신학 교수가 하버드  지성인들을 위한 윤리학 강의를 개설하고, 그 주인공으로 예수님을 선택한 저의를 파악하고 싶은 호기심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았다.

 

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시작된 혼란과 불확실환 상황은 다양한 윤리적 문제를 일으키며 신학 대신 과학이 모든 학문의 여왕으로 등극한 현실에서, 저자는 누가 과연 이 과목을 수강할까 걱정했지만, 예상과 달리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몰렸다고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윤리적 딜레마에 처하면 그 문제가 윤리적 문제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내가 무슨 일을 해야할지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은 후 해답대로 실천한 용기를 갖는 게 중요한데, 이러한 과정을 거치도록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잘 계발된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 기준이 될 만한 이야기와 상상력을 연계하여 윤리적 자세를 기르도록 하는 모범으로 예수님을 선택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자기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폭넓은 이야기를 통해 비유와 행동으로 일침을 가한 예수님의 삶을, 4 복음서를 조망하면서 윤리적 각성으로 연결한다.  이 책은 윤리적 딜레마를 세세하게 제시하고 그에 대한 해답을 4 복음서의 장면에서 추출하는 대신 4 복음서를 차근차근 되짚어가면서 가장 윤리적인 지침이 될 수 있는 말씀들이 어떤 이유로 현대에서 윤리적 영감을 불러오지 못하고 있는지에 주목한다. 그러므로 강의의 개설 목적은 윤리학이었을지라도 오히려 어떻게 성경을 읽고 적용할 것인가의 실천 중심의 신학 강좌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저자의 강점은 4 복음서의 배경과 시대를 고려하면서 철저하게 랍비 예수에 초점을 맞추는데, 이 방법은 오히려 21세기 전의 성경을 오늘 날  어떻게 읽고 받아들여야하는지 가장 효과적인 접근법이 되기도 한다.

 

종교가 실제로 일어난 사실인가 아닌가에만 천착하며 박제화되어가는 모순을 제기하면서,  실제 일어난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의 참됨을 찾아 삶의 복잡한 차원의 참됨으로 연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4 복음서가 보여주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자신의 경험에 자신감이 결여되어 이야기 하기를 주저하므로 서사와 설화의 힘을 품지 못하는 현대인에게, 서로의 경험을 알리고 삶을 확인하며 비교하면서 일상 수준의 이상에서 이야기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는 확신을 표명한다.

 

보다 깊은 수준으로 이야기하는 궤도를 쫓으면서 가장 인상깊게 읽은 부분은 십자가 사건과 부활에 대한 대목이었다.

 

본 회퍼를 인용하면서 지금은 기독교에 대한 비종교적 해석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점을 주장한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버린 사건으로,  세속을 떠나 초월적 구원을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고통 당하는 하나님의 고통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금도 무시되고 도외시된 사람들과 함께 고통받고 씨름하는 바, 기독교인이든 그렇지 않든 삶에서 우리의 좌표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집요하게 묻는다.

 

부활은 살아난 시체, 귀신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인간의 언어가 가진 한계 내애서 정말로 진실되고 특별한 것이라 믿은 무언가를 묘사한 것이란 의견도 주목할만하다.

 

기독교가 부활을 듣고 인정한 사람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방법이든 살아있음을 경험한 이들에게서 출발했으며, 그 경험이 이야기를 지탱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의 현실성, 샬롬을 선포하면서 예수님이 제시한 일들을 제자들이 계속하게 나가도록 하는 것이 부활의 참된 의미로,  단순히 믿음을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삶을 선택하는 희망을 갖도록 해야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헤어날 길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의 삶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진실한 것을 우리는 감지하게 되고, 이것이 부활 이야기가 전하는 참됨이라는 점을 각성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결국 해석은 아류이며 무엇보다 이야기가 일깨우는 경험에 주목하도록 종용한다.

 

종교의 외투를 벗어버리고, 예수님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삶의 구체적인 변화를 체험하도록 다양한 삽화와 학문적 식견을 곁들이면서도 전혀 어렵지 않게 기술한 저자의 역량은, 뜻하지 않은 결과를 선사한다. 책의 말미에 이르면 윤리학, 종교학, 신학 등을 구분하면서 구원자 예수님으로서만 재단하는 것이 오히려 예수님을 가장 수단화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고 할까.

그들은 모두 나사렛 예수를 더 알면 알수록 그들의 윤리적 사유가 그만큼 명쾌하게 되리라는 희망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학생들은 많은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가장 큰 윤리적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믿은 이 인간 예수를 파악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많은 경우 너무 멀리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우리가 잘못된 곳에서 그를 찾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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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고독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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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고 나서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깊은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경험은 여간 겪기 어려운 경험이다. 표면의 겉만 핥으면서 확장된 세계를 인지하지 못한 어리석음조차 깨닫지 못했다면..순식간에 차오르는 두려움은 서늘할 정도.

 

 활자는 일차원적이고 관찰가능하며 구획되었던 세상을 걷어내고 다차원적이고 혼란스러우며 하나로 통합되는 세계의 극한까지 단숨에 밀어넣는다. 현실과 환상은 뒤섞이고, 죽음은 삶과 공존하며 근친간의 깊은 사랑은 극한의 고독과 맞닿는다.


아들이 아버지가 되며 어머니가 딸이 되는 것 같은 라틴 아메리카 특유의 명명 방식은 부엔디아 가문 6대까지 내려가면서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도 중첩시킨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하며, 부활과 침잠이 동시에 너울대는 이야기를 쫓다보면 우리의 단선적인 세계관이 흠씻 부끄러워질 정도다 .

 

소설은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와 우르슬라가 돼지꼬리 아이를 낳을까 걱정하던 중에  쁘루덴시오를 죽인 후 도망치고, 이후 마꼰도를 세우게 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가 던진 창에 목이 뚫려 죽은 그가 버젓이 살아서 호세 집안을 돌아다는가 하면, 유토피아같은 마꼰도에 문명의 도구를 하나씩 가져오는 의혹짙은 멜키아데스까지 등장하면서 서두부터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시킨다. 죽음에 대한 애도도, 두려움도 없이 죽은 자와 함께 사는 부엔디아 가문의 일상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생경할 정도다.

 

소설의 주인공격인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가 소녀 티를 벗지 않은 레메디오스와 결혼하게 되고, 선거 결과가 아니라 군인들이 빼앗은 부엌칼들을 되돌려주지 않는 모습에 분노하여 마침내 식칼과 날 세운 쇠붙이로 무장해 정부 수비대에 맞서 반군을 조직하는 장면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작가의 날카로운 현실 인식을 잘 보여준다. 혁명은 마치 거창하고 고매한 목표로 시작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사소하고 희극적인 요소가 방아쇠로 작동될 수 있음을 엿보게 한다.

 

성에 대한 집착과 근친상간은 부엔디아 가문의 6대를 관통하는 주요 서사로 작동하는데, 단절되었던 마꼰도가 서서히 개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가문 언저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마꼰도 와해의 원인은 외부 침습과 더불어 근친상간에의 몰입이 한 축을 담당한다. 더 깊이 사랑하면 할수록 더 고립되어 폐허를 앞당기는 가문의 저주는 100년만에 사라지는 마꼰도의 운명을 예견하면서도,  동시에 소설에서 사라진 부엔디아 가문이 고독 속에서도 통째로 어디선가 다시 부활하여 생을 이어나가리란 단서가 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부엔디아 가문의 근친상간은 비극적 한계이면서 동시에 희망적 가능성이기도 하다.

 

<백년의 고독>에서 그려지는 여성들은 부엔디아 가문의 조연이 아니라 또다른 주연으로 그려진다. 우르슬라는 죽은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를 부양하는가 하면,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의 잔인한 폭정을 단숨에 제압하기도 한다. 부서져가는 마꼰도에서 카톨릭 의식을 고집스럽게 지켜가기도 하고  노화로 육신의 눈이 쇠하여지지만, 또 다른 시력을 확장해가며 지치지 않고 집안을 일으켜 세운다. 그녀는 근친상간으로 낳은 아이들까지 거두면서 무너져가는 마꼰도의 이면에서 가장 일상적인 모습으로 가장 혁명적인 생의 전투를 치뤄내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레베까, 삘라르 떼르네라, 산따 소피아 델 라 삐에닷, 레메디오스, 뻬뜨라 꼬떼스, 페르난다, 미녀 레메디오스 등은 질투와 사랑, 무지와 통찰, 성과 무성의 경계를 넘나들며 부엔디아 가문의 흥망성쇠를 엮어나간다.

 

<백년의 고독>은 단선적이고 예견가능하며, 합리적인 것에 천착하는 우리의 세계관이 얼마나 빈약한지 잠잠히 고발하면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닫힌 것과 열린 것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휘장을 뚝뚝 걷어낸다. 부서지고 무너지는 폐허의 세계가 실상은 세워지고 회복되는 부활의 세상이라니. 문학적 성취는 무엇이어야하는지 활자로 보여준 작가의 천재성과 성실성에 새삼 감사하다.

충분히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현실을 실제의 삶보다 더욱 폭넓게 수용하고 있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에게 현실이란 개인 심리적, 사회적, 수평적, 역사적, 외면적 측면뿐 아니라 집단 심리적, 민화적, 미신적, 환상적, 추상적, 수직적, 탈시간적, 내면적 측면까지 포함한다. 바꾸어 말하면, 죽음의 세계는 삶의 세계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며, 부재와 현존은 한 사물이나 현상의 동시적 속성이며, 환상과 실제 사이에는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현실은 불가시적 세계로 둘러싸인 포괄적인 전체를 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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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리커버 특별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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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은 결코 복잡하지 않다는 사실을 오롯이 증명하는 책이다. 저자가 페미니즘을 주제로 했던 테드의 강연, 잡지 등에 실린 삽화와 인터뷰를 모은 것으로 짧은 시간 안에 페미니즘이 무엇이며, 무엇을 추구하는지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심오한 이론이나 생경한 운동의 모토를 드러내는 대신 자신이 겪은 경험과 사례를 통해 독자들에게 자연스럽게 전달하고자하는 바를 명징하게 글로, 강연으로 옮기는 능력은 탁월하다.

 

나이지리아의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나 교육의 혜택, 부, 명예를 누렸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불평등한 대우를 받았던 사례를 읽다보면, 뚯하지 않게 열등감의 발로를 페미니즘으로 둔갑시키는 일부 가짜 운동의 진의를 되돌아보게 된다.

 

일등을 했지만, 여성이라서 반장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경험, 여자 혼자서 호텔에 들어갈 때 느끼는 불편한 시선, 여성이라면 상사라도 여성적 손길을 발휘하기를 바라는 기대, 공식 회의 석상에서조차 미혼 여성의 발언권이 무시되는 것 같은 분위기, 호감가는 성격과 비젼을 갖도록 여학생을 가르치는 교육 풍조, 여성이 팁을 주어도 동행한 남성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는 서비스 문화 등 너무 세밀하고 내면화되어 있어 주의를 한껏 기울이지 않으면 그것이 여성에 대한 차별이라는 것조차 감지하지 못하는 사소한 삽화들을 통해 침잠해있던 인권적 감수성을 일깨운다.

 

<여성스러운 실수>에서는 친웨 아줌마를 통해 의사인 전문직임에도 불구하고, 허구화된 이상적 여성상에 맞추어 교육받은 탓에, 남편의 외도를 보고도 화내지 못하고 우아한 여성답게(?) 눈물과 용서, 집착으로 추스르는 모습을 날카롭게 포착함으로써, 구조적이고 체계적이며 은밀하게 내면으로 침습하는 참담한 문화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페미니스트는 모든 성별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 사람이라는 선언을 읽다보면, 이 책이 왜 스웨덴의 모든 16세 이상의 학생들에게 선물되었는지 납득된다.

고정관념이 우리의 사고를 얼마나 크게 제약하고 우리의 사고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주는지, 특히 아프리카에 대한 생각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 생각엔는 페미니스트라는 단어, 나아가 페미니즘이라는 개념 자체도 그런 고정관념들 때문에 제약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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