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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생활자의 수기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2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동현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2월
평점 :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타락을 허용하시고, 구원을 제시하는가. 영적 세계로 가는 길목에에서 봉인같은 이 질문은 좀처럼 넘어서기 어려운 난제다. 영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때로는 광기로 포효하는 자유의지를 제어할 수만 있다면, 이성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판단과 결과를 가능케 하는 제도와 사회를 만들수만 있다면 숱한 불행을 미리 예방할 수 있지 않을까..고민은 역사의 현장마다 날선 질문으로 제기되기도 했다.
완벽한 답은 아니더라도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의식을 통제하고, 동일한 행동을 예측하며 모두를 올곧다고 믿는 방향으로 이끄는 제도와 사상이 있을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이 소설을 통해 통렬하게 비판한다. 자유의지가 가져올 선과 악의 결과에 집중하는 대신 인간의 본질에 자유의지가 속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해설에 따르면 체르니셰프스키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쓰면서 푸리에의 공산주의 사회의 이상향을 찬양하는 데 대한 반박으로 씌여진 소설이라고 하는데, 작가는 날카로운 비판의식과 천재적인 문장력으로 단숨에 푸리에의 주장을 결박한다.
주인공은 자신을 스스로 다른 이들과 섞이지 않는 병적인 인간이라고 지칭한다. 그러면서 인간이 자유의지가 있는 한, 이성으로 교도하고 이끌어 그 행동과 사유를 예견하는 대수표를 제작하여 통제하려 할지라도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인간은 자신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스스로 범인으로 자처하면서 엄청난 범죄를 날조하기도 하고, 파괴와 혼돈을 결코 거부하지 않는 고통을 통해 자의식을 확장하는 비이성적인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파고든다.
음울하고 방탕하며 고독했던 주인공은 네프스키 거리에서 낯선 장교와 마주친 후 먼저 길을 비키지 않으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장교에게 지지 않으려 허세를 부리며 터무니 없이 돈을 빌리는가 하면 그를 주인공 삼아 풍자 소설까지 집필한다. 초대받지 않은 동창회에 나가 유령 취급을 받으면서도 자존심에 자리를 지키고 2차까지 따라 나섰다가 20대 앳된 영업집 아가씨 리자를 만나 하룻밤을 보낸 후 자못 도덕적인 삶의 진수를 충고하기도 한다. 그 하룻밤 만남 이후 자신을 찾아온 리자에게 호감을 느끼면서도 모욕하며 쫒아낸 후 스스로 괴로워 통곡하기도 하는 등 시종 갈팡질팡하는 심리를 보여주며 자유의지의 민낯을 삽화를 통해 고스란히 묘사한다.
도덕과 비도덕, 선과 악, 강박과 여유, 경의와 모욕을 넘나드는 이야기를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자유의지가 무엇인지 성큼 다가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진 그 무엇이라도 인간 모두가 똑같은 생각과 동일한 행동을 하도록 견인하는 것이라면 인간다움을 말살하는 것 아닌가, 작가는 이야기 내내 묵직한 화두를 거두지 않는다. 종국에 인간의 실존이 사라지는 결과로 귀결된다면 과연 선한 것인가, 반사경처럼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소설을 읽고 나면 영적 세계의 확장이든 사회의 개혁과 혁신이든 인간의 본질을 인정하는 것, 거기서부터 출발해야한다는 확신이 서도록 이끌어준다. 또한 평론가들은 이 작품이 후에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의 천재성을 알리는 시초가 된다고 단언하는 데 그러한 평가를 충분히 공감하게 된다.
당신들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수정궁을 믿고 있다. 즉 남몰래 혀를 내밀거나 눈을 흘기거나 하는 따위 짓을 할 수 없는 건물을 믿고 있다..자 바꿔보라. 다른 것으로 내 눈을 현혹시켜 보라. 다른 이상을 나한테 안겨줘 보라...어서 마음대로 웃기 바란다. 나는 어떤 조소라도 감수하겠지만, 그렇다고 밥이 먹고 싶은데, 나는 배부릅니다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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