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집의 기록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1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덕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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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스스로 죄인임을 자각하고 참회할 수 있을까.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이 겪은 감옥의 체험을 통해 죄와 구원,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 소설의 형식을 빌어 또렷하게 그려낸다.

 

<죽음의 집의 기록>은 알렉산드로 뻬뜨로비치 고랸치꼬프의 이야기를 내가 다시 읽어나가는 액자 형식을 취하고 있다. 결혼한지 1년이 되지 않아 질투로 아내를 죽이고 자수를 한 알렉산드로 뻬뜨로비치는 복역을 한 후 풀려났다. 그는 학식이 풍부하고 많은 책을 읽으며 과묵한 사람으로, 사람들 사이에 오히려 동정심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단정했는데, 자신이 거주하는 집의 딸들을 가르치는 것 외에는 딱히 사람들과의 교류가 없을 정도로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지내다가 사망한다. 그에게 알 수 없는 호기심을 느낀 나는 사후 그의 유형 생활이 기록된 책을 읽게 되고, 그의 책이 또 다른 소설로 이어져 나간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알렉산드로 뻬뜨로비치의 말을 빌어 자신의 유형 경험을 되살리며 죄, 인간, 그리고 부활은 무엇인지 질문한다. 그는 감옥에서 만난 죄인들을 보면서 자신이 저지르는 죄보다 더 양심의 가책을 느껴 스스로 괴로워하는 이와 죄를 범했으나 이미 감옥에서 죄과를 치르고 있으므로 자신은 이미 죄에서 해방되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비교하면서, 과연 이들에게 동일한 범죄 요건을 적용하여 동일한 형벌을 내리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 되묻는다.

 

 또 귀족 출신인 자신이 처음 감옥의 낯선 생활에 적응하느라 힘들었던 반면 감옥 못지 않게 힘들었던 생을 살았던 이들이 용이하게 유형 생활에 적응하고 나름의 생존기를 구가하는 데 충격을 받는다. 간수의 눈을 피해 장사를 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매질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기를 쳐 돈을 벌거나 이득을 취하는 이들을 보면서 감옥에서 자유 이외의 모든 것이 나름 구축되어 가면서 자유에 대한 갈망이 엷어지는 모습도 날카롭게 포착한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연극을 준비하는 모습은 이 소설에서 가장 밝고 따뜻하며 인간미가 넘치게 그려지고 있다. 연극을 앞둔 죄수들은 각자 역할을 맡으면서 진지하고 성실하게 준비를 해나가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 때만큼은 죄수들이 어린 아이처럼 서로 격려하고 함께 하며 어우러진다.

 

죄수들이 감옥을 탈출하는 방법 중 하나는 군병원에 입원하는 것인데, 친절한 의료진들의 배려를 제외하면 결국 본질은 감옥과 동일하다. 죽거나 감옥으로 되돌려 보내지는 것이 병원을 벗어나는 탈출구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혁명을 꿈꾸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오히려 감옥 안에서 혁명에 대한 회의를 마주하게 된다.  죄수들이 뭉쳐 간수에게 대항하는 일종의 항거에서 귀족 출신과 민중 출신의 죄수들이 자연스럽게 구분되고 온전히 섞이지 못하는 계급의 한계를 목도한다. 같은 죄수인데도 은연 중에 계급에 따라 역할과 심정이 분리되는 현상을 경험하는데, 하나의 목표를 위하여 나아가는 동안 민중과 함치된다고 믿는 사실의 허구성을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형량을 다 마치고 마침내 자유를 얻게 된 알렉산드로 뻬뜨로비치의 마지막 진술은, 죽음으로부터의 부활로 묘사됨으로써 감옥을 다의적인 측면에서 되새기도록 돕는 미덕을 발휘한다. 즉, 죄수들이 투옥되는 실질적 감옥이자 우리의 생 자체가 감옥이라는 의미에서도 접근이 가능하도록 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죄를 객관적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에게 내린 형벌이 과하므로 억울하다고 믿는 죄수들, 반면 감옥 안에서도 매일 참회하며 기도하는 죄수, 죄수이므로 특권을 상실하고 민중과 동일한 생활을 하면서도 심연 깊은 곳에서는 그들과는 유리된 귀족의 심성, 마침내는 무너져 한줌 표상으로 추락할 위상에 기대어 죄수를 괴롭히는 소령 등 여러 인간 군상을 보여줌으로써 정죄하거나 단정짓는 대신, 생이라는 비참한 환경에 내몰린 인간의 부족함과 민낯을 잠잠히 고발한다.

 

<죽음의 집의 기록>을 읽으면서 유형 생활 이후 기독교적 구원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는 소설가의 고민을 엿본 것만 같다. 정의와 혁명, 구호와 정진으로만 바꾸어낼 수 없는 인간의 내밀한 이면과 인간 사회의 좌표, 이에 대한 철저한 고민과 집요한 침잠이 없다면 과연 제대로된 혁명, 구원을 이룰 수 있을까. 진정 죄는 무엇이며 인간은 누구이며 구원은 무엇인가, 대가가 다시 던지는 질문은 더 깊은 여운으로 남는다.

 

비록 평생을 민중과 일한다 하더라도, 예를 들어 조건으로 제약을 받는 행정적인 형식 때문에 비록 40년 동안이나 매일같이 그들과 일속에서 접한다 하더라도, 또는 은인의 모습이나 어떤 의미에서 아버지의 모습으로 우호적으로 지낸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결코 민중과 합치될 수 없다. 모든 것은 단지 시각적인 기만일 뿐이고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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