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투스 - 인간의 품격을 결정하는 7가지 자본
도리스 메르틴 지음, 배명자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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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같은 개념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생경스러울만큼 신선하고, 깊이 있게 이해하는 방편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사회학 서적을 선뜻 집어들기 부담스러울 때, 가볍게 읽으면서도 자기계발과 사회학 개념을 동시에 학습하는 데 이롭다.

 

우선 저자의 기획력이 돋보이는데, 주로 경영이나 관리의 관점에서 명령이나 충고조의 식상한 어투를 버리고 '아비투스'라는 사회학의 개념을 차용해 자기계발서를 기술함으로써 독특한 재미를 선사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가 주창한 아비투스는 사회의 계층을 구별하는 개념으로 일련의 생활 방식, 태도 등을 의미한다. 이 책의 유용성은 이러한 아비투스를 심리자본, 문화자본, 지식자본, 경제자본, 신체자본, 언어자본, 사회자본으로 구분하면서, 아비투스의 파급력과 위력을 꼼꼼하게 드러내는 데 있다.

 

단순히 각 자본의 특성은 이러하고, 계급에 따라 이렇게 다르다, 식의 기술 방식이 아니라 각 자본과 관련된 인터뷰, 연구 자료 등을 제시하면서 전체의 얼개와 맥락을 파악하도록 돕는다. 특히 각각의 자본을 장으로 구분하여 기술하고, 각 장의 마지막에는 관련 전문가의 인터뷰를 실어 각 자본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구현되는지 소개하고 있다.

 

그간의 자기계발서가 개인의 노력과 헌신에 초점을 맞추면서 상대적으로 사회적 맥락을 소홀히 하여 성공 여부를 개인의 책무로 되돌렸다면, 이 책은 성공과 성취의 이면에 자리잡은 계급적 구조와 수용에 집중하면서 개인을 둘러싼 사회 문화의 경계와 이면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성공 신화의 사회적 작동 방식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능하게 한 점이 두드러진다.

 

다만, 책의 기술 목적이 자기계발에 있다보니, 각 계급의 아비투스를 평면적이고 단선적으로 설명하는 데 그치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

 

 

아비투스는 사회적 지위의 결과이자 표현이다. 아비투스는 우리의 사회적 서열을 저절로 드러낸다. 지위와 구별 짓기 게임에서는 상류층 아비투스가 모든 것의 기준이다. 그런 아비투스가 더 많은 명성을 얻고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진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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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 동서문화사 월드북 10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채수동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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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혁명을 꿈꾸었던 작가가 바라본 혁명에 대한 평가는 뜻밖에도 영성과 맞닿아 있다. 죽음의 공포를 직면한 후 구원이란 무엇인가, 에 천착했던 작가의 관찰은 누가복음에 소개된 귀신들과 돼지 떼로 귀결되면서, 그가 아니라면 결코 쓰지 못할 대작으로 탄생했다.

 

<악령>은 러시아의 대 혼란기였던 1860년대의 러시아 사회와 인간 군상들을 충실하게 그려내고 있다. 후록에 실린 작품 소개에 따르면 작가는 네차예프 사건을 모티브로 작품을 구성했다고 한다.

 

자신의 처남과 같은 학교에 다니던 이바노프가 어느 공원의 늪 속에서 타살된 채 발견되었는데, 개인적인 원한에 의한 사건이 아니라 후에 네차예프라는 활동가와 그 조직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점이 밝혀졌다고 한다.  이 사건에서 영감을 얻은 도스토예프스키는 파괴를 통해 새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맹목적 혁명의 의지를 '악령', 즉 '귀신들린' 정신으로 도치하면서, 오직 목표만을 향해 일념하는 조직의 모습을 귀신이 자리잡은 돼지떼, 즉 결국에는 강으로 빠져들어가 몰살하는 돼지떼로 표현하면서 소설의 큰 줄거리를 다져나간다.

 

그러나 작가의 천재성은 이 소설을 혁명조직의 탄생과 활동가의 행동에 근거해 단편적으로 구성하지 않는 데 있다. 처음에는 스쩨빤 선생과 스타브로긴의 어머니 바르바라 부인의 사랑도 아니면서 우정도 아닌 애매하고 모호한 관계 속에서 싹트는 삽화들이 소설의 전반부를 차지한다. 거기에 정신 분열증을 앓고 있는 것처럼 거칠었다가 일순간 얌전해지는 스타브로긴의 일상이 언뜻 비쳐지지만 다소 지루할 정도로 이렇다할 사건의 전개는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그러다가 차츰 네차예프 격인 뾰뜨르가 등장하면서 지령, 5인 조직 등이 거론되고, 죽음을 극복하면서 신이 될 수 있다고 믿기에, 어차피 죽을 바에야 샤또프의 살해를 감행했다고 유서까지 쓰면서 책임을 뒤집어 쓴 끼릴로프, 스타브로긴의 아이를 가진 아내의 출산을 돕기 위해 온 거리를 활보하는가 하면 출생한 아이는 자신의 아이라며 무한한 감동에 빠지는, 그러나 뾰뜨르로부터 조직을 밀고하려 한다는 의혹을 받아 비참하게 최후를 맞는 쌰또프, 방탕한 생활의 끝에서 만난 스타브로긴의 절름발이 아내 마리야와 술고래꾼 레뱌드낀, 스타브로긴을 사랑하지만 마브리끼에 기대고 결국 폭도에 의해 살해되는 리자베따, 현의 사건들을 장악하지 못하고 쓰러지는 렘브께와 율리아 부인, 돈에 눈이 먼 탈옥수 페지까 등이 그려지면서 모든 일화는 살인, 방화, 파괴의 정점으로 치닫는다.

 

스쩨빤 선생의 아들 뾰뜨르는 작은 조직들이 곳곳에 파괴를 일삼아 사회에 혼란을 가져오면 혁명의 과업을 완수한다고 믿는 인물로, 중앙의 지령을 받고 있다는 신뢰를 얻어 5인 조직을 통솔하면서 샤또프 살해를 지시하는가 하면, 공포를 극복하는 자유의지를 선택하겠다는 끼릴로프를 설득해 샤또프 비극의 책임을 유서에 남기도록 종용한다. 특히 뾰뜨르는 사상적 고뇌에서 혁명에 뛰어들었다기보다는 파멸과 붕괴에 열정을 쏟아붓는 활동가로서, 자신이 혁명의 선두에 서는 대신 스타브로긴을 혁명 정신의 화신으로 삼기를 갈구하는데, 스타브로긴의 거절로  실패한다.

 

소설의 주인공인 스타브로긴은 어쩌면 혁명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로 방탕과 타락의 극치 속에서 어느 소녀를 추행하고, 그 결과 그 소녀의 죽음에 책임이 있지만,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는 그 비밀 앞에서 죄책감을 느껴 스스로를 용서하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찌혼 신부를 찾아가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지만, 구원의 방편을 찾지 못하고 돌아서서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러시아 구 사상의 표징이라고 할 수 있는 스쩨빤 역시 가출을 감행하다 낯선 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그 누구보다도 당당하고 위세가 대단했던 바르바라 부인 역시 아들의 죽음을 목도하고 쓰러지게 된다.

 

등장 인물 모두가 죽음과 좌절로 끝맺는 소설의 결론은 <악령>의 뚜렷한 주제의식을 보여준다. 구원과 혁명, 부활과 재생이란 결국 무엇인가. 가슴에 불을 뿜으며 열광하는 사상, 끝까지 파고드는 이성의 성찰, 집착으로 점철되는 사랑, 위풍당당한 권력, 허세와 과시로 치장된 권위,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죄책감과 번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목적 지향적 행동들, 또렷이 영혼을 구원해내지 못하는 종교적 허상..모든 것이 구원과 혁명을 지향했지만, 결국 모든 것이 한 데 어울어져 파멸과 와해로 합류되어 버리는 그 놀라운 이면을, 작가는 담담하지만 꼼꼼하게 그려냈다.

우리는 우선 혼란 시대를 야기하는 겁니다. 당신에게 이미 이야기했다시피 우리는 국민의 한가운데로 파고드는 겁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도 상당히 우세합니다..중략..백성도 취해 있고, 어머니들도 취해 있고, 아이들도 취했고, 교회는 텅 비어 버렸죠. 아아, 이 새풍조를 좀 더 발전시켜야 합니다. - P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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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계 교수의 철학 이야기 - 탈레스에서 라깡까지, 증보판
강영계 지음 / 서광사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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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절적으로 마주한 철학의 계보와 좌표를 알고 싶다는 욕망은, 교과서처럼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으면서도 중심 사상의 핵심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책을 읽고 싶다는 욕심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결과적으로, 찾고 있던 책을 정확하게 고른 셈인데, 저자의 안내대로 '서양 철학의 무수한 갈래들을 일관성 있게' 정리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충실하다.

 

첫 장에서 달리를 인용한 철학사의 가치는 이 책의 유용성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철학사를 통해 어떤 시대에 어떤 지역에서 철학의 체계적인 생각들이 전개되었는지 알 수 있고, 어떤 곳에서는 일관성 있는 진보가 있었다면, 어느 지역에서는 왜 단절되었는지 탐구할 수 있으며, 독자적인 철학 사상을 창출하지 못한 연유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과거와 현재의 사고 양태를 반성하고 비판함으로써 미래의 삶과 세계에 대한 개방된 자세를 계획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책은 크게 그리스 철학, 중세 철학, 르네상스 철학, 근세 철학, 독일 관념론, 현대 철학의 6부로 구성되어 있다. 세계의 근본, 신과 윤리, 이성과 경험, 비판 철학, 실존, 언어, 정신분석, 실용주의, 사회주의, 실증주의, 해체, 포스트모더니즘 등을 관통하며 대표적인 철학자와 중심 철학 사상을 간결하게 정리한다.

 

가장 흥미로웠던 장은 아무래도 평소 잘 접하지 못했던 르네상스 철학 부분이었다.  쿠사누스는 우리의 일상적 인식은 피상적이고 부분적 인식으로 결핍된 인식이며 곧 무지로써, 무지의 지혜는 우리가 가진 온갖 지식을 포기하고 파악할 수 없는 방식으로 파악하는 것이 무지에 관한 지혜라고 설파한다. 또한 반대의 일치는 모사와 원화처럼 모든 현상적인 사물은 모사지만, 그 그원은 원화에 두는 일치라고 설명하면서, 반대의 일치에 접근하는 인간은 감각적이고 오성적인 앎에서, 반성의 차원에 이르고, 결국 반성의 반성을 통해 이성적 성찰, 즉 신적 통찰까지 승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파라켈수스는 현실 세계는 육체적, 영혼적, 정신적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고, 세상의 모든 영역은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실체와 관계를 맺고 있어 각 영역에 따라 달리 치료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영적 건강의 개념과도 일선상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브루노는 세계의 구성요소를 단자로 규정하거나 물활론적인 사고를 통해 자연 과학 탄생의 기반을 닦았다. 뵈메는 수축과 분산으로 생기는 회전이나 진동을 통해 물질 세계가 성립하고 높은 단계에서는 사랑, 표현, 영원한 자연, 신의 왕국 등이 성립된다고 보면서 두 단계 사이의 갈등을 섬광으로 표현하고, 이 안에서 인간의 선택할 자유가 주어진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물질 세계에 만족하면서 일상 생활을 영위할 수도, 심연의 의지로 나아갈 수도 있다고 보았다.

 

한 번의 독서로 철학의 갈래을 정리할 수는 없지만, 다른 철학 서적을 읽으면서, 그 좌표와 갈래를 짚어내는 사전처럼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또 특정 철학자의 핵심 사상을 요약해두었기 때문에, 다른 독서를 하기 전 샛길로 새지 않게 하는 울타리 역할도 훌륭하게 감당할 수 있는 책이다.

철학적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원초적 힘은 의심과 경탄이다. 의심이 없는 곳에서는 어떤 문제도 제기되지 않는다. 문제가 제기되어 그것을 해결할 때 우리들은 경탄을 금할 수 없다....중략..과거의 철학사를 암기하는 것은 단순히 일상생활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철학 이야기‘를 의심과 겅탄 속에서 읽으면서 반성하고 비판할 때 ‘철학 이야기‘는 비로소 ‘철학함‘으로 새롭게 싹틀 수 있을 것이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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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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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력과 적응, 추종과 안착의 세계로 진입하는 길목에서 작가는 홀든 콜필드를 내세워 사춘기 소년의 순수함과 질주, 일탈과 도피를 대립시키고, 거친 필치로 독자들을 사정없이 흔들어댄다.

 

줄거리의 외관은 딱히 흥미로울 것도 없어 딱 철부지 소년의 방황기라고 정의내리기 쉽지만, 소설의 반향은 그 어떤 것보다 묵직하다.

 

주인공 홀든은 내일이 없는 것처럼, 시시각각 닥치는 현실의 모습을 오직 자신의 관찰과 직관으로 판단하면서, 남들이 하지 않는 질문, 가령 센트럴 파크의 오리들은 겨울이 되면 어디로 가는가, 등을 궁금해한다. 또한 수녀들에게 10달러 밖에 기부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면서 엄마나 숙모가 요란스러운 옷을 입고 자선 사업을 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비교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장면은  소년의 순수함을 극대화하는 한편, 본질이 아니라 위선으로 구성된 세계, 지위나 자격으로 대표되는 세상의 표징을 가식없이 드러낸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쫓겨난 홀든에게 동생 피비는 정말 좋아하는 것이 있느냐고 묻고, 주인공은 낡은 밀짚 바구니를 들고 성금을 모금하는 수녀, 겁박에도 자신의 말을 취소하지 않고 창에서 기어이 뛰어내린 제임스 캐슬, 죽었지만 좋아하는 동생 앨리, 그리고 피비와 마주하며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좋다고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이 되고 싶은 것은 어린 아이들이 넓은 호밀밭에서 놀고 있을 때 절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고백한다.

 

소설은 홀든이 정신과 병원에서 정신과 전문의의 질문, 9월부터 학교에 가게 되면 공부를 열심이 할 것인지 물어대는 삽화 등으로 마무리된다. 홀든은 실제로 해보기 전에 무엇을 어떻게 하게 될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며, 바보같을 질문일 뿐이라고 일갈한다.

 

소설의 첫 부분에서 분별력을 가지고, 미래에 대해 고민하라는 스펜서 선생의 충고는 결국 홀든을 파고들지 못한다. 순수한 사춘기 소년처럼 지금 느끼는 그대로, 편견 없이 드는 생각, 계산 없이 하는 행동, 그것만으로는 왜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인가. 정제하고 세련되게, 한껏 치밀하게, 영락없이 궤도를 고수하는 어른들의 세계를 향한 홀든의 이야기는, 가슴을 순식간에 열뜨게 할 만큼 충만하다.  순수를 지향하는 사춘기 소년의 어투와 삽화들을 내세워, 관행과 관습, 성공을 위한 정교한 서사가 맞물리는 견고한 현대 사회의 모습을 끌어내고, 대담하게 포획하여 균열을 내는 작가의 역량은, 왜 이 소설이 줄곧 문제작으로 엄선되는지 짐작하게 한다.

난 정말 운이 좋았다. 스펜서 선생에게 잡소리를 하는 동시에 오리 생각을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건 재미있었다. 선생에게 말하는 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러다가 갑자기 선생이 내 허튼소리를 가로막았다. 선생이란 사람은 언제나 그렇게 말을 자르기 마련이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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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2
켄 키지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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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작동 방식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끊임없는 구별과 길들이기의 교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현대사회에 적응한 정상적인 소시민으로써 살아간다는 것은, 해체해서 따지고 들면, 결국 딛고 사는 거대한 세계가 선사하는 구별의 경계선에서 운 좋게도 바깥이 아니라 안쪽을 점유했다는 것이며, 동시에 세계가 길들이는 방식에 놀라울 정도로 순응하며 살아낸 결과다.

 

이것이 켄 키지가 바라보는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구별, 존재와 비존재로써의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그의 세계관을 집약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곳은 어쩌면 정신병동일 수 밖에 없다. 소설가는 환자를 '미쳤다'고 진단하고 '비정상'이라고 단정하는 대신, '다르다'고 보며, 그들에 의해 '낙인찍혔다'고 간주한다.

 

실제로는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지만, 청각 장애인으로 치부된 브롬든은 인디언의 후손으로, 이 소설의 화자다. 그는 이 세상을 거대한 콤바인으로 이해하면서, 콤바인의 주된 기계적인 작동 원리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환자로 병동에 갇혀 있으며, 콤바인에 맞추어 길들여가는 것을, 그들은 치료라고 인식한다고 이해한다. 콤바인의 실질적인 권력자는 랫치드 수간호사로, 그는 의사의 치료 방향을 자신의 뜻대로 이끌어가는가 하면, 누가 전기치료와 뇌전두엽 절제술을 받을 것인지 결정적으로 증언하는 매개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끊임없는 통제를 생산해낸다. 병동의 가장 오래된 권력자 랫치드 수간호사 아래서 환자들은 웃음을 잃어버리고, 병동의 규칙에 순응하면서, 모두가 점차 상태가 악화되어간다.

 

그러던 어느날 작업 농장에서 싸웠다는 이유로 법정에 섰다가 정신병으로 판결 받은 맥머피가 병동에 입원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는 입원한 첫날부터 체온 측정을 거부하는가 하면, 병동의 집단 치료 과정을 힐난한다. 랫치드 수간호사와 교묘하게 대립하면서, TV 시청권을 연장하는가 하면, 여자들까지 끌어들이고, 의사까지 설득해 환자들을 데리고 합법적인 바다 낚시를 감행한다. 이에 맞서는 랫치드 수간호사는 다양하는 방법을 구사하는 데, 가령 맥머피가 단순하게 호의로 사람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돈을 따내며 자신의 이득을 구가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제공하해 환자들을 분열시킨다. 거기에 환자들이 동요하면서 한때 고립되기도 하지만, 맥머피는 특유의 돌파력으로 분위기를 전환한다.

 

바다낚시에 다녀온 환자들을 소독한다는 명분으로 병동은 소란해지고, 이 과정에서 브롬든과 맥머피는 보조원들과의 몸싸움에 연루되어 중환자실로 옮겨져 전기치료까지 받지만, 맥머피는 좀처럼 굽힐 줄 모른다. 맥머피의 끊임없는 저항은 조금씩 환자들을 변화시키고, 브롬든 역시 스스로 자신이 커지면서 힘이 생겼다는 느낌이 든다. 이후 맥머피는 여자들을 병동까지 끌어들여 파티를 하게 되고, 술과 감기약에 취한 채 다음 날 발각되는 바람에 랫치드 수간호사에게 일격을 당하면서, 마침내 맥머피는 뇌전두엽 절제술을 받아 식물인간 상태로 병실로 돌아오게 된다.

 

브롬든은 맥머피가, 랫치드 수간호사를 필두로 한 콤바인에게 저항하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최후의 수단을 강구하고, 맥머피가 가르쳐준 대로 최대한 힘을 모아 제어반을 뜯어낸 후 병동을 탈출한다.

 

소설가는 우리의 존재 방식은 '저항'이어야 한다고 단언한다. 자신답지 못하게 살도록 제어하고 통제하는, 기계 같은 세상의 단단하고 교묘한 외관에 겁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권력의 중심에 균열을 내는 것은 콤바인에 동조하지 않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내는 그것. 그것이 최고의 힘이며 무기라는 것을 보여준다.

 

뚜렷한 주제의식 뿐만 아니라, 세밀하게 교차되는 다양한 감정선에 대한 묘사 또한 압권이다. 특히 브롬든이 전기치료를 받으면서 기억해낸 인디언 세계의 와해와 콤바인의 침습은 영화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다. 영화로도 훌륭하지만, 독서를 통해 소설가의 독특한 문체를 읽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 아닐까 싶다.

 

다른 환자들도 맥머피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하딩은 수습 간호사를 보기만 하면 치근덕거리고, 빌리 비빗은 ‘관찰‘이라는 명목으로 타인에 대한 중상을 일지에 적는 일을 완전히 중지했다.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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