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폭풍, 스피노자 - 자유를 향한 철학적 여정
손기태 지음 / 글항아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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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이야기>를 읽고 나서, 스피노자를 별도로 읽어야겠다는 소박한 욕심이 생겼는데, 결론적으로는 선택을 아주 잘한 셈이다. 철학에 대해 전문적인 식견이 없는 나 같은 초보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할 뿐만 아니라, 비교적 짧은 지면에 스피노자 철학의 특성과 깊이를 충분히 담아냈다. 


왜 스피노자가 "고요한 폭풍"인지, 그리고 이성의 최첨단을 달린다는 현재, 다시 그의 철학을 상고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풍성한 질문과 전문적인 식견을 따라가다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갈 정도다. 


스피노자는 신앙과 철학의 자유를 꿈꾸다가 파문을 당하고 추방되었으며 그의 책은 금서 조치까지 될 정도로 평생 고립된 삶을 살았지만, 더없이 자유롭고 한없이 평안한 일상을 인식하며 자기 철학의 옳음을 생으로 확증한 독특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나'의 존재로부터 신의 존재와 세계를 설명하면서 인식의 주체와 인식의 대상을 분리하였다면, 스피노자는 신을 세계와 분리되어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과 만물을 만들어내는 자연 그 자체로 인식한다. 


즉, 데카르트식 사고가 인간을 자연에서 분리하여 자연을 정복하고 군림하는 인간우위의 논리로 이어진다면, 스피노자는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으로, 신의 법칙, 즉 자연의 법칙에 따라 지배되며, 신은  단순한 정신이 아니라, 신체도 포함하는 자연 자체로 파악한다. 


스피노자가 이해한 신은 모든 만물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에게 드러나며, 풍성한 변용을 통해 다양한 양태로 표현된다. 자연을 구성하는 개체들은 인과 작용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며 자연은 무한한 변화를 품으면서도 자산의 존재를 변함없이 유지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수학적 법칙 처럼 자연은 무수한 개별적인 인과 관계의 연결망으로 이루어져 있고 외부의 자극 등 다양한 변수에 의해 변화될 수 있어, 우리의 삶은 우연과도 같은 동요 속에 흔들린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연 만물은 그 존재 자체가 목적일뿐 어떤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도 일갈한다. 인간의 나약함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 상상하면서 미신, 계시, 징표를 추구하고 선과 악, 유익과 해악을 나누는 것일뿐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신체와 정신에 대해서도 어느 하나가 우월한 것이 아니라 동등하고 평행하다고 본다. 자연 만물이 변용하면서 속성은 다르지만 지위가 같듯이 신체와 정신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확장은 선악과를 따먹는 인간에 대한 이해부터 파격적으로 적용된다. 그는 신을 어기는 것은 아담에게 애초부터 허락되지 않는 것으로써-인간이 신을 어길 수 있다면 신은 더이상 신일 수 없으므로-아담은 단지 하나님의 명령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일뿐이라고 여긴다. 신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한 것은 독이 치명적이므로 죽는다는 것을 계시하는 것 뿐이라는 것이다. 선악과가 선하고 악한 것이 아니라 아담의 신체에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신에게 나아가는 것은 자신의 상상이나 오도된 관념이 아니라, 정확한 인식이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선악을 들이대며 명령으로 강제하는 도덕이 아니라 특정한 조건 아래서의 선악을 구분하는 규칙을 헤아리는 것이 인간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신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다르며 인간의 본성을 신에게 투영하려는 기복신앙의 문제점을 간파한다. 신은 인간처럼 외적 자극이나 충동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능력으로부터 자신의 행위를 결정짓기에 진정한 자유의지를 가지며 그러므로 가장 자유롭다는 점을 상기하고, 신의 뜻은 인간이 진정한 '자유'를 갖도록 하는 데 있다는 점을 착안한다. 


한편 스피노자는 인간의 신체는 무수한 개체로 이루어져 있고, 정신 역시 다양한 관념의 합체라고 본다. 또한 신의 변용으로 나타난 다양한 자연의 존재들은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는 힘과 노력-코나투스-를 가지고 있는데, 존재의 유익을 추구하려는 욕망을 통해 자신에게 적합한 것과 결합하고, 자신에게 부적합한 것에 대하여는 피한다고 설명한다. 


특히 신체의 변용에 대한 관념은 아펙투스로, 정서라고 할 수 있는데, 외적인 마주침에 의해서 생겨난 정서는 수동적인 것으로의 정념과, 자신의 능력에서 나오는 능동적인 정서로 구분된다. 인간은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추구하려는 욕망에 기초하여 행복으로 나아가지만  정념에만 의존하면서 판단을 하면 부적합한 인식을 하게 되므로, 예속 상태가 되고, 진정한 자유를 위하여 종국에는 능동적인 정서로까지 나아가야한다고 주장한다. 


정확한 인식을 하기 위해서는 적합한 관념을 가져야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단순히 앎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기쁨을 주는 관계를 확보하는 것, 달리 말하면 스스로 기쁨을 주는 원인의 관념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매 순간 다른 개체와의 마주침을 통해 공통적인 것을 더 많이 인식할 수록 더 적합한 관념을 갖게 되는데, 추상적인 개념만을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 자신의 삶에서 실천함으로써, 지속적인 마주침을 통해 자기 스스로의 관념으로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예속에서 벗어난 자유인들의 종교는, 죽음이나 악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신에 대한 사랑으로 행동하게 되는 덕 자체를 갖는 것으로 귀결된다. 또 인간은 사회 안에서 더 큰 능력과 행복을 추구할 수 있으므로 사회를 구성하게 된다고 보면서, 국가의 통치를 받더라도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보장받지 못한다면 통치에 대한 합의는 무효가 된다고 주장한다. 스피노자는 최선의 국가는 정치 체제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자유와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국가인가에 방점을 둔다.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고, 자연 만물과 연결되는 인간을 그려내며, 공동체의 가치에 주목하면서, 신의 진정한 뜻을 치열하게 찾았던 스피노자는 철학자일뿐만 아니라 치유자이자 혁명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구분과 분열, 우위와 열패로 치닫는 요즘,  스피노자를 다시 기억해야하는 이유가 아닐까. 

정서의 조절과 억제에 대한 인간의 무능력을 나는 예속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정서에 복종하는 인간은 자신의 권리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운명의 권리 아래 있으며, 흔히 더 좋은 것을 보기는 하지만 더 나쁜 것을 따르도록 강제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운명의 힘 안에 있기 때문이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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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이 읽는 금강경
이현주 지음 / 샨티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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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가르치는 경전이라면, 그가 누구든, 가르침을 배울 수 있으리라는 법륜 스님의 추천사가 이 책의 모든 것을 요약하지 않을까 싶다. 


특히 이 책은 목사님이 직접 풀이한 주해서라서 금강경의 내용과 성경의 말씀을 비교해볼 수 있는 장점이 두드러진다. 불자가 아니어서 잘 모르던 용어도 목사님이 공부하면서 익힌 개념으로, 쉽게 풀이하므로 이해가 쉬운 것도 손꼽을 수 있다. 가령 부처님이 여래인 까닭은, 나지 아니하고, 죽지 아니하며, 오지 않고 가지 않고, 앉지 않고 눕지 앉으며, 마음이 텅 비어 고요하고 깊은 물처럼 맑고 깨끗하다는 의미라거나 보살은 깨달은 중생으로 "정"이 있어 망상을 끊지 못한다는 것과 같이 일상에서 제법 많이 들어보았지만, 제대로 모르던 바를 친절하게 설명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중생으로 끊임없이 나고 죽으며, 부처님은 중생으로 하여금 일체 나지도 죽지도 않는 무여열반에 들게 하여 일체의 습기, 번뇌가 없는 삶과 죽음의 바다를 건너게 하는 멸도를 하도록 하는데, 멸도는 결국 '나'가 없어지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나'로 불리우는 '나'를 '나로 착각하는 것이 아상으로, 아상이 있는 자는 높은 사람은 떠받을면서도 가난한 자나 어리석은 자를 얕보고, 인상이 있는 자는 주와 객을 나누어 스스로 아는 체 하여 깨닫지 못했으면서도 깨달았다고 자랑하며, 중생상은 진실을 구하는 마음이 있다면서도 말과 행동이 다르고 수자상은 깨우침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경계가 드러나면 감정이 일어나 복리를 구하는 것으로, 이 중 하나라도 있으면 중생이고 보살이 아니라고 한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씨뿌리는 자의 비유"와도 닮았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왜곡된 나로부터 진정한 나로의 각성을 강조하시듯 부처님도 우리가 원래의 상태로 존재하는 것, 그것이 진리라고 단언하신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보살의 보시와 비교해볼 수 있다. 안으로는 집착을 부수고, 밖으로는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되 보은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깨달은 자로서 나와 너가 없고, 주고 받는 그것조차 없음이니 주고 받는 바를 드러낼 필요도 없고 드러나지도 않는다. 우리가 이미 죄인되었을 때에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에,  이웃 사랑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밖에 없는 셩경의 교훈과 자연스럽게 대조된다.


일체의 상을 떠나면 곧 부처로, 결국 만물은 '나'의 한 모습이 구현된 것일 뿐이라는 해설이 가슴에 와닿는다. 목사님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을 말씀하신 히브리서를 들어 모든 것들이 확률로서 존재하는 움직임이라는 점에 착안해, 사물을 보는 관점을 변화시켜야한다고 주장한다. 나의 존재를, 예를 들어 남자, 사람, 생물, 일물로 확장시켜 가면서 품을 넓히라는 인생의 지혜도 의미있는 가르침이다.  


틱낫한 스님을 인용한 부분도 금강경 뿐만 아니라 성경을 읽는 시야를 바꾸는 데 도움이 된다. 삶의 두 가지 차원을 기억해야한다는 것, 즉 물결과 같은 삶으로서 역사적 차원과 또 물과 같은 궁극적 차원으로, 우리는 물결을 경험하면서도 물을 경험하는 법을 발견해야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은 '장차 올 나라이면서 동시에 지금 여기에 있어야 할 하나님 나라'라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모든 것이 텅 비어 있는 것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우주에서, 실체라고 생각하는 허상을 밟고 서서 가르침을 따라 길을 걸어, 마침내 천상천하 유아독존, 천하 만물이 곧 나임을 깨닫는 데까지 이르도록 부단히 노력해야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서, 다시 예수님을 배우고 성경의 진의를 되짚어보도록 하는 귀한 책이다. 

깨달음이란 본디 나에게 있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없는 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는 길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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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칼 - 일본 문화의 틀
루스 베네딕트 지음, 김윤식.오인석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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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한다'는 것의 의미와 관점은 다양하겠지만, 자료를 모으고 틀을 만들어 새로운 통찰의 지견을 제공하는 것은 생각보다 더 어려운 일일테다. 더욱이 종전을 앞두고 조바심이 난 정부의 의뢰를 받은 상황이라면 뉘라서 선뜻 힘겨운 작업에 나설 수 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놀란 것은 책의 내용보다 미국의, 사안에 접근하는 방식과 태도였다. 승전국의 기치를 올릴 시점에, 가장 명료하면서도 세련되게 일본을 굴복시킬 묘책을 인류학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승리의 분위기에 흔들려 감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대신, 평화의 상징으로 분한 미국의 정신을 자연스럽게 이식하면서도 새로운 반발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한 방안으로, 연구를 의뢰한 정계의 식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하나는 저자인 루스 베네딕트가 일본을 직접 방문하지 않고서도 일본의 여러 문헌, 영화, 일본 지인들과의 면담을 통해서 일본을 이해하는 분석의 틀을 찾아냈다는 점이다. 저자는 서두에서 본인이 직접 기술한 것처럼, 적절한 질문을 통해 어려운 작업의 물꼬를 텄다. 종의 기원에 관한 이론을 세울 때처럼, 자료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무엇을 알아야하는가, 일본인들이 드러내는 태도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미국인의 관점에서 볼 때 이상한 것은 무엇이며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알아야하는가, 처럼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서 자료를 정리하고 분류했다. 이 점은 책의 내용과 더불어 적절하고 좋은 질문이 어떻게 연구를 가능하게 하는지 이해하게 하는 모범이 된다.


 또한 사회학이나 심리학이 보여주는 분포나 측정의 통계적 분석 이전에, 일본인의 생활방식, 체계적 관념, 범주와 상징의 이해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는데, 왜 미국 정부에서 "인류학자"에게 이 중요한 연구를 의뢰했는지 가늠하게 하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먼저 저자는 전쟁에 대한 일본인의 관점과 태도를 분석하는 데서 시작한다. 미국은 일본, 이탈리아, 독일 등의 침략행위가 국제 평화를 침해했다고 보는 반면, 일본은 각 국이 절대적 주권을 가지고 있는 동안 세계는 무정부 상태가 되므로 일종의 계층제처럼 세계가 재편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는 점을 제시한다. 일본은 사회 자체가 저마다의 알맞은 위치를 차지하도록 구성된 나라이며 정신력이 물질을 이길 수 있다고 믿어, 실패를 하거나 심지어는 죽음 앞에서조차 정신이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또 안심의 문제를 일종의 각오의 결과로 여기므로, 모든 것이 예기되고 충분히 계획된 일이라는 가정 아래에서 모든 사태는 수동적으로 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태도를 갖추고 있다는 점을 간파한다. 


이어 천황과 일본인의 관계에 대해서도 면밀하게 분석했는데, 수 많은 포로 중 반 천황적인 진술서는 단 세 통뿐이었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일본인과 천황의 동일시에 대한 삽화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일본인은 계속해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점을 염두하며 전쟁에 임하고 일상 생활도 영위한다는 점을 포착한다. 특히 무항복주의는 일본인 특유의 명예에 대한 집착과 연결되는데, 죽을 때까지 싸우지 않고 항복한다면 살아도 죽은 자가 된다는 점을 밝혀낸다. 


저자는 일본인의 생활 상을 탐색하면서, 적당한 행동에 의해 끊임없이 서로를 인식하는 계급적 차이는 단순한 계급의 차이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성별, 연령, 가족 및 친분 관계 등을 고려하면서 조화와 균형을 맞추어야하며, 가족과 친족을 넘어서서 사회 전반에서 생활 양식을 조율한다는 점을 이해한다. 


'모든 것을 알맞은 장소에 둔다'는 일본의 정신이 국민의 여론이 아니라 국민의 지지만을 요구하는 정치 체계를 만들어내고, 천황에 대한 신성불가침, 국가신토를 가능하게 한 부분도 찾아냈다.  


또 일본인의 문화 저변에서 작동하는 다양한 윤리 체계를 소개한다. 먼저 온의 문화가 소개되고 있는데, 일종의 채무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채무자가 자신이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살아가는 동안 의무를 이행해야한다는 것이다. 자신은 온을 받으면서도 상대에게는 온을 입히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설명한다. 


한없는 변제는 보통 기무라고 하며 부모님에 대한 고와 천황에 대한 주가 이에 해당되며 모두 강제성이 있다. 자신이 받은 은혜와 같은 수량만 갚고 시간도 제한된 부채는 기리라고 한다. 기리에는 법률상의 가족에 대한 일체의 의무가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기리는 자신, 그리고 관계 속에서 나타나야할 기리로 구분되는데, 관계 속의 기리는 주군, 근친, 타인, 먼 친척 등에 대한 기리가 있고, 자신에 대한 기리는 이름에 대한 기리로써의 복수,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음, 일본인으로서 일본인답게 예절을 다하는 의무가 포함된다. 


 이러한 윤리 체계는 일본이 패전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항복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 천황이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짐으로써, 일본에서는 미국의 점령 이후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저자는 일본인의 영원불변의 목표는 명예로, 전쟁의 원인도 무력이 강한 나라가 갖는 명예에의 욕망이 배후에 있다는 점을 읽어낸다. 그리고 실제 일본의 역사 속에서 패전한 경우에도 즉각적으로 적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배상금까지 지불하는 등 명예를 위하면서도 현실적이고 냉정한 면을 가진 특징을 소개한다. 


일본인은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면서도 인간의 욕망 충족에 대해서 인정하되 일정한 한계 내에 머무르도록 한다는 점도 포착한다. 일본인은 육체와 정신이 대립된다고 보지 않고 육체의 쾌락을 즐기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보므로, 일례로 첩 문화도 용인되었다고 본다. 또 일본인은 인간의 생애는 온화해야할 경우가 있고 거칠어야할 경우가 있다고 믿으며, 어떤 것이든 각각 때마다 필요하며 상황에 따라 모두 선하다고 인식한다. 인간은 선하며 더럽혀지면 더러움을  제거하면 선이 다시 빛난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기술한다. 


나아가 일본은 성실을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는데, 이 때 성실은 일본 정신에 의해 그려진 지도상의 길을 따르는 열정으로 일명 마코토라고 한다. 사리를 추구하지 않거나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행위 자체 뿐만 아니라 행위에 의해 파생된 결과도 책임지는 것 등을 의미한다. 


저자는 일본의 자기훈련에도 주목한다. 자기훈련의 총체는 일체의 자기감시나 공포심, 경계심을 버리는 태도로 죽은 자처럼 행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이는 무가라고 하는데, 일종의 '죽은 셈 치고'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셈치고 하자는 것은 오히려 공포나 불안을 초월한 사람으로 자유로운 자가 된다는 것인데, 우리의 관념과도 닮아 있다. 


1974년에 처음 출간되고도 계속해서 발행을 거듭할 정도로 적확한 분석이 탁월한 고전이다. 단순히 일본을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저자의 틀을 통해 우리를 다시 읽어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렇지만 이런 모든 모순이 일본에 관한 책에서는 날줄과 씨줄이 된다. 이런 모순은 모두가 진실이다. 칼도 국화와 함께 그림의 일부분을 구성한다. 일본인은 최고로 싸움을 좋아하면서도 얌전하고 군국주의적이면서도 탐미적이고 불손하면서도 예의바르고 완고하면서도 적응력이 있고 유순하면서도 시달림을 받으면 분개하고 충실하면서도 불충실하고 용감하면서도 겁쟁이이고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것을 즐겨 받아들인다....일본을 이해하는 것이 미국에게 매우 중요한 일로 떠오른 상황에서 수많은 모순을 보고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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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16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김근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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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를 읽으면서 한스 홀바인의 <무덤 속 그리스도의 시신>을 몇 번이고 다시 찾아보았다. 여행 중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그림 앞을 한참 동안 떠나지 못했고, 일각에서는 발작 증세를 보였다는 설도 있다. 소설은 한스 홀바인의 작품을 문학으로 승화했다고 했도 과언이 아니다. 


싸늘하고 피폐한 주검으로 무덤 속에 누워있는 한 남자, 그가 인간의 실존을 보여주는 동시에 신의 구원과 믿음에 대한 태도를 가늠하는 시발점이 된다니. 못 자국에 피멍이 든 손과 발, 죽음에 질려 핏기가 가신 표정, 기괴할 정도로 말라 틀어진 시신을 두고, 어디에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극형을 받은 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까, 죽음에 압도되어 완전히 무너진 저 육체가 다시 부활하여 영생할 수 있다니 과연 믿을 수 있는 일인가. 권능의 영웅이 아니라 실패의 노예처럼 처참히 무너진 모습 속에서, 작가는 인간의 실존, 구원, 믿음의 문제를 포착해낸다. 


<백치>는 일견 단순한 연애, 그것도 지지부진한 치정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나스따시야는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고, 사회적인 명망가 또쯔끼의 눈에 띄어 그의 보호 아래 자라게 되지만, 순결을 잃고 타락을 추구한다. 그녀의 모습은 자신의 순결을 더럽힌 또쯔끼와 세상을 향한 복수이자 삶의 방식으로 그려진다. 그녀는 끊임없이 또쯔끼를 희롱하고 돈과 소유욕에 붙들린 가브릴라, 로고진의 삶을 휘두른다. 그녀는 미쉬낀을 사랑하지만,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생각하기에 순결하고 아름다운 아글라야, 예빠친 장군의 딸과 맺어지기를 희구한다. 그녀는 로고진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예상하면서도 로고진과 떠난다.  


주인공인 미쉬낀 공작은 지병으로 스위스에서 치료를 받고 러시아로 돌아온 청년으로, 티없이 맑고 꾸밀줄 모르는 진정성 때문에 사람들에게 백치로 불리울 정도로 순진하지만, 나스따시야의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반면 가브릴라는 또쯔끼의 꾀임에 빠져 돈을 받을 목적으로 나스따시야에 접근하며, 로고진은 미쉬낀의 대척점에 선 인물로 나스따시야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녀에게 돌진하며 마침내 그녀와 결혼하지만, 결국 나스따시야를 살해하고 만다. 


<백치>의 또 다른 축은 연애사를 관통하는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인데, 상황과 맥락에 따라 자신의 이기심만 충족시키며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레베제프와 죽음을 앞두고 무자비한 신에게 마지막 자유마저 빼앗기고 싶지 않다며 자살을 꿈꾸는 이뽈리뜨가 대표적이다. 특히 로고진이 끝없는 소유를 갈구하면서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지만 마침내 파멸하는 인간의 모습을 대변한다면, 이뽈리뜨는 확고부동한 법칙처럼 굳건한 신에게 대항하며 죽는 순간까지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극대화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인간의 무한한 자기애를 대표한다. 


미쉬낀 공작을 연모하면서 그가 자신의 이상을 구현하리라 소망한 아글라야는, 미쉬낀 공작이 나스따시야를 찾으러 떠나자 외국인과 결혼하는 인물로, 미쉬낀 공작의 면모를 알아보는 혜안을 가졌지만 자신의 목적을 투사할 인물로써 그를 사랑한다. 


<백치>에서 미쉬낀은 타락한 러시아 사회에 대비되는 그리스도의 화신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는 순결을 잃었다며 스스로를 타락시키는 나스따시야를 진정으로 사랑하지만, 독점욕에 사로잡힌 로고진의 살해로부터 그녀를 지켜내지 못한다. 그는 살인자 로고진이 의식을 잃고 열병을 앓자 그의 옆에서 머리와 뺨을 달래주듯 쓰다듬어 주었을 뿐이다. 결국 로고진은 법령에 따라 유형에 처해지고, 미쉬낀은 그야말로 지능 조직이 완전히 파괴되는 백치가 된다. 이로써 미쉬낀은 욕망에 사로잡힌 주변 인물들, 상황에 대한 기억, 해석..모든 것을 잃어갈 것이다. 이것은 죄과를 기억하지 않는 용서를 예표한다. 


그야말로 한스 홀바인의 그리스도처럼 미쉬낀은 처절하게 실패했고, 소설의 주요 인물들은 누구하나 자신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좌절한다. 무엇 하나 성취된 것이 없고 어느 누구도 긍정적 결론의 화자가 되지 못한 결론은,  다시 한스 홀바인의 그리스도를 돌아보게 한다. 구원의 결과는 성취이며, 성공이고, 긍정이어야 하는가. 타락해가는 세상을 뒤엎는 권능의 군왕이 군림하므로 인간의 욕망이 뜻하는 바, 그 결실을 맺는 그것이야말로 구원인가. 왜 구원의 핵심은 죄의 용서인가. 나의 욕망을 올곧이 성취할 이가 메시야인가. 바보처럼 실패하고, 저능아처럼 순전한 미쉬낀 같은 이가 다시  메시야로 재림한다면, 우리는 그가 구세주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백치>를 읽고 나면, 나약한 인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포착하기를 질문하는 한스 홀바인의 그림 앞에서,  쉽게 떠나지 못한 작가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것 같다.  

그러나 슈나이더 교수는 갈 때마다 인상을 더 찌푸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슈나이더는 환자의 지능 조직이 완전히 파괴되었음을 암시하며, 아직 불치라고 확정짓지는 않았지만 넌지시 가장 비관적인 암시를 해주었다 - P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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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이야기
윌 듀란트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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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에 의하면, 윌 듀랜트는 무려 이 책을 11년간 준비했고, 3년 동안 집필하는 각고의 노력을 다했다고 한다. 그에 걸맞게 이 책은 전문적이면서도 너무 딱딱하지 않게, 논리학, 미학, 윤리학, 정치철학, 형이상학 등 철학의 각 분야와 연관된 철학자의 삶과 사상을 펼쳐보임으로써 저자가 주장하는 철학의 최고 효용 가치인 "종합적 해석"의 미덕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외관은 철학사의 연대기에 따라 철학자를 단순하게 소개하는 것 같지만, 각론에 들어서면 철학사의 변곡점에 있는 철학자의 삶과 사상을 통해, 철학의 흐름과 변화를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배치하고 있다. 특히 단순히 철학적 사상의 개요을 설명하기 보다는, 철학자의 다양한 저술을 직접 인용하면서도 그의 삶, 시대적 배경과 연합시켜 사상적 탄생의 줄기를 가늠하도록 한다. 


가장 흥미 있게 읽은 부분은 스피노자와 베르그송이었다. '범신론'과 '창조적 진화'라는 대표적 특징만 외워야했던 일천한 암기식 공부의 허상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느낌이랄까. 저자의 주장처럼 철학은 독립적인 삶의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 될 수 있는데도, 삶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해답의 단초는 적확하면서도 간결한 저자의 기술에서 한껏 드러난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인식론이 보여주는, 나란 존재와 외부라는 세계의 양분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외부의 세계가 나라는 존재와 합치될 수 있는 통일성, 그 근간을 추구하고자 했다. 가족으로부터의 배척, 종교적 파문, 외부 세계와의 단절 속에서도 그를 구원해낸 것은, 역설적이게도 이 모든 불행의 원인이었던 그의 철학이 아니었을까. 스피노자는 극단의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 평온이 가능한지, 철학과 삶으로 대변한다. 


스피노자는 성경은 오류와 모순이 아니라 이성적 합리성에 의해 기술 된 것으로 오히려 은유와 비유로 표현되었다고 단언한다. 직접적인 기술이라면 자연이 평소 질서에 따라 움직이면 신의 활동이 없는 것이며, 기적은 신의 선민들을 위해 신이 활동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함으로써 신과 자연의 대립되는 힘을 가정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기술하는 방식은 인간으로부터 신앙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므로, 성경은 은유와 시 등으로 표현되는데, 이것이 파괴되면 또 다른 신앙 형태를 만들어 낼뿐이라고 진단한다. 즉 자신들을 끊임없이 추종하는, 기적과 이적의 신이 존재해야 것. 이단으로 몰렸던 철학자는 이성으로써 기적의 신앙이 갖는 부조리를 간파한다. 


그러므로 신과 자연이 불변의 법칙에 따라 활동하는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철학자는,  불변하는 법칙에 따라 활동하는 동일한 존재인 법칙, 즉 영원한 진리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윌 듀랜트는, 이러한 점에서 스피노자가 추후 헤겔 철학으로 이어지는 연결점을 자연스럽게 설명한다. 


베르그송은 기계론과 유물론에 잠식당한 인식 세계에 생경한 관점을 투척한다. 그는 우리가 공간적 개념으로 사고하려는 경향성 때문에 유물론에 기울어질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공간처럼 시간 역시 모든 생명과 실재를 지탱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시간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축적, 성장, 지속되는 것으로써, 과거 전체가 연장되어 현재 속에서 현실적으로 작용되고 있다. 즉 모든 단계에서 새로운 축적이 생겨 결코 과거와 같지 않으며 기계론적이고 기하학적인 예측 가능성은 환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며 변화하는 것은 성숙하는 것이고 성숙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무한히 창조하는 것이라고 결론 짓는다. 


그는 정신이 곧 뇌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지성은 고정된 것을 포착할 뿐 생명의 지속적인 흐름을 보지 못하므로, 물질을 보면서도 에너지는 보지 못하는 맹점을 찾아낸다. 또한 생명은 관성과 우연에 반대되는,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끊임없이 생산하는 우주적 충동이라고 정의하면서, 우리가 자유롭게 행동할 때, 즉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우리의 삶을 계획할 때 우리는 내면에서 창조를 경험한다고 제시한다. 


지면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기획을 바탕으로 철학자의 사상과 삶을 꼼꼼하게 기술한 저자 덕분에, 이 책의 가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두터워질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사실상 위인들은 우리들에게 그들의 말을 들을 줄 아는 귀와 영혼이 있을 때에만, 적어도 우리들의 마음속에 그들이 꽃피게 한 사상의 뿌리가 간직되어 있을 때에만 우리들에게 말을 하는 것이다. 우리도 위인들과 같은 경험을 했으나 우리는 이러한 경험에 간직된 비밀과 미묘한 의미를 남김없이 흡수하지 못했다. 우리는 주위에서 윙윙거리는 실재의 배음을 들을만큼 민감하지 못했다. 천재는 실재의 배음과 천체의 음악을 듣는다. 천재는 피타고라스가 철학을 최고의 음악이라고 말한 의미를 알고 있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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