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 問 라이브러리 5
강수돌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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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이 아닌 질문의 절실함을 위하여’책 안표지에 새겨진 출간의 기치가 마음에 와 닿았다. 제시된 답들이 도출되도록 하는 질문이 배제되면, 독자는 전적으로 수동적인 자세에 머무르고, 약자 된 자의 책읽기는 결국 활자 탐독으로 내달릴 수밖에 없을 테니까. 


자신이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한 상처가 일중독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비교 연구 결과가 눈길을 끈다. 자신의  정체성이 모호하므로 ‘분주함’을 무기 삼아, 그 필요성을 스스로 되내이면서, 분주하도록 하는 ‘일’, 그것이 곧 자신이라고 규정하고 덧칠하는 비참함. 비극은 이 비참함이 통찰의 시야를 거둔다는 데서 시작된다. 모두가 ‘분주함’이란 동일한 정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면, 너와 나의 구별을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성과가 필요하고, 이러한 가시적인 성과를 이끌어내려면 경쟁은 필연적으로 존재해야한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이 제시하는 경쟁 논리는 강자의 논리인 동시에 통찰의 시력을 잃어버린 약자에게도 반드시 필수적인 논지다. 즉 경쟁 논리는 강자의 횡포로 어쩔 수 없이 약자가 받아들이는 논리가 아니라, 정체성이 무너진 약자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존재 이유를 옹호할 논지로써 반드시 정립할 수 밖에 없는 이론이란 생각이 든다. 경쟁 논리는 강자가 생산하여 약자에게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 강자와 약자는 산업 사회가 몰고 온 경쟁논리란 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위치에 서 있을 뿐이고, 결국은 협력하여 경쟁논리를 재생산, 재확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교수님은 강자와의 동일시 논리를 대입하여, 도망칠 수도 없고 싸워봐야 결과도 뻔한 상황에에서는, 약자는  강자와의 동일시를 통해 안도감을 획득하므로, 자신의 내면의 외침과 다르게 경쟁 논리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사회적 다원주의 의식이 뿌리내리게 된다고 설명하셨지만.  


언제나 백전백승할 수 있는 강자의 논리를 깨기 위하여는, 맞서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판을 바꿔야하는 것이고, 판을 바꾸기 위한 새로운 담론으로부터, 즉 삶의 본질 찾기에서부터 생태주의가 비롯된다고 이해했다. 그러나 경쟁 논리를 기준으로 강자와 약자를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점으로 구분하는 것은 생태주의가 필요한 까닭을 이해하도록 하는 방법론으로서는 쉬울지라도, 생태주의의 의의를 절감하는 결과가 아닐까, 약간 우려가 됐다. 강자와 약자 모두 가해자며, 동시에 피해자라는 관점을 가져야만 생태주의는 단순히 약자가 강자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새로운 구도를 만들어내는 도피의 패러다임이 아니라, 경쟁 논리로 연합된 강자와 약자를 모두 살리는 부활의 대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까닭.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는 강자여서 더디 옮겨갈 수 밖에 없지만, 약자가 먼저 뿌리내리고 연대하여 소통하면서 마침내는 강자까지 견인해오는, 모두의 승리가 있는,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대안. 생태주의는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한 전략을 새롭게 알게 됐다. 5D3C, 부정(deny), 지연(delay), 지배(dominate), 왜곡(distort), 사기(deceive), 부정부패(corruption), 감투씌우기(cooptation), 우호적 협력(cooperation). 뒤틀린 전략을 무력화하는 것도, 본질적인 해답은 ‘사람’임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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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교육의 성공 - 경쟁에서 벗어나 세계 최고의 학력으로
후쿠타 세이지 지음, 나성은.공영태 옮김 / 북스힐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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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TV에서 어느 교수님은 21세기 교육은 물고기를 잡는 법이 아니라 바다를 갈망하는 것이 되어야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바다를 갈망하도록 하는 교육을 알차게 실천하고 있는 나라를 꼽으라면, 아마 현재로서는 단연 핀란드일 것이다. 이 책은 교육 전문가뿐만 아니라 교육을 하루 빨리 국민의 권리로 인식해야할, 우리 국민 모두의 필독서가 되어야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한 명의 인재가 전체를 먹여 살린다며, 오로지 엘리트 중심 입시 위주의 교육에 매진하고 있는 사이, 핀란드는 학생 각 개인 개인이 자기 스스로  다양한 지식을 탐구하고 배워 문제 해결을 하면서 협력하면 사회 전체가 함께 성장할 수 있다는 데 힘을 더하고 있다. 더구나 허튼 꿈처럼 소박해 보이는 핀란드의 교육철학은 OECED 국제 학업 성취도 비교 연구인 PISA에서 전 영역에 걸쳐 고루 1위를 성취함으로써, 우리의 빈곤한 교육철학 심연을 뒤흔들고 있다.

1. 교육철학
사실은 하나여도 지식은 여러 개가 될 수 있다는 사회적 구성주의가 핀란드 교육철학의 핵심. 학교는 단순한 지식 수용을 위해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학생들이 스스로 배우는, 그  배움을 지원하는 곳이어야 한다는 철학이 확고하다.  당연히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것. 그러니 동일한 시험 평가를 통해 일렬로 줄 세우기는 필요 없다. 배움은 순위를 매길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공부를 잘 하는 아이는 따로 지원할 필요 없이 알아서 잘 하고 있으니 그냥 두고, 뒤처지는 아이들은 특별 교육 지원을 통해 일시적으로 도와준다. 공부를 하는 이유를 알면 스스로 공부를 잘 할 수 있다는 기본 상식을 공교육에 그대로 녹여내고 있다.

2. 민주 시민 교육
헬싱키 시의 학생 대표들이 5월 정도 시의회 의회장을 빌려 각 학교의 제안을 심의하고, 거기서 통과되면 시정에 반영된다는 데 놀랐다. 우리 아이들은 고등학생조차도 학교의 학칙이 어떻게 제정되는지, 어떤 조항이 있는지 모르는데, 핀란드 아이들은 초등학교에서부터 민주적인 정책 결정 과정을 직접 현장에서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논지를 세우기 위해 아이들은 왜 그 제안이 나오게 되었는지,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 무엇을 보완하고, 누구에게 조언해야할 것인지 스스로 판단할 것이다. 즉 실생활에서 전략적이고 실제적인 사고를 하게 되는 것이고, 나에게 현재 필요한 공부가 무엇인지, 무엇을 취하고, 버려야할 것인지 매 순간 판단할 수 있는 태도와 힘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학생회 자체가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 우리 나라의 현실과 비교할 때, 정말 우리 교육이 어디에 방점을 두어야할지 시사점이 크다. 우리가 단선적인 교육에 시간과 돈만 투자하고 있을 때, 핀란드 아이들은, 입체적인 교육을 , 사회와 학교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스스로 진행하고 있다는 게 가슴 아프다.

3. 교사 및 교육 지원
핀란드 교사는 석사 학위 소지자이며, 1990년대 핀란드 교육 개혁을 하면서 장학관을 없앴다는 대목이 인상 깊다. 일률적인 교원평가도 없단다. 학교에 교사 개인 연구실이 있고, 교육 본연의 업무에 집중하도록 최대한 지원하고 있으며, 퇴근도 수업 끝나면 바로 가능할 정도다. 최상의 수업만 준비한다면 일찍 퇴근하든 말든 상관 없다는 것. 전문가를 국가가 직접 관리할 필요 없으며 전문가는 스스로 자신의 전문 능력을 신장해나가기 때문에 교사들이 어떤 연수가 필요한지,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에 집중한다는 것. 교사는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선망의 직업이란다. 교사를 불신의 대상이 아니라, 신뢰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핀란드 당국은 아낌없는 정책 지원과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교사들은 교육 본연보다 행정 업무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다. 핀란드의 한 학급이 20여명 내외인 반면 우리는 40여명에 육박하고 있다. 학교 교육의 질을 망가뜨리고 있는 원인을 교사에게서 찾는다. 인재들이 왜 학교에서 좌절하고 뒤처지는지 그 이면을 숙고하는 대신 불경기에 고정된 월급 따박 챙기는 안정된 직장인이 무슨 불만이 많으냐며 전 국민의 적(?)으로 몰아세우는 데 주저함이 없을 정도다. 공교육의 문제를 교사에게 뒤집어 씌우면 모두가 한결 마음 이 편해지는 것처럼. 지자체는 남는 예산을 교육비로 넘기며, 일본의 같은 규모의 시와 비교할 때 핀란드의 경우 무려 5-7배의 도서관이 있다는 점도 눈여겨봐야할 대목이다. 교육은 권리이기 때문에 대학까지 무상교육을 실시하고, 세금 부담에 대하여도 자신들이 여기까지 온 것은 학교 교육의 힘이므로 복지와 교육은 당연히 연계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는 합리적인 태도. 개인의 경제적, 사회적 배경에 따른 기회의 차별을 핀란드 학교는 훌륭하게 희석시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급식은 시가 동일한 식단으로 운영하되, 카페테리아 식으로 학생들의 선택권을 존중하고 있다는 관찰이 기억에 남는다. 우리의 일률적인 학교 급식 문화는 학생들에게 전체성을 강요하는 것과 더불어 대형 식중독 사고의 우려를 늘 내포하고 있는데 말이다. 보건교사의 역할과 건강교육이 단연 눈에 띈다. 아이의 결석을 담임교사가 아니라 학교 단위 복지 팀에서 여러 교사가 함께 고민하다는 것이 인상 깊다. 우리나라 보건교사가 체육보건급식과 소속이라며 행정 편의적인 체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당하고 있는 반면, 핀란드에서는 상담 복지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보건교육은 7,8,9학년에서 3단위 이수하도록 하고 있다.

4. 마이너리티 존중
이민자들의 모국어 교육을 공교육으로 실시하고, 2004년 국가 수준 커리큘럼에서는 수화를 모국어로 지정했다고 한다. 전 국민의 의식 속에, 평등과 통합이 제도적으로 깃들 수 밖에 없는 교육 시스템 설계. 통합과 평등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제도와 환경 속에서 배우는 것이란 사실을 핀란드는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 것 같다.

5. 기타 의견
PISA는  읽기 소양, 수학적 소양, 과학적 소양, 문제해결능력 등 학력 뿐만 아니라, 학생 생활을 함께 조사하여 그 나라의 공교육을 입체적으로 분석하고,평가하고 있다. 현재 우리의 일제고사는 학력 평가만 하다 보니, 개인별 평가가 아니라 결국 학교 줄세우기가 되고 있고, 성과 지향성으로 귀결되어  어떻게든 투입을 늘려야하는, 즉 시간과 돈의 집중적인 투입을 불러올 수 밖에 없는 순환의 고리에 엮여 있다. 우리도 학력이 아니라 학생 생활 조사가 필요하리란 생각이 든다. 사교육과 야간자기주도학습 교육으로 메워진 부분을 정확히 찾아내야하고, 교사들에 대한 지원, 학교 의사결정구조의 개선, 학생들의 학습 선호도 등을 다각적으로 분석해서 학교 시스템을 재구조화해야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가장 아쉬웠던 점은 후쿠타 세이지 교수가 교사들에게 먼저 자신이 만든 교과서로 수업부터 시작하라는 것을 제안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가장 실천하기 쉬운 방법이니 제안했겠지만, 어쨌든 화살의 방향을 제일 먼저 교사에게 겨누고 있다. 칼은 교사가 아니라, 교육 철학을 점검하는 데부터 시작되어야하는 것 아닐까. 또 한 가지, 이 책에서는 주로 초등학교 관찰기가 주를 이룬다. 핀란드의 중․고등학교, 나아가 대학의 교육과정 등을 알 수 있는 후속 연구도 있었으면 좋겠다. 아울러 핀란드 교육의 단점은 무엇인지, 장점이 아니라, 단점만을 찾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접근한 그런 연구 보고서도 있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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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서신 1 - 김대중이 이희호에게, 편지로 새긴 사랑, 자유, 민주주의
김대중 지음 / 시대의창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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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그 어떤 핑계도 댈 수 없도록 하는 인생을 읽고, 한참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차가운 옥중에서 원망과 분노로 점철한 활자 대신, 감사와 용서, 그리고 배움의 즐거움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 과연 누가 그 앞에서 힘겨움을 이유로, 괴로움을 까닭 삼아 인생을 저주할 수 있을까. 신앙과 신념으로 무장한 인생은 모든 역경과 고난을 재해석하고, 변화를 준비하는 시금석으로 삼았다. 민주화와 자유에의 신념, 가족과 민족에 대한 사랑,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바로 서는 그것만을 염두하면서 기다리고 기대한 세월, 행동하는 양심의 철학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1. 민주화와 자유에의 신념

경제적 근대화가 이루어져도 정치적 민주화를 이루지 못해 결국 군국주의와 독재로 나아간 독일과 일본의 역사를 통찰하는 시각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국민의 참여 없이는 역사의 주도권을 잡을 수 없으며, 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소홀히 하는 철학의 빈약함과 잔인함을 실례를 들어 설명하는 내용을 읽고는 수십 권의 책을 한꺼번에 읽은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특히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루소, 니체의 인생, 사상을 비교 분석하여 설명한 부분은 한편의 연구논문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2. 가족과 민족에 대한 사랑

일가 친척, 도움을 주신 각 계의 여러 분들, 그리고 우리 민족에 대한 애절한 사랑이 서신 곳곳에 여실히 드러난다. 개들의 안부까지 일일이 챙길 정도의 그 세심함에 놀랐다. 특히 러시아와 중국의 미묘한 갈등 관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을 비롯한 중동 문제, 미국과 일본과의 외교 등 세계 정치의 흐름을 면밀히 분석하면서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할 길과 자세를 제시하는 내용은, 나처럼 경험 없고 지식이 짧은 젊은이들이 어떤 사안을 대할 때 어떻게 통찰하고 어느 관점에서 접근해야하는지 보여주는 좋은 실례가 되는 것 같다.

3.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바로 서기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의 의미를 되짚으며, 하나님께서 도도히 흐르는 역사 속에서 인간에게 원하시는 참된 뜻은 무엇이겠는지 성찰하고 반추하게 한다. 신앙을 의지하여 고난의 시간을 축복의 시기로 바꾸었고, 배움과 통찰의 계기로 전환했다. 신념의 사람에서 신앙의 인간으로 거듭날 때,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의 소명은 더욱 뚜렷해지는 것 같다. 자신의 신념을 오롯이 역사에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그 분의 뜻을 분별하여 동참하는 인간으로서, 역사에 투신하는 소명자로서의 삶. 무엇이 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하느냐의 삶으로 변하면 모두 성공하는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사색의 편린이 가슴에 날선다. 개인의 구원에만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사회적 구원에 크리스챤들이 책임감을 가져야한다고 강조한다.

4. 행동하는 양심으로서

피터 드러커 교수의 일화를 예로 들어 히틀러의 독주를 가능케 한 지식인의 침묵을 신랄하게 비판. 그저 출세하고 싶어서 나치를 맹목적으로 따랐던 기회주의 지식인이 있는가 하면, 히틀러와 함께 해야 나치를 바꿀 수 있다며 호기롭게 참여했지만 결국은 이용가치가 떨어지자 용도 폐기된 선의의 과대망상주의자들, 그리고 양심은 있지만, 악에 대해 침묵한 지식인들이 히틀러에게 힘을 주었다는 것. 에리히 프롬을 인용하여 주는 사랑의 삶이 되어야 하고, 자기보다 약한 자는 짓밟고 강한 자에게는 철저히 복종하는 권위주의형 인간이나 자신의 주체성이나 인격의 독립성을 포기하고 언론이 제공하는 대로만 세상을 해석하고,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하며 결코 고립되지 않으려고 하는 자동인형이 되어서는 더더욱 안 되며, 늘 비판의 견지를 가지고 주체적으로 해석하는 자세를 통해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야함을 역설했다.  


5. 그리고

끊임없는 지적 호기심과 왕성한 독서가 인생의 격과 품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한 단면을 읽은 것 같다. 또 사람들을 어떻게 규합하고 어떤 방식으로 선전하며 어느 때에 행동해야하는지 책상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살아있는 정치의 현장 학습 본보기들이 쏟아진다. 용서와 사랑이 결국은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하는 본질임을 더욱 확신하게 됐다. 용서를 통해 마음을 비운 사형수는 가슴에 꽃들을 품고 강아지의 안녕까지 염려하는 사랑을 싹틔웠다. 정치를 예술로 바꾸는 근본도 따지고 보면 나직한 사랑에서부터 출발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 명제를 그의 전 생애을 통해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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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3.0 - 김광수 소장이 풀어쓰는 새시대 경제학
김광수 지음 / 더난출판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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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란 그저 나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관한 문제라고, 부동산 잘 굴리고, 증권에서 기가 막히게 수익을 올리고, 저축으로 알뜰 살뜰 모으는 것에 관한 분야라고 지금껏 확신했던, 지극히 개인적인 정의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깨닫는다. 경제는 단순히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가벼운 지적 호기심을 채우는 대상이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알아야 할, 특히 나처럼 경제에 대한 무지를 오히려 자랑으로 여기는 서민일수록 챙겨야할 항목임이 더욱 절실해졌다. 왜곡된 경제 구조 아래서, 기득권층에 유리한 경제 정책이, 아무런 제동 장치 없이 아름다운 수식어로 적극 홍보되는 언론의 비호 아래, 열심만을 미덕으로 삼는 순진한 내가 발가벗기운 채 서 있음을 깨닫게 된 순간 더더욱.  

 그들의 경제 논리로 교육받고, 그들의 경제 논리로 이해하고, 그들의 경제 논리로 판단하는 한, 진짜 경제의 진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영원한 패자일 수 밖에 없다. 가난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집약하는 데 주저함이 없던 나의 가장 큰 죄는 경제에 대한 철저한 무지. 이런 의미에서 이번  <경제학 3.0> 읽기는 나의 죄를 씻어낼  회개기도 같다.  

빈곤의 문제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에서 참신함을 느꼈다. 빈곤은 필연적인 자본주의 경제의 현상이고, 시혜주의 사회보장제도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결국 인적 자본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와 정책만이 가장 이상적인 해결책이라는 데 적극 공감한다. 부가 새로운 카스트 제도의 의제로 떠오르는 현실에서, 특정 계층에게만 부의 독점이 심화된다면  사회적 약자는 절대로 불가촉 천민의 카스트 굴레를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 경제도 결국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고 보면, 관료 독재, 언론 정화, 구시대 기득권 계층의 물갈이 등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다는 관점도 적극 지지한다. 정권이 바뀌어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관료, 언론, 구시대 기득권 계층이야말로, 바른 경제 순환을 막는 혈전 같은 존재일 테다. 특정 부위의 혈전만 제거한다고 해서 순환이 개선되는 것이 아니다. 혈전이 생기는 근본적인 시스템 개선이 있어야만 선순환이 지속될 수 있다. 바른 인적 자본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현재의 시스템을  철저히 바꿔야한다는 데 힘을 더하고 싶다.  


경제만 살리면 되지, 민주화가 무슨 소용이냐는 똑부러진 질문의 맹점이 무엇인지 정확한 답변도 녹아 있다. 경제와 정치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위험한 문제 제기는 하루 빨리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할 것이다. 경제적 부를 어떻게 나눌 것이며, 어떤 경제를 지향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철저히 정치의 몫. 철학적 고민 없이 듣기 좋은 구호와 로또식 이벤트로 난무하는 경제 정책을 바라보면서, 이럴 때일수록 정치를 경계하고 정치를 증오해서는 안 되는 이유, 더 구석으로 몰리고, 더 힘들어질수록 어떻게든 정치에 참여해 목소리를 높여야하는 까닭, 명쾌하게 정리할 수 있게 된다. 언제까지 종국에는 그들의 몫이 되는 경제 성장을 위해, 속없이 박수만 보내며, 그들의 화려한 제단 위에 힘없는 제물로 바쳐지는 약자의 역할을 스스럼 없이 받아들일 것인가. 분연히 NO를 외치려면 경제와 정치를 알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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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강의
랜디 포시.제프리 재슬로 지음, 심은우 옮김 / 살림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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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소설가는 소설을 읽을 때 반드시 뒷장을 펼쳐 결론부터 읽는 습관이 있다고 고백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결론을 미리 알고 책 읽기를 시작하면 책을 읽는 즐거움이 반감될 텐데, 왜 굳이 그런 습관을 고수하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저 괴팍한 습관을 가진 소설가의 인터뷰가 흥미로울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의 습관이 의미 있는 행동임을 깨닫게 됐다. 결론을 숙지하고 읽게 되면 이야기의 맥이 생각보다 쉽게 잡힌다. 주인공의 인생사가 마지막 결론으로 이어지는 인과 관계를 치열하게 쫓을 수 있는데다, 때로는 그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의 일치로 운명이 뒤틀어지는 과정을 더 꼼꼼하게 목도할 수 있게 된다. 몇 차례 경험이 되풀이 되자, 어느새 나도 책의 뒷장부터 챙기는 습관이 생겼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책을 읽는 습관과 삶을 살아가는 태도가 닮아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피하고 싶어도 마주할 수밖에 없는 인생의 결론, 곧 죽음을 염두 하지 않는다면, 지금 끝이 없을 것처럼 질주하고 내지르는 이 모든 삶의 행위들은, 결국 내 생을 가로지르는 의미 있는 이야기로 연결되지 못하고, 그저 고리가 끊겨버린 허튼 행각으로  팽개쳐질 뿐이라는 생각.   

 

 

이런 의미에서 2010년 계획을 세우면서, 랜디 포시 교수의 <마지막 강의>를 읽게 된 것은 뜻하지 않은 행운이었다. 항상 열정이 넘치고 가슴에는 꿈이 풍요로웠으며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을 더 많이 흘려보내지 못해 안타까워한 어느 가장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 그 숭고하고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여정을 읽으면서, 나는 얼결에 그의 마지막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그가 맞이한 인생의 결론이 결국 언젠가 나 역시 마주하게 될 종착역임을 깨달았을 때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삶을 관통하는 올곧은 철학과 삶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로 일관한 그가 자신 있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들을  보면서, 과연 나는 내 인생의 마지막에 어떤 메시지를 남길 수 있을까, 문득 부끄러워졌다.  

 

사랑하는 아내 재이, 그리고 세 자녀 딜런, 로건, 클로이를 향한 사랑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마지막 강의를 통해 인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그의 간절함이 활자 하나하나에 새겨진 것 같다.  

 

세세하고 친절한 작은 메시지보다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삽화는 <컨버터블에 탄 남자>. 췌장암 선고를 받고 난 후 한 지인이 랜디 포시 교수에게 보낸 메일이었는데,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짜 자세는 어떤 것 이어야 하는지 짧은 지면이었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따뜻한 봄날 저녁 컨버터블에 탄 한 남자가 차 지붕과 창문을 모두 내리고 아주 편안한 차세로 음악을 들으며 혼자서 미소 짓고 행복해 한다. 그 모습이  인상 깊었던 지인은, 저 남자는 이 하루와 이 순간을 정말 감사해하는구나, 느끼고 있었는데, 컨버터블이 코너를 돌면서  운전자가 누구인지 확인하고서 깜짝 놀란다. 그는 다름 아닌 췌장암 선고를 받은 랜디 포시 교수였다. 그 때 자신이 본 모습이 너무 감명 깊어 랜디 포시 교수에게 메일을 보낸 것이었다. 랜디 포시 교수는, 자신이 췌장암을 선고받고 어쩌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연기를 하고 있을 수도 있고, 또 용기 있는 모습을 보여야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렸을 수도 있는데, 완전히 방심했을 때, 진짜 자신의 모습을 전해 준 지인의 메일이 의미가 컸다고 고백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로 보게 됐다는 것. 자신은 여전히 살아 있으며 인생이 행복하고,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활자로 남겼다.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생각할 때, 도망칠 권리도 허락되지 않은 채 끝으로만 치닫게 될 때, 공포와 두려움, 무기력과 좌절로 삶을 점철하거나, 또는 겉으로만 용기 있는 모습으로 치장하고, 달관한 자세를 덧입은 듯 위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자신에게 닥친 혹독한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모습,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삶에 대한 깊은 감사와 안녕감. 그 어떤 신년 메시지보다 강렬하게 느껴졌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올바른 방식으로 이끌어간다면, 그 다음은 자연스럽게 운명이 해결해 줄 것이고, 꿈이 우리를 찾아오리라는 선언. 꿈을 달성하는 것이 인생이 아니고, 바른 자세로 삶을 살아갈 때 꿈이 덧입혀진다는 단언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공동체주의자가 되어야 하고, 장벽은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되며, 말이 아닌 행동을 보아야 하고, 겉멋이 아니라 성실로 승부를 걸되, 언제나 나의 위치를 파악하는 한편, 미리 예측하지 말고 끊임없이 묻도록 종용하는 마지막 메시지. 뿌리 없이 때마다 흔들리는 피상적인 교훈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살아본 40여년 인생의 경험에서 품어내는 고언들이어서 더 큰 울림이 된다.

  <마지막 강의> 덕분에 인생의 마지막 뒷장을 읽고, 2010년 첫 장을 넘기게 돼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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