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강의
랜디 포시.제프리 재슬로 지음, 심은우 옮김 / 살림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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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소설가는 소설을 읽을 때 반드시 뒷장을 펼쳐 결론부터 읽는 습관이 있다고 고백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결론을 미리 알고 책 읽기를 시작하면 책을 읽는 즐거움이 반감될 텐데, 왜 굳이 그런 습관을 고수하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저 괴팍한 습관을 가진 소설가의 인터뷰가 흥미로울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의 습관이 의미 있는 행동임을 깨닫게 됐다. 결론을 숙지하고 읽게 되면 이야기의 맥이 생각보다 쉽게 잡힌다. 주인공의 인생사가 마지막 결론으로 이어지는 인과 관계를 치열하게 쫓을 수 있는데다, 때로는 그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의 일치로 운명이 뒤틀어지는 과정을 더 꼼꼼하게 목도할 수 있게 된다. 몇 차례 경험이 되풀이 되자, 어느새 나도 책의 뒷장부터 챙기는 습관이 생겼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책을 읽는 습관과 삶을 살아가는 태도가 닮아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피하고 싶어도 마주할 수밖에 없는 인생의 결론, 곧 죽음을 염두 하지 않는다면, 지금 끝이 없을 것처럼 질주하고 내지르는 이 모든 삶의 행위들은, 결국 내 생을 가로지르는 의미 있는 이야기로 연결되지 못하고, 그저 고리가 끊겨버린 허튼 행각으로  팽개쳐질 뿐이라는 생각.   

 

 

이런 의미에서 2010년 계획을 세우면서, 랜디 포시 교수의 <마지막 강의>를 읽게 된 것은 뜻하지 않은 행운이었다. 항상 열정이 넘치고 가슴에는 꿈이 풍요로웠으며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을 더 많이 흘려보내지 못해 안타까워한 어느 가장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 그 숭고하고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여정을 읽으면서, 나는 얼결에 그의 마지막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그가 맞이한 인생의 결론이 결국 언젠가 나 역시 마주하게 될 종착역임을 깨달았을 때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삶을 관통하는 올곧은 철학과 삶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로 일관한 그가 자신 있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들을  보면서, 과연 나는 내 인생의 마지막에 어떤 메시지를 남길 수 있을까, 문득 부끄러워졌다.  

 

사랑하는 아내 재이, 그리고 세 자녀 딜런, 로건, 클로이를 향한 사랑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마지막 강의를 통해 인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그의 간절함이 활자 하나하나에 새겨진 것 같다.  

 

세세하고 친절한 작은 메시지보다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삽화는 <컨버터블에 탄 남자>. 췌장암 선고를 받고 난 후 한 지인이 랜디 포시 교수에게 보낸 메일이었는데,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짜 자세는 어떤 것 이어야 하는지 짧은 지면이었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따뜻한 봄날 저녁 컨버터블에 탄 한 남자가 차 지붕과 창문을 모두 내리고 아주 편안한 차세로 음악을 들으며 혼자서 미소 짓고 행복해 한다. 그 모습이  인상 깊었던 지인은, 저 남자는 이 하루와 이 순간을 정말 감사해하는구나, 느끼고 있었는데, 컨버터블이 코너를 돌면서  운전자가 누구인지 확인하고서 깜짝 놀란다. 그는 다름 아닌 췌장암 선고를 받은 랜디 포시 교수였다. 그 때 자신이 본 모습이 너무 감명 깊어 랜디 포시 교수에게 메일을 보낸 것이었다. 랜디 포시 교수는, 자신이 췌장암을 선고받고 어쩌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연기를 하고 있을 수도 있고, 또 용기 있는 모습을 보여야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렸을 수도 있는데, 완전히 방심했을 때, 진짜 자신의 모습을 전해 준 지인의 메일이 의미가 컸다고 고백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로 보게 됐다는 것. 자신은 여전히 살아 있으며 인생이 행복하고,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활자로 남겼다.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생각할 때, 도망칠 권리도 허락되지 않은 채 끝으로만 치닫게 될 때, 공포와 두려움, 무기력과 좌절로 삶을 점철하거나, 또는 겉으로만 용기 있는 모습으로 치장하고, 달관한 자세를 덧입은 듯 위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자신에게 닥친 혹독한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모습,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삶에 대한 깊은 감사와 안녕감. 그 어떤 신년 메시지보다 강렬하게 느껴졌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올바른 방식으로 이끌어간다면, 그 다음은 자연스럽게 운명이 해결해 줄 것이고, 꿈이 우리를 찾아오리라는 선언. 꿈을 달성하는 것이 인생이 아니고, 바른 자세로 삶을 살아갈 때 꿈이 덧입혀진다는 단언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공동체주의자가 되어야 하고, 장벽은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되며, 말이 아닌 행동을 보아야 하고, 겉멋이 아니라 성실로 승부를 걸되, 언제나 나의 위치를 파악하는 한편, 미리 예측하지 말고 끊임없이 묻도록 종용하는 마지막 메시지. 뿌리 없이 때마다 흔들리는 피상적인 교훈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살아본 40여년 인생의 경험에서 품어내는 고언들이어서 더 큰 울림이 된다.

  <마지막 강의> 덕분에 인생의 마지막 뒷장을 읽고, 2010년 첫 장을 넘기게 돼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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