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왜 아픈가 - 사랑의 사회학
에바 일루즈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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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왜 아픈가>의 도발적 제목 아래 붙은 <사랑의 사회학>이란 부제에 마음을 뺏겼다.  그동안 심리학이나 정신의학 등에서 사랑을 주제로 다루는 책은 수도 없이 접할 수 있었지만, 사회학적으로 사랑에 접근하겠다는 도전은 쉽사리 접해보지 못한 것이라 책장을 넘기기도 전에 기대감으로 잔뜩 부풀어 올랐다. 특히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감정사회학의 대가가 저자라고 하니, 분석의 결과에 대한 호기심은 독서를 밀고나가는 주된 힘이 되었다. 초반의 기대감을 꺾어버리는 책들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감안하면, 저자의 뚝심있는 집중력에 경의를 표할 수 있을 정도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랑하고, 선택할 자유가 넓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사랑은 왜 아픈가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사랑의 아픔이란 과거의 트라우마가 되살아난 비극이라는 식의 심리학적 해석이나, 영혼에는 영향을 주지만 자존감은 건드리지는 않은 일종의 몸의 혼란이라는 의학적 담론을 거부하고, 사랑의 감정, 의례 등이 기본적으로 사회적으로 재구성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과거에는 자율과 선택의 폭이 부족한 상태에서 단지 주변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는 정도의 가치를 추구하면서, 사랑의 확실성이 담보되었다면, 선택과 자유의 폭이 넓어진 현대의 사랑은 좀 더 나은 사랑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가치 점수화된 상품성을 실시간으로 비교하면서 불확실성의 증가되었다고 단언한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철저하게 사랑의 결단을 개인의 책무로 환원하기 때문에 개인은 자신의 선택이 옳은 것인지, 합리적인지 고민하면서 불안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과학의 등장으로 모든 영역에서 합리성이 확대되면서 사랑도 합리성의 기준으로 재단되기 시작했고, 더구나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사랑에서의 공정성, 평등의 가치가 강조되면서 사랑이 일종의 절차화를 덧입게 되었는데, 이것이 사랑에서 여성의 열등적 지위를 공고하게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즉, 사랑의 합리성과 절차주의가 강화되는 동안 사랑의 낭만성은 철저히 벗겨졌으며, 인간이 추구하는 인정의 요구가 제대로 충족되지 못하는 형편이 되었는데, 사회적으로 남성은 남성의 인정으로 충분하게 되었고, 여성은 본래적으로 남성의 인정을 추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성은 이성과 감성이 분리되는 경험이 더 증폭되었다는 것이다.


더불어 인터넷의 발달로 계량화, 경쟁, 유용성의 극대화, 시각화가 촉진되면서 사랑의 낭만 걷어내기는 가속화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특히 소비사회에서 다양한 상품, 문화, 영상 등을 통해 사랑을 통해 얻어야할 감정, 상상력 등을 미리 소비하면서, 허구적 사랑의 시뮬레이션이 가능하게 되었고, 이는 실제의 사랑을 시들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랑을 사회학적으로 점검하는 가장 큰 강점은 사회 구조가 인간의 진솔한 감정과 내면을 어떻게 장악해나가는지 통찰을 보여준다는 점일 것이다. 개인적 틀에 갇혀 사안을 진단하는 대신 제 3자의 시선을 견지하면서,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을 따라가는 것은 충분히 재미있는 독서의 요소가 된다. 다만, 사랑의 아픔을 예리하게 분석한 것과 달리, 그러므로, 대안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분명한 결론 제시 없이 에둘러 용두사미격으로 마무리한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자칫 깨져버릴 수 있는 관계의 섬세함을 다루는 무수한 전략을 개발했다는 바로 그 `이유`로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문화의 많은 측면은 열정을 온전히 경험하고 펼쳐낼 능력을 자아로부터 앗아간다. 사랑하고 결합하는 과정과 맞물려 일어나는 의심과 불안함에 제대로 저항도 해보기 전에 포기하고 마는 일은, 그래서 일어난다. 사랑을 다루는 전략의 개발이 오히려 사랑을 지레 포기하게 만드는 정말 희한한 역설이 눈앞의 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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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이 빠져드는 기독교 역사 -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재미있는 기독교 이야기
유재덕 지음 / 브니엘출판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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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만큼 이성적 접근이 필요한 종교도 없는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이성적 접근이 성숙한 신앙 발달에 무해한 것처럼 오도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고, 러셀의 서양철학사를 읽으면서 중세 철학의 주요 토대가 된 기독교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서양 철학의 허리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겠구나 싶었다.

 

이성으로 믿음의 세계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성적인 판단이 있어야 제대로된 신앙을 가질 수 있다는 신념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특히 역사를 관통하면서 신앙의 주요 교리형성 과정이나 이단의 치리 결과를 읽으면서 신앙을 이해하고 믿음을 성숙시켜 나가는 데, 사회와 맥락, 역사와 시대상을 고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절감하게 된다.

 

베뢰아 사람들처럼 무엇이 옳은가를 끊임없이 간구하고 사색하기보다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요받다보니, 신앙이 피상적으로 흐르고 믿음이 제자리 걸음을 벗어나기 어려운데, 기독교 역사를 읽고 배움으로써 시대적 조망 안에서 바른 신앙과 믿음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성찰해야한다는 점도 각성하게 된다.

 

다만, 개정판에서는 관련 지형이나 지도, 특정 국가의 역사들을 함께 수록하면 더 깊이있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읽는 동안 동로마제국, 서로마제국과 관련된 별도의 자료를 찾아봐야만 이해가 되는 대목도 있었고, 특히 이단의 경우에는 그 계통이나 특성을 개괄적으로 요약한 도표 등이 있다면 내용이 더욱 풍성해지지 않을까 싶다.

 

현대 부분에서는 유명 목회자를 중심으로 기술하다보니 서양이 주가 되는 점도 없지 않은데, 한국 기독교 역사를 간략하게 수록하는 것도 필요할 것 같다. 기독교, 특히 개신교가 유례없이 사회적 비판을 받고 있는 까닭을 현대 들어 한국 기독교 역사의 맥락 속에서 짚어보는 것도 의미있는 시도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본회퍼는 히틀러에 맞서는 크라이사우 서클이라는 저항조직 핵심부와 연결되었다..중략..그 일에 관여하게 된 까닭을 이렇게 설명했다. "죄 없는 구경꾼들의 무리를 향해서 차를 모는 미친 사람을 본다면,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저 재앙을 기다리다가 상처 입은 사람을 위로하고 죽은 사람을 장사지낼 수 없다. 나는 그 운전자의 손에서 운전대를 뺏으려고 애쓰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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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서양철학사 (양장)
버트런드 러셀 지음, 서상복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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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절적으로 철학자들의 주요 사유에 대해서 읽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철학사를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순전히 호기심 탓. 두터운 책인데도 선뜻 도전하게 된 것은 언어학자다운 러셀의 <서양철학사>란 적확한 제목도 독서의 의지를 지피는 불씨가 되었다.

 

가장 큰 장점은 고대철학, 카톨릭 철학, 근현대 철학으로 구분하여 주요 철학자들의 대두 배경을 시대와 연관지어 설명한 점이다. 이러한 장점은 특히 이슬람교 문화와 철학을 설명한 대목에서 두드러진다. 보통 철학을 다룬 책들에서 이슬람의 중요성 내지 영향은 간과되기 일쑤인데, 러셀은 이슬람 철학이 독창적인 학문적 결과를 견인하지는 못했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주석을 통해 논리학이나 형이상학 발전에 도움을 주었고, 그리스와 인도의 자료에서 수학, 천문학의 발전을, 페르시아 신앙과의 혼합을 통해 종교 철학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는 점을 상기하고 있다.

 

또 하나는 신학에서 벗어나 독자적 행로를 쫓는 철학의 발전사를 통해 철학의 학문적 경계를 일관성있게 명확하게 그려나가도록 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신학, 과학, 철학 등 한 때는 융합되었던 학문의 경계를 간명하게 구분하려는 시도는 신앙과 사유와 증명을 혼돈하여 발생하는 여러 사태에 시사점을 주기에 충분하다. 역사와 사회와 맥락을 벗어나는 사유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도 간접적으로 배울 수 있는데, 이런 측면에서 보면 철학이 사회 변화의 선도가 될 수 있는지 아니면 사회 변화가 철학의 태동을 불러일으키는지는 모호해지기도 한다. 러셀은 분명하게 철학자는 결과이자 원인이라고 단정한다.

 

안타까운 것은 러셀의 풍부한 지식과 날카로운 비판 의식에 새삼 감탄하기에는 훌륭하지만, 배경 지식이 부족하면 저자의 설명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은 난망하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기술되어 있으므로, 서양사를 꼼꼼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읽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대목도 있다. 따라서 일종의 주석서로 서양철학사의 주요 연대기가 함께 수록되었더라면 좀 더 친절한 책이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익숙하지 않은 철학자도 다수 등장하고, 철학자의 주요 주장이나 비판 사항을 일차적으로는 러셀이 한번 거른 후에 제시하기 때문에, 밀도가 떨어지는 부분도 있지만, 관심 있는 철학자의 경우에는 관련 시대 배경과 주요 사상을 별도의 책과 비교하면서 읽어나가면 심도있게 공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완독하는 데 어려움은 많지만, 읽고 나면 새롭게 알고 싶은 시대와 철학자가 생기며, 역사 공부의 의지를 북돋우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책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철학자들은 어떤 일의 결과이자 원인이다. 그들은 각자 처한 사회 상황과 각 시대의 정치와 제도의 결과물이자, 후대 정치와 제도의 근간이 되는 신념 체계의 형성에 기여하는 원인 제공자이다. 대부분의 철학사에서 철학자는 저마다 진공 속에 있는 듯이 등장한다. 이와 반대로 나는 진실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철학자를 자신이 몸담았던 사회문화적 환경의 산물로서,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공유되지만 모호하거나 산만하게 흩어진 사상과 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려 애쓰며 집중하는 한 인간으로 조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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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개정판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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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제주도에서 육지로 이동할 때 가장 불편한 지역이 어디인지 묻는 도발적인 질문으로 삶과 개념의 괴리가 얼마나 큰지 파고든다. 관념상으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제에서 어떻게 비틀어지고 뒤집어지는지 여성학자의 시선은 낮은 곳으로 향해 있다.

 

페미니즘은 여성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계급, 성, 장애, 학력, 나이 등에 따라 차별과 타자성을 겪는 소수자의 입장을 견지하는 것임을 다시 각성하게 된다.

 

그 어느 나라보다 가족 중심을 지향하면서,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자녀 교육에 몰입하거나 가부장주의, 출세지향주의로 치닫는 도구적 가족의 모순을 파헤친 대목이나 성매매와 국가주의가 결합하면서 일본군위안부 할머니의 문제와 성매매 피해 여성의 문제를 이분법적으로 구별하는 비합리성의 문제를 지적한 대목 등이 특히 공감이 된다.

 

그 누구도 완벽하게 진골이 될 수 없기에 소수자의 차별, 인권에 집중해야 하고, 끊임없는 탈중심성의 지향을 통해 주체적 자각을 견인해 내고, 실질적 평등을 구현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페미니즘이 나아갈 방향일 것이다.

 

다만, 페미니즘이 또 하나의 중심이 되면서, 페미니즘적 시각과 언어, 관습을 미처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이 또 다시 교화의 대상이 되고, 타자화되는 데 대한 성찰이 부족한 부분이 조금은 아쉽다. 

의식은 바뀌었는데 몸이 바뀌지 않았다라는 개탄은, 일상의 변화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일상을 넘거나 일상을 극복하는 정치가 아니라, 모든 정치와 운동은 일상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머리가 변하는 것이 의식화라면 몸이 변하는 것은 변태다. 그래서 언제나 혁명보다 개혁이 어려운 거다. 혁명은 이름과 의식을 바꾸는 것이지만, 개혁은 몸의 형태를 바꾸는 것이다. 개혁은 글자 그대로 살갗을 벗기는 것, 피가 쏟아질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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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경 홍신 세계문학 5
허먼 멜빌 지음, 정광섭 옮김 / 홍신문화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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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다 마모루의 <괴물의 아이>, 론 하워드의 <하트 오브 더 씨> 등 연이어 모비딕이 모티브가 된 영화가 개봉되면서, 자연스럽게 호기심에 불을 지폈다. <백경>의 그 무엇이 동양과 서양의 감독에게 다시 한번  깊은 감명을 불러일으켰을까 하는 호기심이 첫 장을 펼치게 한 방아쇠 역할을 한 셈이다.

 

멜빌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아브라함의 아들이었지만, 추방자가 된 이스마엘의 이름을 차용한 주인공을  관찰자로 삼아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모비딕을 쫒는 늙은 광기어린 에이헤브 선장, 규율을 지켜내려고 노력하는 일등항해사 스타벅, 그리고 고래 산업을 통해 돈을 쫓아 항해에 나선 인간 군상들을 촘촘히 따라가다보면 <백경>은 단순한 고래잡이 모험담일 수 없다는 데 이르게 된다.

 

역자의 표현대로 <백경>은 단순한 모험담으로 읽힐 수도 있지만, 정신 분석학, 사회학, 종교학, 철학 의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대가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만한 풍성하고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한 때 직접 선원으로 일하기도 했던 멜빌은 스토리 중심의 소설 전개를 넘어서서 박물관학의 정수를 소설에 담아야겠다는 일념을 표출하기라도 하듯, 고래잡이와 관련된 다양한 사회상을 담는다. 때로는 지리서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동물학을 담은 생물 도감이 되기도 했다가 법률 해석을 담는 법학서로 변모하기도 한다. 인생의 허무함을 탄식하며 영생을 구하는 신학서가 되었다가 인간은 도대체 누구인가에 천착하는 철학서로 뒤바뀐다.

 

인상깊었던 것은, 1500년대, 고래산업을 둘러싼 네덜란드의 법률 발전상. 첫번째 고래잡이 배가 작살을 던져 고래를 잡았는데, 불행히도 배가 작아 고래를 붙잡아두지 못한 경우, 재력과 규모에서 앞서는 두번째 배가 어부지리로 작살이 꽂힌 고래를 잡게 되면, 작살의 소유는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문제. 작살은 고래를 잡겠다는 의지로 던진 것이므로, 고래에 꽂힌 경우 작살의 소유는 고래에게로 귀속되며, 두번째 배가 작은 노력으로 작살이 꽂힌 고래를 잡게 되면, 고래와 더불어 작살의 소유권까지도 인정받는다는 식이다. 멜빌은 날카로운 통찰력을 바탕으로 고래 잡이를 통해 자본의 노동 잠식의 문제점을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또, 에이헤브는 한 쪽 다리를 일본해 근처에서 잃은 것으로 표현되는데, 울산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동해에서 고래가 자주 출몰했던 역사적 사실을 고려해보면, 실상은 모비딕을 처음 만난 곳은 동해 근처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우리나라가 세계사에서 주목받지 못하다보니, 잘 인식되면서도 미지의 공간으로 일본해로 기술된 것이 아닌가 싶어 아쉬움도 남는다.

 

오직 모비딕을 잡겠다는 일념으로 나서는 에이헤브는 광기에 사로잡힌 인간인가, 아니면 끝내 죽을 줄 알면서도 숙명의 굴레를 담담히 받아들인 존재인가. 단번에 명쾌한 답을 주는 대신 읽을 때마다 새로운 답을 제시하는 <백경>이 아닐까 싶다.

스타벅..세번째 나의 영혼의 배는 항해에 나가네. 어떤 배는 항구를 떠나 그 후는 영원히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지. 스타벅. 어떤 자는 썰물 때에도 죽는다. 어떤 자는 물이 완전히 빠졌을 때, 또 어떤 자는 밀물 때에..나는 지금 방금 부서지려는 파도의 꼭대기에 있는 것 같군. 나는 나이를 먹었어. 자아. 악수하세...그들은 손을 마주잡고 서로 눈을 떼지 못했다. 스타벅은 눈물을 글썽거렸다..가지 마십시오! 선장님 가지 마십시오!..그러나 이이헤브는 아무것도 듣지를 못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소리를 크게 질렀고 보트는 무섭게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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