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 간 물리학자 - 명화에서 찾은 물리학의 발견 미술관에 간 지식인
서민아 지음 / 어바웃어북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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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는 것은 사실 '이해한다'를 포괄해야 '봄'의 진정한 목적으로 성취할 수 있을텐데, 돌아보면 '이해함'의 방식이 줄곧 편협하지 않았나 싶다. 기껏해야 시대로 분류하거나, 화가와 특징적 화풍을 단편적으로 연결하여 가까스로 꿰어맞추다보니, 그림을 '본다'는 것은 때로는 노동에 가까운 고역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물리학'의 프리즘을 통해 그림을 보는 방식을 하나 배우고 나니, 그림 보기가 여간 재미있는 게 아니다. 몇 가지 물리학 책을 읽은 기억도 되살아나 활자로만 읽었을 때는 이해되지 않던 개념이 명화 속에서 구현되니 그 뜻도 더 간명하게 정리된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누가 뭐래도 저자의 독특한 이력이지 않을까 싶다. 물리학 전공자이면서 화가이기도 한 저자의 전문성은 이 책의 가치를 더욱 두텁게 한다. 


첫 장부터 흥미진진하다. 흑점의 감소와 기후변화의 상관성을 먼저 읽고 그로 인한 폭설, 혹한의 풍광이 담겨진 그림이 소개되니, 화가가 살던 시대로 걸어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파동과 인상파,  빛의 산란과 오키프, 퀀텀닷의 원리와 스테인드 글라스, 원자의 진동과 댄스의 역동성, 빛의 명암과 원근법, 프레넬 효과와 빛의 특성에 따른 모네의 연작, 망막의 인식과 착시 효과를 활용한 쇠라, 세포와 칸딘스키, 보색 효과와 고흐, 옵아트의 과학, 무질서와 잭슨 폴록, 상대성 이론과 달리, 메타 물질과 마그리트, 양자역학과 피카소, 테라헤르츠와 그림의 생애 등 각각의 챕터가 흥미롭다. 


저자가 주장한대로 화가 역시 '보고 인식하는'는 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쫓는 과학자의 또 다른 이름일런지 모르겠다. 

물리학자의 시각에서 명화와 화가의 삶을 재조명할 것이다. 물리학과 미술의 상호작용으로 잉태된 작품들을 살펴보고, 현대 과학 기술을 이용한 다양한 미술작품 분석 기법에 관해서도 이야기해보려 한다. 마음을 열고, ‘물리학‘이라는 새로운 눈으로 다시금 그림을 감상한다면 그동안 느낀 것과 전혀 다른 새로운 감동을 느끌 수 있을 것이다. -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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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문학사상 세계문학 14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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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외관을 보고 우리도 많이 비슷해졌다, 자신감이 차오르다가도 어느 순간 흠칫 움츠러들 때가 있다. 우리 소설 중 제법 인기몰이를 하던 일부 소설이 일본 소설가들의 문체를 그대로 답습해 감성 팔이에 제법 성공해 흥행한 것임을 알았거나, 이 소설처럼 우리의 근대가 일본의 결기로 유린될 때, 보란 듯이 성큼 커다란 사상적 진보를 이뤄낸 증거를 마주하고서 무참해질 때다. 


일제 시대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어떤 근대를 갖게 되었을까..조선의 숱한 천재들이 자율적으로 새로운 세상과 조우했더라면 어땠을까. 내부에서 스스로 자신들의 사회를 성찰하고, 새로운 시선으로 근대의 인간 군상을 그려냈었더라면 말이다. 


그 누구보다  일찍이 서구 사회를 맛보아 알았던 나쓰메 소세키는 이름 없는 고양이를 빌어 일본 근대 사회의 신지식인을 실컷 풍자한다. 신문물을 익혀 스스로를 지식인이라 일컫는 이들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고양이를 통해 분석한다. 


주인공인 고양이는 중학교 영어 교사인 구샤미의 집에서 기거하는데, 이름도 없다. 구샤미는 나쓰메 소세키의 화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제법 서재에서 책을 읽는 것처럼 보이지만, 침 자국 흘리면서 책상에 줄곧 엎드려 자면서도 고고한 체 하는 인물로, 수채화며, 일본 전통 시 등 수시로 관심이 바뀌어 도전하지만, 끝가지 제대로 하는 게 없다. 위염으로 고생하면서 소화제를 달고 사는 위인으로, 스스로 짐짓 윤리적이고 고상하다는 자부심이 넘쳐나면서도 컥컥 소리를 내며 양치질을 하거나 목욕탕에서 괜한 분란을 일으키는 자칭 샌님이다. 


구샤미의 집에 수시로 드나드는 메이테이는 온갖 이야기를 끌어다가 허풍을 떨고 꾸며대는 인물로, 구샤미는 늘상 그에게 속아넘어간다. 넉살도 좋은데다 참견하기도 좋아하는 그는 미학원론을 쓰겠다고 큰 소리를 치지만, 쓰는 법이 없다. 온갖 허세를 부리다가도 말도 안되는 논리로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언제든지 불리하면 자기 합리화로 무장해 어떤 사태 속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자기 좋을대로 마무리하는 인물이다. 


간게쓰는 <개구리 눈알의 전동 작용에 대한 자외선의 영향>이라는 박사 논문을 쓰는 중으로, 가네다의 여식 도미코와의 혼담이 오가면서, 어느 정도 형평성을 맞추려면  빨리 박사 학위가 필요하다는 주변의 권고를 듣는다. 박사 학위를 위하여, 완벽한 개구리 눈알의 구현을 목적으로 구체를 깎는 일에만 매진하는데 종국에는 시골의 어느 여자와 결혼한다. 


주인공 격인 이들의 일상 사에, 구샤미의 아내와 딸들의 삽화, 토란을 훔쳐간 도둑 이야기, 인근 중학교 학생들의 구샤미댁 마당 습격기, 쥐를 잡지 않는 고양이의 평상 시 습관, 도미코의 연애 편지 전송에 이름을 빌려 주어 사단이 난 부에몬 등의 잘잘한 이야기들이 어우러진다. 


작가는, 근대 사회에서 지식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젠체하며 살지만, 그들이 가진 우스꽝스러운 우월적 자부심의 이면을, 고양이를 통해 풍자와 해학으로 유감없이 그려낸다. 놀라운 것은 이 소설이 100여년 전에 쓰여진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의 모습에 대비시켜 읽어보아도 전혀 이질감이 없다는 데 있다. 


배우지 못한 아내나 여식 앞에서 낯선 영어 단어나 희랍의 역사를 들어 거들먹 거리거나 중학교 학생들 앞에서 고집에 가까운 권위를 내세우는 구샤미, 온갖 해괴한 논리로 그럴듯한 자기 이론을 만들어 증폭시키는 메이테이, 지적 허영에 가까운 박사 학위 논문을 쓰는 간게쓰 등, 근대 사회의 지식인은 여전히 현대 사회의 지식인들의 모습과도 기묘하게 중복된다. 


이러한 문제 의식 외에 소설로서 주는 또 다른 재미는, 소세키의 해박한 지식과 유려한 문체에서 비롯된다. 도무지 끊길 것 같지 않는 만연체의 문장은, 번역의 매끄러움과 결합해 눈에 쏙쏙, 귀에 콱콱 박히는 찰짐을 선사하는데, 독서만이 줄 수 있는 즐거운 매력이다. 

그는 성질이 고약한 굴조개처럼 서재에 달라붙은 채, 외계를 향하여 입을 연 적이 없다. 그러면서 자기만은 지극히 달관한 것 같은 상판때기를 하고 있는 꼴은 여간 우습지 않다. 달관을 못한 증거로는, 실제로 나의 초상이 눈 앞에 있는데도 조금도 알아채는 기색이 없을 뿐더러, 올해는 러일 전쟁이 발발한 지 2년째이므로 곰의 그림이 아니겠느냐며 무슨 생각인지 모를 소리를 하는 태연함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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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 / 와이즈베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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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성, 효율성으로 무장한 세계화의 광풍이 휘몰아친 후에도 여전히 그 위세를 드높이는 가운데, 트럼프의 등장은 적잖이 미국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던 샌델 교수가 '능력주의와 공정성'에 의구심을 품고 트럼프의 등장을 불러온, 미국 사회의, 민주주의를 흔든는 사회적 기제를 쫓아 분석했다. 이는 현재 미국 사회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틀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서 있는 지점도 다시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공정'에만 집중하는 의제의 위험성도 경고한다. 


그는 미국에서 능력주의의 이상이 실현되어 '아메리칸 드림'이 구체화되고 있다는 믿음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능력주의는 과연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며, 능력주의의 결과는 정말 정의로운 것인지 되물으며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역사와 정치, 사회적 맥락에서 되짚어낸다. 


대학 입시 부정에서 드러난 능력주의의 배경을 탐구하면서 우리가 마주한 능력주의의 신화는 그 역사가 짧다고 단언한다. 출신이나 배경을 통해 대학에 입학하는 관행을 타파하기 위핸 수단으로 등장한 '능력주의'는 '학력주의로 이어지고, 대학이 높은 사회적 지위로 나아갈 이들을 골라내는 '인재 선별기'의 역할을 하는 동안 대다수의 미국인이 자신이 하는 일의 존엄성에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는 데 주목한다. 특히 대학이라는 관문을 통과한 것으로 일종의 자격을 얻은 것처럼 공고화되고 있는 편협한 경로의 문제점은 논외로 치고, 학사 자격이 없으므로 낮은 임금을 받아도 당연하며, 삶의 질을 충분히 누리지 못해도 정의로운 것으로 여기도록 하는 데 풀무질하는 정치인들의 무책임을 폭로한다. 


또한 샌델 교수는 재능은 오로지 자신의 것이 아니고 단지 운 좋게 물려받은 것일 뿐이며 그 재능이 꽃 피울만한 사회적 맥락 속에 운 좋게 놓인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능력주의는 간과하게 한다는 점도 부각시킨다. 능력주의는 무한한 경쟁을 창출하여 승자와 패자를 나누고, 승자에게는 오만함을, 패자에게는 죄책감과 모멸감을 안기는 한편 '승리'가 온전히 자신의 노력과 재능으로만 이루어졌다는 착각에 빠지게 함으로써 민주주의 근간인 '연대성'과 '존중'을 여지 없이 훼파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더구나 능력주의가 팽만하면서 서열주의에 천착하게 되고, 거기에 일의 존엄성과 가치가 물질적 보상으로 이어지면서 양극화가 더 심화되고 있다는 점을 덧붙인다. 


그는 이러한 사회적 맥락이 결국 트럼프의 포퓰리즘에 열광하게 만들었다고 본다. 민주당이 세련되고 거만한 자세로 문제는 '학력'이라고 진단하면서, 더 배워야 한다며 낮은 임금, 삶의 질 저하는, 못 배운 개인의 책임임을 공공연히 주장하고, 사회의 문제는 기술관료 같은 엘리트를 통해 더 잘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하며 실행하는 동안, 그 틈을 트럼프가 비집었다고 진단한다. 트럼프는 뒤쳐진 이들의 모멸감을 다독이며, 하루아침에 실패자로 내몰린 그들이 하는 일의 존엄성을 두둔하면서, 그들의 아니라 다른 것들을 문제의 원인으로 짚어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민주주의에서 '감정'이 갖는 중요성을 제대로 짚어낸다. 동시에 배척되고 소외된 마음을 다독여 포퓰리즘으로 세력화하는 경로가 만들어지는 것을 경계한다. 또 겉으로는 민주적인 절차를 밟는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기술관료적으로 해결하는 엘리트주의가 이러한 경로를 두텁게 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다만 아쉬는 점은, 대안은 그에 비하면 좀 더 치열한 문제의식이 아쉽다. 성경의 '제비 뽑기'를 일정 부분 입시에서라도 도입해서 능력주의의 교만함과 민낯을 드러내야 한다고 보는 것인데, 차라리 일정 부분이 아니고 전격적인 도임을 주장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다. 온건한 방법으로 한껏 기울어진 운동장을 조금이라도 되돌릴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든 까닭. 대안을 찾아보는 노력은샌델 교수만의 몫은 아닐테다. 


인상깊은 것은 샌델 교수가 능력주의의 고양을 신앙의 타락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신의 은총을 확증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이 잘못된 신앙으로 이어져,사회적 성공이 곧 신의 축복이며 구원의 증거라고 보는, 복음의 부패에서 능력주의가 출발했다는 것은 참 뼈아파는 지적이다. 

21세기 초 번영 복음은 근면한 노동을 장려하고 사회적 상승, 적극적 사고 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아메리칸 드림 자체와 구별하기 어려워졌다..시장이란 성공과 실패로 보상과 처벌을 구분해준다. 유덕한 사람은 풍족한 보상을 받고, 사악한 자는 끝내 파멸할 것이다. 번영 복음의 매력 중 하나는 그것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자신의 챔임을 강조하는 데 있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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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루션 SOULUTION - 정신질환 치유의 새로운 길을 제시하다
노영범.김지영 지음 / 미다스북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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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서구의 정신의학은 길을 잃었다는 도발적인 진단은 미력한 외침이지만, 결과적으로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 책은 수용소의 시대, 1세대 생물학적 정신의학의 시대, 신경성 질환의 시대, 정신분석의 시대, 대안 탐색의 시대, 2세대 생물 정신의학의 시대를 거쳐 바야흐로 약물과 체크리스트의 시대로 넘어온 서구의 정신의학 역사를 탐색하는 한편, 정신 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 즉 DSM의 발전사, 특히 DSM-V의 허구와 문제점을 짚어내면서 현대 정신의학의 좌표를 짚어낸다. 지나치게 방대해진 진단의 그물망 안에서 어떤 증상이든 정신 질환으로 연계되는, 이른 바 질환의 과잉 진단과 편의적인 환자 색출의 어두운 그림자에 집중한다. 


즉, 서구 정신의학이 상당 부분을, 과학이라는 명분 하에 체크리스트와 호르몬, 약물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진단 분류에 집착한 나머지, 실제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의 상황과 맥락이 증발하고, 환자의 증상을 통해 다른 변인을 찾으려는 탐색이 실종되면서 '정신의학'에서 환자와 의사가 소외되고 있는 현장을 고발하는 데서부터 저자들의 문제의식이 시작된다. 


한의사인 저자들은 질병의 원인을 추척하는 대신 질병의 결과에만 몰두한 나머지 증상을 없애려는 지엽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한의학 고서인 <상한론>을 재해석하고 현대적으로 적용하려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상한론>은 인간을 내밀하게 관찰한 일종의 관찰지로서 병이 들어 나타난 이상 증상을 400가지로 나누어 기록하고 있어, 이를 정신 질환의 진단과 치료에 적용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환자와의 대화를 통해 병의 원인을<상한론>에서 제시한 7가지로 나누고, 항상성이 깨져서 비정상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면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거기에 SOUL의 새로운 3가지 개념을 접목하고 있는데, 인간의 행위 이면에 존재하는 동기나 기저 감정나 감정을 파악할 것, 몸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 생명 현상을 유지하는 원동력인 항상성이 깨지면 병이 온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의 행위에는 내면의 계기가 있으므로 이를 파악해야하고, 인간의 정신과 육체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총체적이므로 이를 함께 치료해야 하며, 신체적, 정신적 질환은 결국 항상성이 깨지는 것이므로 이의 균형을 맞추는 데 집중해야한다는 것이다. 


<상한론> 적용을 위하여 임상 현장에서 저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활용하는 치료 전략은 "서사"다. 환자와의 대화를 통해 일종의 개인별 질병 이야기를 탐색하는 것이다. 이러한 질병 이야기는 의사에게 진단과 치료의 단초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환자 스스로 자신의 질병과 맥락을 이해함으로써 성찰적 반추의 계기를 가질 수 있다는 게 저자들의 주장이다. 보건사회학에서 주목하는 일종의 '질병 내러티브'와도 같은 맥락일 수 있다. 질병의 재구성을 통해 스스로 의미화하는 과정 자체를, 지난하더라도 정신 질환 치료의 현장에서 다시 되살려야하는다는 주장은 주목할 만한다. 


<상한론>은 칠병, 제강, 조문의 층위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상한론에서는 질병을 발생시키는 일관되며 공통된 행위 패턴을 칠병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대양병, 양명병, 소양병, 대음병, 소음병, 궐음병, 음양역차후노복병이 해당되며, 그외 대양병 결흉과 괄음병 곽란도 덧붙여진다. 


대양병은 경쟁심, 양명병은 편집강박, 소양병은 탐구심, 대음병은 관심욕구 및 낮은 자존감, 소음병은 의존성, 궐음병은 집착, 음양역차후노복병은 회피성 등이 주로 질환을 일으킨다고 본다. 이러한 기저와 더불어 움직이는 것, 먹는 것, 잠자는 것에 중점을 두고 인간 행위를 파악한다. 칠병 중 하나의 병으로 진단된 모든 환자는 제강에 기술된 병적 현상이 나타나며 각 개인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 병적 현상은 조문에 기술되어 있다. 


 <상한론>의 진단 과정은 칠병진단, 제강진단, 조문진단, 처방분류의 순서로 이루어지는데. <상한론>을 현대적 의미에서 다시 재탐색하는 한편, 질병으로 나타나는 행동패턴의 동기를 파악하기 위해 매슬로우의 동기이론을 접목하고 있다. 


서사의학적 진단과 변병분류를 통해 진단이 내려지면, 각각의 현상에 따른 한약이 처방되며 기저 감정에 따른 상담 치료 및 감정의 조절을 위한 마음 훈련이라고 할 수 있는 훈습의 과정을 거친다. 


이 책의 강점은 <상한론>에 근간을 두고 직접 치료한 사례를 중심으로 다양한 에세이가 제시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소울루션 치료의 철학과 과정, 결과를 조금이나마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근거중심의학의 맹위로 인해 '좁은 과학'이 신격화된 세태 속에서,  오히려 고전을 통해 동양의 시각에서 정신 질환을 다룬다는 것이 생경하면서도 신선하게 다가온다. 특히 <상한론>의 분류 체계가 DSM 분류 체계 못지 않게 체계화되어 있다는 점, 신경 정신 질환이야말로 한방과 양방의 통합을 통해 새로운 치료 철학을 정립하고 제 3의 치료 방향을 탐색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닐까 싶다. 

정신질환은 매우 미묘하고 복잡한 원인을 가지고 발생합니다. 모태에서부터 유년기를 거쳐 잠재의식 속에서 형성되고, 점점 성장해가면서 수많은 사건과 인간관계에서 정신질환이 만들어집니다. 정신질환의 결과로 발생한 현재의 증상에만 집중하는 것은 피상적인 접근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환자의 전체적인 삶을 읽어내고, 질병 발생 당시 대응하는 방식에 따라서 개개인의 특성을 간파해야만 정신질환의 원인을 밝혀내고, 궁극적으로는 근원적인 치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결과만을 중요시하는 현대의학으로는 정신질환 치유의 한계점이 있는 것이 분명해보입니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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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폭풍, 스피노자 - 자유를 향한 철학적 여정
손기태 지음 / 글항아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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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이야기>를 읽고 나서, 스피노자를 별도로 읽어야겠다는 소박한 욕심이 생겼는데, 결론적으로는 선택을 아주 잘한 셈이다. 철학에 대해 전문적인 식견이 없는 나 같은 초보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할 뿐만 아니라, 비교적 짧은 지면에 스피노자 철학의 특성과 깊이를 충분히 담아냈다. 


왜 스피노자가 "고요한 폭풍"인지, 그리고 이성의 최첨단을 달린다는 현재, 다시 그의 철학을 상고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풍성한 질문과 전문적인 식견을 따라가다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갈 정도다. 


스피노자는 신앙과 철학의 자유를 꿈꾸다가 파문을 당하고 추방되었으며 그의 책은 금서 조치까지 될 정도로 평생 고립된 삶을 살았지만, 더없이 자유롭고 한없이 평안한 일상을 인식하며 자기 철학의 옳음을 생으로 확증한 독특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나'의 존재로부터 신의 존재와 세계를 설명하면서 인식의 주체와 인식의 대상을 분리하였다면, 스피노자는 신을 세계와 분리되어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과 만물을 만들어내는 자연 그 자체로 인식한다. 


즉, 데카르트식 사고가 인간을 자연에서 분리하여 자연을 정복하고 군림하는 인간우위의 논리로 이어진다면, 스피노자는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으로, 신의 법칙, 즉 자연의 법칙에 따라 지배되며, 신은  단순한 정신이 아니라, 신체도 포함하는 자연 자체로 파악한다. 


스피노자가 이해한 신은 모든 만물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에게 드러나며, 풍성한 변용을 통해 다양한 양태로 표현된다. 자연을 구성하는 개체들은 인과 작용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며 자연은 무한한 변화를 품으면서도 자산의 존재를 변함없이 유지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수학적 법칙 처럼 자연은 무수한 개별적인 인과 관계의 연결망으로 이루어져 있고 외부의 자극 등 다양한 변수에 의해 변화될 수 있어, 우리의 삶은 우연과도 같은 동요 속에 흔들린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연 만물은 그 존재 자체가 목적일뿐 어떤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도 일갈한다. 인간의 나약함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 상상하면서 미신, 계시, 징표를 추구하고 선과 악, 유익과 해악을 나누는 것일뿐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신체와 정신에 대해서도 어느 하나가 우월한 것이 아니라 동등하고 평행하다고 본다. 자연 만물이 변용하면서 속성은 다르지만 지위가 같듯이 신체와 정신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확장은 선악과를 따먹는 인간에 대한 이해부터 파격적으로 적용된다. 그는 신을 어기는 것은 아담에게 애초부터 허락되지 않는 것으로써-인간이 신을 어길 수 있다면 신은 더이상 신일 수 없으므로-아담은 단지 하나님의 명령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일뿐이라고 여긴다. 신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한 것은 독이 치명적이므로 죽는다는 것을 계시하는 것 뿐이라는 것이다. 선악과가 선하고 악한 것이 아니라 아담의 신체에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신에게 나아가는 것은 자신의 상상이나 오도된 관념이 아니라, 정확한 인식이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선악을 들이대며 명령으로 강제하는 도덕이 아니라 특정한 조건 아래서의 선악을 구분하는 규칙을 헤아리는 것이 인간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신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다르며 인간의 본성을 신에게 투영하려는 기복신앙의 문제점을 간파한다. 신은 인간처럼 외적 자극이나 충동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능력으로부터 자신의 행위를 결정짓기에 진정한 자유의지를 가지며 그러므로 가장 자유롭다는 점을 상기하고, 신의 뜻은 인간이 진정한 '자유'를 갖도록 하는 데 있다는 점을 착안한다. 


한편 스피노자는 인간의 신체는 무수한 개체로 이루어져 있고, 정신 역시 다양한 관념의 합체라고 본다. 또한 신의 변용으로 나타난 다양한 자연의 존재들은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는 힘과 노력-코나투스-를 가지고 있는데, 존재의 유익을 추구하려는 욕망을 통해 자신에게 적합한 것과 결합하고, 자신에게 부적합한 것에 대하여는 피한다고 설명한다. 


특히 신체의 변용에 대한 관념은 아펙투스로, 정서라고 할 수 있는데, 외적인 마주침에 의해서 생겨난 정서는 수동적인 것으로의 정념과, 자신의 능력에서 나오는 능동적인 정서로 구분된다. 인간은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추구하려는 욕망에 기초하여 행복으로 나아가지만  정념에만 의존하면서 판단을 하면 부적합한 인식을 하게 되므로, 예속 상태가 되고, 진정한 자유를 위하여 종국에는 능동적인 정서로까지 나아가야한다고 주장한다. 


정확한 인식을 하기 위해서는 적합한 관념을 가져야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단순히 앎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기쁨을 주는 관계를 확보하는 것, 달리 말하면 스스로 기쁨을 주는 원인의 관념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매 순간 다른 개체와의 마주침을 통해 공통적인 것을 더 많이 인식할 수록 더 적합한 관념을 갖게 되는데, 추상적인 개념만을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 자신의 삶에서 실천함으로써, 지속적인 마주침을 통해 자기 스스로의 관념으로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예속에서 벗어난 자유인들의 종교는, 죽음이나 악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신에 대한 사랑으로 행동하게 되는 덕 자체를 갖는 것으로 귀결된다. 또 인간은 사회 안에서 더 큰 능력과 행복을 추구할 수 있으므로 사회를 구성하게 된다고 보면서, 국가의 통치를 받더라도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보장받지 못한다면 통치에 대한 합의는 무효가 된다고 주장한다. 스피노자는 최선의 국가는 정치 체제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자유와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국가인가에 방점을 둔다.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고, 자연 만물과 연결되는 인간을 그려내며, 공동체의 가치에 주목하면서, 신의 진정한 뜻을 치열하게 찾았던 스피노자는 철학자일뿐만 아니라 치유자이자 혁명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구분과 분열, 우위와 열패로 치닫는 요즘,  스피노자를 다시 기억해야하는 이유가 아닐까. 

정서의 조절과 억제에 대한 인간의 무능력을 나는 예속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정서에 복종하는 인간은 자신의 권리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운명의 권리 아래 있으며, 흔히 더 좋은 것을 보기는 하지만 더 나쁜 것을 따르도록 강제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운명의 힘 안에 있기 때문이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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