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폭풍, 스피노자 - 자유를 향한 철학적 여정
손기태 지음 / 글항아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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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이야기>를 읽고 나서, 스피노자를 별도로 읽어야겠다는 소박한 욕심이 생겼는데, 결론적으로는 선택을 아주 잘한 셈이다. 철학에 대해 전문적인 식견이 없는 나 같은 초보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할 뿐만 아니라, 비교적 짧은 지면에 스피노자 철학의 특성과 깊이를 충분히 담아냈다. 


왜 스피노자가 "고요한 폭풍"인지, 그리고 이성의 최첨단을 달린다는 현재, 다시 그의 철학을 상고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풍성한 질문과 전문적인 식견을 따라가다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갈 정도다. 


스피노자는 신앙과 철학의 자유를 꿈꾸다가 파문을 당하고 추방되었으며 그의 책은 금서 조치까지 될 정도로 평생 고립된 삶을 살았지만, 더없이 자유롭고 한없이 평안한 일상을 인식하며 자기 철학의 옳음을 생으로 확증한 독특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나'의 존재로부터 신의 존재와 세계를 설명하면서 인식의 주체와 인식의 대상을 분리하였다면, 스피노자는 신을 세계와 분리되어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과 만물을 만들어내는 자연 그 자체로 인식한다. 


즉, 데카르트식 사고가 인간을 자연에서 분리하여 자연을 정복하고 군림하는 인간우위의 논리로 이어진다면, 스피노자는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으로, 신의 법칙, 즉 자연의 법칙에 따라 지배되며, 신은  단순한 정신이 아니라, 신체도 포함하는 자연 자체로 파악한다. 


스피노자가 이해한 신은 모든 만물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에게 드러나며, 풍성한 변용을 통해 다양한 양태로 표현된다. 자연을 구성하는 개체들은 인과 작용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며 자연은 무한한 변화를 품으면서도 자산의 존재를 변함없이 유지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수학적 법칙 처럼 자연은 무수한 개별적인 인과 관계의 연결망으로 이루어져 있고 외부의 자극 등 다양한 변수에 의해 변화될 수 있어, 우리의 삶은 우연과도 같은 동요 속에 흔들린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연 만물은 그 존재 자체가 목적일뿐 어떤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도 일갈한다. 인간의 나약함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 상상하면서 미신, 계시, 징표를 추구하고 선과 악, 유익과 해악을 나누는 것일뿐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신체와 정신에 대해서도 어느 하나가 우월한 것이 아니라 동등하고 평행하다고 본다. 자연 만물이 변용하면서 속성은 다르지만 지위가 같듯이 신체와 정신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확장은 선악과를 따먹는 인간에 대한 이해부터 파격적으로 적용된다. 그는 신을 어기는 것은 아담에게 애초부터 허락되지 않는 것으로써-인간이 신을 어길 수 있다면 신은 더이상 신일 수 없으므로-아담은 단지 하나님의 명령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일뿐이라고 여긴다. 신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한 것은 독이 치명적이므로 죽는다는 것을 계시하는 것 뿐이라는 것이다. 선악과가 선하고 악한 것이 아니라 아담의 신체에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신에게 나아가는 것은 자신의 상상이나 오도된 관념이 아니라, 정확한 인식이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선악을 들이대며 명령으로 강제하는 도덕이 아니라 특정한 조건 아래서의 선악을 구분하는 규칙을 헤아리는 것이 인간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신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다르며 인간의 본성을 신에게 투영하려는 기복신앙의 문제점을 간파한다. 신은 인간처럼 외적 자극이나 충동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능력으로부터 자신의 행위를 결정짓기에 진정한 자유의지를 가지며 그러므로 가장 자유롭다는 점을 상기하고, 신의 뜻은 인간이 진정한 '자유'를 갖도록 하는 데 있다는 점을 착안한다. 


한편 스피노자는 인간의 신체는 무수한 개체로 이루어져 있고, 정신 역시 다양한 관념의 합체라고 본다. 또한 신의 변용으로 나타난 다양한 자연의 존재들은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는 힘과 노력-코나투스-를 가지고 있는데, 존재의 유익을 추구하려는 욕망을 통해 자신에게 적합한 것과 결합하고, 자신에게 부적합한 것에 대하여는 피한다고 설명한다. 


특히 신체의 변용에 대한 관념은 아펙투스로, 정서라고 할 수 있는데, 외적인 마주침에 의해서 생겨난 정서는 수동적인 것으로의 정념과, 자신의 능력에서 나오는 능동적인 정서로 구분된다. 인간은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추구하려는 욕망에 기초하여 행복으로 나아가지만  정념에만 의존하면서 판단을 하면 부적합한 인식을 하게 되므로, 예속 상태가 되고, 진정한 자유를 위하여 종국에는 능동적인 정서로까지 나아가야한다고 주장한다. 


정확한 인식을 하기 위해서는 적합한 관념을 가져야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단순히 앎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기쁨을 주는 관계를 확보하는 것, 달리 말하면 스스로 기쁨을 주는 원인의 관념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매 순간 다른 개체와의 마주침을 통해 공통적인 것을 더 많이 인식할 수록 더 적합한 관념을 갖게 되는데, 추상적인 개념만을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 자신의 삶에서 실천함으로써, 지속적인 마주침을 통해 자기 스스로의 관념으로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예속에서 벗어난 자유인들의 종교는, 죽음이나 악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신에 대한 사랑으로 행동하게 되는 덕 자체를 갖는 것으로 귀결된다. 또 인간은 사회 안에서 더 큰 능력과 행복을 추구할 수 있으므로 사회를 구성하게 된다고 보면서, 국가의 통치를 받더라도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보장받지 못한다면 통치에 대한 합의는 무효가 된다고 주장한다. 스피노자는 최선의 국가는 정치 체제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자유와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국가인가에 방점을 둔다.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고, 자연 만물과 연결되는 인간을 그려내며, 공동체의 가치에 주목하면서, 신의 진정한 뜻을 치열하게 찾았던 스피노자는 철학자일뿐만 아니라 치유자이자 혁명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구분과 분열, 우위와 열패로 치닫는 요즘,  스피노자를 다시 기억해야하는 이유가 아닐까. 

정서의 조절과 억제에 대한 인간의 무능력을 나는 예속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정서에 복종하는 인간은 자신의 권리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운명의 권리 아래 있으며, 흔히 더 좋은 것을 보기는 하지만 더 나쁜 것을 따르도록 강제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운명의 힘 안에 있기 때문이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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