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 그루터기 지성·감성의 메타언어 조선문학사시인선 323
박영재 지음 / 조선문학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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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미래 지향적이기보다 과거 지향적 분야에 가깝다. 과거를 천착하며 삶을 살찌우는 것이 역사 외에 또 있다는 얘기가 된다. 문학 중에서 특히 시(詩)도 과거의 경험칙(經驗則)을 주 소재로 삼는다. 인정과 자연 그리고 향수 등은 과거와 쉽게 연결되는  시어(詩語)들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요즘 세류를 좇아 휘갈겨 쓴 스피디한 시에 마음이 가지 않는다. 거기엔 독자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문학성이 다소 떨어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문학이 과거 지향적이라고 해서 퇴행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시간을 거스르는 영역으로 치부해서도 안 된다. 문학이 궁극적으로 과거적이라는 말은 과거나 현재에도 동일한 인간이 고도로 발달된 과학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론에서 출발한다. 어떻게 보면 시대에 뒤떨어진 대상에서 진실을 노래하는 것이 문학이고 시인지 모른다. 힘들었던 과거 삶에서 인정과 사랑과 정의에 민감했던 나를 찾게 된다. 사랑과 인간의 본성이 현재의 생활상에서보다 과거에 보다 더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학(詩學)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최근에 출판된 박영재 시인의 시집 [뿌리깊은 그루터기](조선문학사)는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제목부터가 그랬다. [뿌리깊은 그루터기]라. 나는 이 제목에서 대뜸 두 가지를 연상했다. 하나는 전통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성경이다. 여기서의 전통은 우리의 전통을 말하는 것이고 성경은 다 알다시피 기독교 경전을 가리킨다.

 

모르겠다. '뿌리깊은'에서 전통을 연상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식물은 뿌리에서 시작해 줄기가 나오고, 가지가 퍼지며 잎이 달리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뿌리는 그 나무의 시작을 상징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민족도 가문(家門)도 또 이것들을 아우르는 문화도 그 뿌리가 튼튼해야 훌륭하게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전통'이라고 한다.

 

'뿌리깊은'에서 내가 전통을 쉬 떠올린 것은 무엇보다도 '불휘 깊은 남간 바라매 아니 뮐새'로 시작하는 용비어천가 때문이지 싶다. 용비어천가는 주지하다시피 훈민정음으로 된 최초의 악장 문헌이다. 조선조 세종대왕이 성삼문 신숙주 등 집현전 학사들로 하여금 창제한 글이 훈민정음 즉 한글이다. 이것은 한문화(漢文化)에서 벗어나겠다는 우리 문화의 대 선언이었다. 여기서 우리나라 문화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진정한 우리의 전통은 '뿌리깊은 남간'의 훈민정음 실험 작 용비어천가에서 시작되었다.

 

'그루터기'는 또 무엇인가? '나무나 풀 등을 베어내고 남은 밑동'을 그루터기라고 한다. 박 시인이 '책머리'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말은 성경 이사야 6장 13절에서 원용해 온 단어이다. 북이TM라엘이 이방인들에게 멸망당한 뒤, 남 유다마저도 패망 당할 위기 속에서도 이사야 선지자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그루터기', 즉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히 준행하는 남은 자들(remnants)로 인해 구속사가 이어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렇다면 '뿌리깊은'이라는 수식어와 '그루터기'라는 명사는 모두 전통과 맞물려 있는 단어들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이 시집의 이름을 채워주는 것은 120편에 가까운 박 시인의 시들이다. 어느 것 하나, 우리의 전통과 관련되지 않은 시들이 없다. 어떤 것은 제목으로 또 다른 것은 시어로 아니면 주제로까지 전통과 연결 지을 수 있는 것들이다. 이 시집에 올려 있는 시들을 읽노라면 고도로 발달한 과학문명 속의 내가 아닌 자연 속에 몰입되어 있는 자신, 전통을 붙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시집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사향보(思鄕譜), 제2부 '계절과 함께', 제3부 '사양(斜陽)의 노래'가 그것이다. '사향보'는 그러니까 '고향을 생각하는 노래'라는 뜻이 된다. 고향 마을에서 일어났던 인간미 넘치는 소재들이 시어로 형상화되어 아름답게 표현되고 있다.  '계절과 함께'는 사계의 변화에 화자(話者)의 감정을 이입시켜 삶의 단계 단계를 구분지어 주면서 시절을 아끼고 허송세월하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사양의 노래'는 '해질녘의 노래'라는 뜻으로 황혼에 접어든 시인의 인생을 노래한 것이다. 아니 이것은 시인만의 '사양 노래'가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가 겪어야 할 인생의 끝자락을 노래하는 것이라고 봐도 좋다.

 

시인을 참다운 시인으로 만들어주는 조련사 박진환 박사는 평설에서 이 시집의 시들을 세 가지로 구획해 주고 있다. "하나는 思鄕(사향)을 중심으로 설정되고 있는 思鄕(사향)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노경의 시인이 맞고 있는 斜陽(사양)공간, 그리고 이 두 공간을 옆에 끼고 동행하면서 구원의 길을 향해 중단됨이 없이 내딛고 있는 시와 신앙의 공간을 세 번째 詩域(시역)으로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p.125). 120편에 달하는 시를 정밀하게 분석하고 품평한 뒤 내 놓은 구분이다.

 

그런데 나는 박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시 전편을 통해 흐르고 있는 또 다른 정신세계를 발견했다. 절대자 하나님과 관련해서는 박 박사도 평설에서 세 번째 시역으로 제시하고 있으니 접어 두자. 그의 시를 관통하는 또 다른 시역은 ‘부인’과 ‘어머니’이다.  60 성상을 동고동락한 부인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은 이 시집뿐만 아니라 앞에 출판된 [반석 위의 백합향], [산수와 동행] 등에도 선연히 드러나고 있다. 박 시인의 어머니와 부인은 지금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그리움과 고마움은 더 절실하다. [뿌리깊은 그루터기]에서 부인에 대한 그리움을 시로 조련해 낸 것이 20 여편,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을 주제로 한 것이 10 여 편이나 된다. 물론 간접적 소재까지 포함시키면 관계 시들이 훨씬 많아지겠는데 그것은 그들에 대한 시인의 정신적 부채의식이 얼마나 큰 지를 말해 주는 것이다.

 

가령 '비오는 날의 그대 생각'은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시화한 대표적인 것이다.

 

........<전략>

못다한 사랑

우수로는 달래지 못한

옛날의 사랑도 꽃으로

피고

따뜻하게 불러보는

이름 하나도 꽃으로 핀다

('비오는 날의 그대 생각' 부분)

 

여기서 '따뜻하게 불러보는 이름 하나'는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아내'를 가리킨다. 살아생전에 잘해 주지 못하고 짐만 지웠던 과거 삶을 돌이키며 이제 잘 해 줄 수 있는데, 둘러보니 아내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시인은 비오는 날 유리창에 얼룩진 비 무늬를 꽃으로 만들어 그것을 아내로 이미지 변화를 시켜 '따뜻하게 불러보는' 것이다.

 

부인에 대한 이 시와 비슷한 시상(詩想)은 1부에서만 '그 여인', '저 별은', '그리운 로맨스', ''기다림' 등 여러 개이다. 전해들은 바로는, 박 시인의 부인은 남편을 위해 잘 내조하고 또 시어머니에 대한 정성어린 효성으로 효부 상을 수상할 정도로 선한 삶을 살다가 갔다고 한다. 그에 대한 찬사가 아직까지 마을에서 회자된다고 하니 지극한 효도의 아름다움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어머니를 들로 표현할 정도('들은 어머니다')로 신뢰한다. 그리고 고마움으로 사무친다. 그도 그럴 것이 32세에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홀로 4형제를 키워 훌륭한 사회인으로 진출시켰다. 이렇게 하기까지는 연약한 여성의 몸으로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이런 마음은 어머니을 '나의 신앙'(p.34)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있다. 어머니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고마움이 내포되어 있는 표현이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느낀 몇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박영재 시인의 시는 대단히 젊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그는 80 중반의 연치(年齒)를 가지고 있지만, 시적 테크닉을 젊은 시인 못지않게 구사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언어의 다양한 표현을 장점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토속적인 향토 어에서부터 현대어에 이르기까지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다. 표현에 있어서도 비유와 상징에서 공감각적 표현에 이르기까지 능수능란한 실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뿐만 아니라 단어의 통일성도 돋보인다.

 

다음의 시에서 절묘한 단어 배치를 발견할 수 있다.

 

........<전략>

치마폭 잡고 늘어지다 채인

바람에 바람맞은 봄바람

여인네 가슴에 감기는 연두빛에도

몰래 감춘 바람기로 설레임한다.

('봄바람 여인' 부분)

 

같은 '바람'이라는 단어가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된 예가 된다. 처음 나온 '바람'은 '용언의 어미 '-ㄴ(-은), '-는' 아래에서 '바람에'의 꼴로 쓰여 '원인'이나 '근거'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고, 두 번째 나온 '바람'은 '속임을 당함'의 뜻으로, 그리고 세 번째 '바람'은 '기압의 변화로 일어나는 대기의 흐름'을 마지막 '바람'은 '(어떤 대상이나 이성에)마음이 끌리는 들뜬 상태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한 단어를 일부러 의도하고서도 이렇게 배치하며 시어로 사용하는 것은 쉽지 않을 일이다. 하지만 박 시인은 절묘한 언어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박 시인은 나이가 많다고 해서 또 자연과 인생을 노래했다고 해서 시만을 위한 시를 쓴 사람이 아니다. 그는 굴곡의 역사에서 발견하는 슬픔을 표현할 줄 알고(‘청령포에서’), 실향민으로서 남북 분단의 아픔을 누구보다도 절실히 느끼고 있다(‘뜸북새’, ‘하나로 1’). 편리라는 이름으로 과학만능주의가 횡행하는 현실을 시로 항의하고 있기도 하다(‘옹달샘’). 또 인간의 욕심으로 소 돼지를 죽음으로 내 몰았던 구제역을 에둘러 비판하고 있다(‘자연 속에’). 박 시인은 문학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객관적인 시각을 소지하고 있는 시인인 셈이다.

 

박영재 시인은 고희(古稀)가 넘어 시작 활동을 시작해서 나이를 초월해 왕성하게 필봉을 작렬하고 있어 주위에서 많은 관심을 갖게 만든다. 지금 그는 80 중반으로 미수(米壽)를 바라보고 있다. 그럼에도 [山水(산수)와 同行(동행)], [구름타고 땅을 보니] 그리고 시집으로 [반석 위의 백합향]과 본 [뿌기깊은 그루터기] 등 네 권의 시집을 상재했다. 대단한 노익장이 아닐 수 없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사회에서 은퇴를 하고 무료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현실에서 그의 삶은 좋은 본보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는 이번 시집이 그의 마지막 출간 책자가 될 것 같다고 했지만 그의 왕성한 필력으로 볼 때 미수 기념 나아가 구순(九旬) 기념의 시집을 기대하는 것은 나의 바람만은 아닐 것이다. 박 시인의 건승을 빌며 독자 제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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