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들면 더 매워
정승훈 / 베드로서원 / 1997년 11월
평점 :
품절


책을 지은이로부터 증정을 받을 때 나는 가능한 한 서평를 써서 내가 운영하는 카페나 블로그 아니면 인터넷신문 등에 올리고 있다. 이것이 선물로 받은 책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되는 듯. 이럴 땐 서평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받은 책을 꼼꼼히 읽었다는 한 증표가 되는 것이다.  

 

벌써 4년이 지났다. 어느 목회자 세미나에서 정승훈 목사로부터 책을 한 권 선물로 받았다. 본인이 직접 쓴 책이라고 했다. 연륜이 그렇게 높지 않은 젊은 축에 속하는 목회자가 저서를 가지고 있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이미 10 여 년 전에 출판되어 서점에서는 절판된 책이라는 것이다.

 

그는 조금은 쑥스러운 듯, 한 권 남은 책을 내게 주고 싶다며 슬며시 내 밀었다. 그는 책을 전하면서도 죄송하다며 한 권 남은 책 속지에 낙서가 되어 있어서 그 부분을 찢어 없앴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하얀 두 장의 속지 중 안 장이 없어졌다. 찢겨나간 흔적만 남긴 채.

 

정 목사는 지은이로서 나에게 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남은 속지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명재 목사님께 기쁜 마음으로 드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날마다 평안하시길... . 정승훈"

 

정 목사를 볼 때마다 그가 재주꾼 중의 재주꾼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손으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 전문가 수준의 기량을 갖고 있다. 그가 손으로 기타를 치면서 찬양을 인도할 때 은혜 받고, 그림으로 생각을 표현할 때도 웬만한 카툰 작가는 저리 가라이다. 또 그가 쓰는 글씨는 독특한 필체여서 주위에서 '승훈체'로 상표 등록을 하라고 채근까지 받는다고 한다.

 

목회자 세미나 훈련 과정의 하나로 미얀마에 단기 선교를 갔을 때엔 이런 일도 있었다. 한 공회당에 아이들을 모아놓고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있었다. 어느 나라 아이들이든 마찬가지지만 그곳에서도 아이들이 예배에 임하는 자세는 극히 소극적이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나고 공회당 입구에서 정 목사가 풍선에 그려주는 자리에서는 판이했다. 그림에 매료되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풍선 하나씩을 받아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정 목사의 손은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는 ‘미다스의 손’이란 생각을 그즈음 했을 정도이다.

 

4 년 전 그로부터 책을 선물로 받고 서재 한 쪽에 꽂아 두었었다. 그 뒤 몇 번이나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쓰기 위해서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꽂아 두었을 법한 곳엔 다 뒤져 보았으나 찾는 데 실패한 것이다. 그러다가 얼마 전 집안 대청소를 하다가 거실 책장 맨 밑에 숨어 있는 이 책을 발견하고 다시 한 번 정독을 했다. 읽을수록 그의 생각에 다가서는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의 제목은 <건들면 더 매워>이다. 부제가 '풋내기 목사의 아름다운 사람 이야기'로 되어 있고, 기독교 전문 출판사인 베드로서원에서 1997년에 초판을, 그리고 그 이듬해 2쇄를 찍었으니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의 책이다. 부제로 내용의 일단을 밝히고 있는 것과 같이 이 책은 목사 안수 3년 차의 풋내기 목사가 쓴 사람 이야기이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소재는 사람이지만 내용은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사람 이야기'인 동시에 '사랑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이 책에 올린 글들은 예외 없이 단문(短文)에 속한다. 문학 장르에 꽁트(conte)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짧은 글 속에 지혜와 사랑을 주제로 한 위트를 주로 담는다. 우리가 번역하기는 '손바닥 장(掌)'자를 써서 '장편(掌篇)'이라고 하는 글이 여기에 속하는데, 손바닥 만한 분량에 전하고자 하는 바를 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정 목사는 처음 글에서 마지막 글에 이르기까지 이 장르의 양적 질적 원칙을 잘 지키고 있다.

 

이 책에 올려진 글들은 대부분 그가 한 교회의 ‘새 가족부’를 담당할 때 쓴 글들이다. 새로 온 가족들에게 하나님을 쉽고도 다정하게 소개하기 위해 Tm여진 글들이다. 하지만 새 가족들보다는 기존 성도들 사이에 더 많이 읽혔다며 미안해하고 있다. 내가 글을 찬찬히 읽어본 느낌은 이 글들을 새 가족들에게만 독자층을 제한하기에는 아까운 글이라는 점이다. 글들이 깊이가 있어 생각할 거리들을 많이 제공해 주었다.

 

200쪽이 채 안 되는 책 속에 8부 총 82편의 글로 엮여진 책이다. 각 부마다 특징을 말한다면 1부 ‘놀이터’는 글쓴이의 유소년기 추억담이다. 서민의 아들로서 건강하게 자라온 과정이 가감 없이 진술되어 있어 친근감이 간다. 초등학교 시절 누구나 겪었을 이야기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저자는 따뜻하고 사랑스런 마음을 보태 서술하고 있다. 땅 따먹기, 자치기, 단방구, 말 타기 등은 실로 오랜만에 들어본 아이적 일상어이다.

 

2부 ‘삼송리’는 지은이 가족에 얽힌 애환(哀歡) 이야기이다. 서울의 외곽에 자리잡고 있는 삼송리는 미군부대가 있어서 양색시(?) 등 미군들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다. 또 서울 생활에서 실패해서 떠밀려올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재기를 노리는 곳이기도 했다. 이런 곳에서 일찍 남편을 잃은 홍 권사님은 자녀들과 살아가기 위해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다. 믿음 위에서의 치열한 삶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권사님은 보여주고 있다. 이 홍 권사님은 지은이의 어머니이다.

 

지은이의 가족사랑은 남다르다. 늘 마음 아파하는 사람이 형이다. 형은 지능지수가 높고 공부밖에 몰랐다고 한다. 그 형이 성인이 될 즈음 정신분열증에 걸려 병원을 드나들었다. 지은이는 이런 정신적 질환을 개인 차원에서 재단하지 않고 목적 없이 치닫는 '현대 사회'의 희생양들로 보고 있다. 하지만 꼭 나아 정상으로 돌아올 것을 확신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는 가정의 애사(哀事)에 속할 것이다. 감추고 싶은 부분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자신의 아픔을 고백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순수하고 진실한 사람만이 밝힐 수 있는 용기가 될 것이다.

 

3부 ‘풋내기 목사’는 목사 초년생으로서의 에피소드이다. 그냥 듣고 지나칠 일과성 에피소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고 글쓴이의 진솔함을 읽고 웃음 지을 수 있는 그런 글들의 모음이다. 4부 ‘웃는 얼굴’은 짧은 글 안에서 역설의 미학을 맛볼 수 있는 글들로 채워져 있다. 목회자는 가능한 한 성스러운 말과 거룩한 행동 쪽으로 기우는 삶을 살려고 한다. 또 이런 삶이 목회자의 바른 자세로 인식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정 목사는 그것보다 진실한 마음과 따뜻한 태도에 방점을 두고 글들을 이어가고 있다. 풋내기 목사에게서 우러나는 풋풋함이 독자를 상쾌하게 만든다.

 

5부 ‘혼자 떠들기’와 6부 ‘무릎치기’에서는 글쓴이의 삶의 도량과 목회의 방향을 읽을 수 있어 좋다. 개인의 구원이 소중하되 사회를 외면하지 않으며, 믿음 생활에 있어서의 '축복'의 의미를 간과하지 않되 역사 속의 한 인간으로서 자세의 중요성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예민함을 보여 주고 있다. 또 큰 것 만능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 작은 것의 고귀함('저들이 굶고 있다', '7천 원')을 강조하고 있다. 사회 불의에 대해 그는 글로 발언하고 있으며('어린이날을 없애라', '뒷돈 공화국' 등) 성경 이외의 현대 교양인으로서의 기본적 소양을 든든하게 확보하고 있다는 것도 반가운 일이다('얼꼴', '새마을 노래' 등).

 

이 책의 부제로 단 것이 '풋내기 목사의 아름다운 사람 이야기'라고 했다. 이 부제를 탄탄하게 뒷받침해주는 글들이 7부 ‘아름다운 사람 이야기’이다. 그가 겪은 일화 중 드러내고 싶은 사람들을 실명으로 칭찬하고 있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이고 직접적인 칭찬의 방법을 피하고 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믿음을 굳게 지키며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여서 더 친근감이 간다. 그리고 독자 여러분들도 그런 삶을 살기를 바라고 있다. '예수 믿고 천국 가라'는 직설 화법이 아니라 '나도 저 사람처럼 신앙생활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만든다. 간접적 문제 제시가 더 큰 설득력을 얻게 만드는 격이다.

 

8부 ‘허름한 밥상’에서는 풋나기 목사로서 소망하는 목회자 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전체 글들을 성경적으로 모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성경은 진리의 말씀이다. 아무리 인간이 날고뛴다고 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말씀을 벗어나서 자신을 주장할 수 없다. 글쓴이 정 목사도 마찬가지이다. 이야기의 결론이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8부는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8부가 아니었다면 이 책이 감동의 글 모음은 되었을지 모르지만 은혜의 책으로는 좀 부족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풋나기 목사의 글 배치 치고는 절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 안에는 젊은 목회자의 그동안의 삶의 궤적이 선명한 발자국으로 남아 있다. 그 궤적은 온상 안의 화초라기보다도 들에 피는 들꽃과 같이 힘이 있다.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성경을 요약한 어절이기도 하다. 하나도 빠짐없이 짧으면서도 완결된 단문 말미에 관련 성경 구절을 덧붙인 것은 그의 이런 마음을 잘 웅변해 준다. 이 책이 기도로 쓰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정 목사는 이 책을 내기 위해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고 나서 정말 자신이 글이 책으로 출판될 수 있을까 하고 마음 졸였다고 한다. 하지만 제대로 된 출판사라면 이런 글을 활자화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상업성은 좀 뒤진다고 할지라도 한 사람의 진솔하고 따뜻한 마음을 많은 사람에게 공유시킴으로써 사회를 맑고 밝게 만드는 것이 책 출판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보다 좋은 글을 달리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출판사의 신앙적이고 사회적인 기능이 어떠해야 함을 잘 설명해 주고 있기도 하다.

 

풋나기 목사의 이 글이 다시 인쇄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글 중간 중간 눈에 띄는 표현의 어색함, 맞춤법과 띄어쓰기의 오류 등은 다시 한 번 세세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다. 언뜻 생각나는 것은 2부 '호박과 라면'에서 홍 권사님이 호박만 보면 울대뼈가 움직거리신다라고 했는데, '울대뼈'는 남성에게만 있는 것이어서 여성인 어머니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단어이다. 6부의 '부러 틀리는 글자'에서 토씨 하나로 내용이 뒤바뀌는 예로 '낫게'와 '낮게'를 들고 있는데, 토씨는 조사(助詞)의 순 우리말이다. 여기서는 '토씨 하나로'가 아니라 '받침 하나로'라고 해야 자연스럽다.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고 또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책으로 출간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바람이다. 하지만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정승훈 목사는 그 많지 않은 사람 중에 일찍이 포함되는 복을 누렸다. 그것도 30대 초반에. 그도 이젠 지천명(知天命)의 나이가 되어 간다. 책 출간 당시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았던 아이들이 어엿한 사회인과 대학생으로 변해 있다. 그는 삶도 성실하게 살고 있고 또 목회도 모범적으로 하고 있어 주위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그가 살아온 삶과 쌓아온 목회의 결과물들이 여러 가지로 열매 맺게 될 것이다. 그 중 적지 않은 부분이 책에 담겨질 수 있을 것이다. 사회에 선한 영향을 끼칠 그의 책이 기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 목사의 건승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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