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가족이 함께 읽는 신약성서 이야기
헨드릭 빌렘 반 룬 지음, 한은경 옮김 / 생각의나무 / 2001년 12월
평점 :
절판


책을 사기는 2년도 더 되는 것 같다. 어느 대학 축제 때 50% 세일로 구입한 책이다.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면서도 미루다가 어제(12월 30일) 주일 예배 끝나고 독파한 책이 헨드릭 빌렘 반 룬(Hendrik Willem Van Loon)이 지은 <신약성서 이야기>이다. 번역은 전문 번역가 한은경이 했다. 박학한 지적 소유자인 저자에 조응하는 매끄러운 번역이었다.

 

반 룬은 내가 잘 모르는 사람이다. 나의 지적 얕음을 말해주는 것이 될 터이다. 책을 독파하지 전, 표지 안쪽에 소개되어 있는 저자 약력을 보았다. 반 룬은 네덜란드 출생으로 미국에서 공부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AP 통신 특파원으로 여러 곳에서 일했고, 뒤엔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서양 근대사를 강의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시대를 읽고 있는 사가(史家)인 셈이다.

 

그런 그가 성서 이야기를 집필했다. 그는 이 책을 어려운 내용에 접근하기 힘든 아이들에게 헌정하는 마음으로 썼다고 했다. 역사와 신학은 고리타분한 학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런 선입관을 깨뜨리는 책을 쓰고 싶은 저자의 노력의 결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지고 보면 성서도 이야기책이다. 일반적인 스토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사건을 이야기 식으로 엮어놓은 책이 성서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를 구속사의 결정물이라고 한다.

 

반 룬은 <구약성서 이야기>에 이어 그 자매편이라고 할 수 있는 <신약성서 이야기>를 펴냈다. <신약성서 이야기>는 총 13개 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거기에 '그림으로 보는 성서 연대표'가 부록으로 붙어 있다. 총 206쪽에 걸쳐 내용이 채워진 책이다. 부피가 많은 책은 아니다. 13개 장으로 엮어져 있지만 성경처럼 연속성이 있는 글이 아니라 각 장을 눈이 닿는 대로 읽어도 괜찮을 책이다.

 

하지만 일반 성경의 내용에 저자의 상상을 살로 붙여 서술해 나갔기 때문에 읽는 재미는 가벼운 문학 서적보다 더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상상했던 것과 저자의 그것이 일치하는 부분이 있어 짜릿한 쾌감 같은 것을 느낄 수도 있었다. 가령 신약 성서의 4 복음서 저자가 마태와 마가, 누가와 요한으로 되어 있지만 그들과 이 유명한 문학적 글들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55쪽)과 3세기 넘게 세계의 중심지였던 로마는 현대의 뉴욕이나 런던, 파리보다 국제적인 사회였으며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이 비교적 쉬웠고 혈통을 많이 따지지도 않았다(65쪽)는 등의 이야기들이다.

 

또 유대와 갈릴리는 명목상으로 독립 왕국이었으나 세금을 징수해야 하는 일이 생기자 로마는 이들 역시 정해진 날짜에 자신의 족속이나 가문의 고향에 있어야 한다(71쪽)고 서술한 내용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요셉과 마리아 부부가 고향 베들레헴으로 간 것이 호적을 하러 갔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호적은 세금을 부과하기 위한 로마 제국의 정책의 일환이었다는 것이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어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을 어겼다며 비난을 받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 그런 바리새인들은 안식일과 일에 대해 너무나 민감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바리새인들은 옷에서 핀 하나도 빼려 하지 않는 바로 그 안식일"(125쪽)이라며 율법에 결박되어 있는 그들을 간접적으로 나무라고 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은 유명하다. 거기서 제물 파는 자들과 환전상들의 상을 엎으시고 쫓아낸 이야기가 나온다. 성전 부정의 한 고리 역할을 한 것들이지만 거기서 환전상을 요즘으로 말하면 은행가라는 표현이 마음에 와 닿았다.

 

예수를 은 30에 판 유다는 갈릴리 출신이 아니라 가리욧 지방 출신이다. 예수의 열 두 제자가 모두 갈릴리 출신인데, 이 유다만은 가리욧 출신이어서 그 소외감으로 예수를 배반하고 팔기까지 하지 않았나 추측하는 대목에 공감이 갔다. 가룟 유다를 빼고 나머지 제자들이 모두 갈릴리 출신인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어부로 일하던 제자들을 중심으로 다수의 제자가 그곳 출신인 것은 맞다. 예수가 살았던 세상도 오늘날과 같이 조화롭지 못했던 것 같다. 강력한 지위의 사람들에게는 너무 많은 것이 있었던 반면, 노예들은 가진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 수는 강자보다 천 배는 더 많았다(173쪽)고 본 저자의 시각에 나의 시선도 모아졌다.

 

가끔 성모 마리아와 예수와의 관계에 대해서 대화를 할 때가 있다. 특히 가톨릭 신자들을 만날 때, 이 점을 질문할 때도 있다. 마리아와 예수를 동격에 놓고 믿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명확한 설명을 내놓지 못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에베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리스 여신 아르테미스(Artemis)는 아버지 제우스보다 더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고 봤다. 중세에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아들보다 더 많은 숭앙을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184쪽)라고 한 말은 오늘날 우리의 궁금증 중 일부를 해소해 주지 않나 싶다.

 

지금은 눈으로 보는 것이 성행하는 시대이다. 특히 자라나는 세대에게 인쇄된 글자만으로 다가가기에는 한계가 따른다. 저자는 이 책의 제목 앞에 '온 가족이 함께 읽는'이란 수식 구절을 덧붙이고 있다. 또 저자 머리말에서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성서 이야기라고 했다. 거기에 만족할 만큼 그림을 유효적절하게 배치하고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전혀 지루하거나 건조함을 느끼지 않게 한다. 몇 편의 사진이 포함되기는 했지만 대부분 중세 저명한 미술가들의 그림을 옮겨 놓았다.

 

옮긴이 한은경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의무감을 가지고 이 책을 번역한 것 같다. 옮긴이의 말에서 유일신 하나님을 '하느님'과 '하나님'으로 나누어 호칭하는데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서 '하느님'으로 통일해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이 그렇게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언어는 습관이고 개념이기 때문에 편리하게 쓰면 되는 것이다. 하나로 통일해 쓰면 그것만큼 좋은 것이 없겠지만 사회 종교적 역학 관계가 허락하지 않을 때엔 할 수 없다. 시간이 흘러가면 사물이 변화하듯 앞으로 통일되어 사용될 날이 올 것이다.

 

번역이 매끄럽게 되었다고 상술했다. 옮긴이의 많은 노고가 따른 번역임을 금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125쪽 베데스다 연못을 설명하면서 '벳새다'로 옮긴 것은 잘못이고 그 외 몇 곳에 오탈자가 산견된다. 성경을 쉽게 읽고 이해하는 것은 오래 이어져 온 소망이었다. 하지만 성경은 만나는 사람의 마음 자세에 따라 다르게 다가온다. 단적으로 믿음으로 읽어야 한다는 말이 그것이다. 그렇더라도 성경을 쉽게 풀어 재미있는 이야기 식으로 독자에게 제공된다면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에 기여하는 것이 될 것이다.

 

헨드릭 빌렘 반 룬은 '존 뉴베리'상에 빛나는 20세기 최고의 사상가라고 뒷 표지에 소개되어 있다. 상혼에서 나온 문구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반 룬의 성서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사회와 접맥시키는 뛰어난 기술을 발견했다. 이 책을 읽음으로 성서에 눈이 자주 가게 된다면 반 룬은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해 낸 것이 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라고 독자 제현께 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성서를 읽는 시야에 장애물을 제거하는 역할을 이 책은 해 낼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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