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만자와 ''에 대하여



1. 죽음에 대한 이야기

 

죽음을 이야기의 중핵으로 끌어안고 있는 만화를 우리는 최근 들어 적잖이 만났다. 죽음에 관하여(시니, 혀노)신과 함께(주호민)라는 걸출한 두 작품이 사후 세계라는 가상을 통해 그것을 다루었다면, 꼬마비의 죽음 3부작(살인자난감, S라인(이상 완결), 미결(미완))은 작품 속 현실에 흥미로운 변주를 가미하여 죽음의 구석구석을 사유해 보도록 이끈다. 황준호의 사이코패스 스릴러(인간의 숲, 악연)나 구아바의 옴니버스 처럼 죽고 죽이는 범죄 사건들을 통해 사람이 만들어내는죽음과 대면하게 하는 작품들도 있다. 여기에 윤태호의 미생-사석 편처럼 삶의 자리를 찾지 못한 상태의 직장인이 죽임당한 직장인을 만나는 에피소드가 담긴 작품을 떠올린다면,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의 리스트는 더 늘어난다.


이렇게 새삼 죽음을 다룬 작품들을 떠올려 보는 것은, 올 한 해 우리가 적잖은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던 데에 이유가 있지는 않다. 실은 가장 근래에 완결된 죽음에 관한 만화 아만자를 두고 이야기를 해 보려는 데 이유가 있다. 하지만 우리 곁을 떠나간 이들의 이름을, 그 죽음 하나하나의 개별성을 아만자를 이야기하며 떠올릴 수 있다면 그것도 이 작품의 의미를 짚어내는 한 방법이 되리라고 생각한다앞서 언급한 작품들에도 해당되겠지만,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때로 삶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단 걸 새삼 상기하며, 아만자의 주인공이 살아간 삶과 그의 죽음을 보며 떠올린 글자 과 함께, 이 에세이를 써내려 간다.


Ⓒ김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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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만자」 64화 아가’(2014.5.5.)는 세월호 참사를 염두에 두고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가는잃어버린 모든 분들께.” 보내는 작가 김보통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2. 죽음 앞에 선 아만자의 삶

 

제목이 지시하듯 아만자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앞서 암환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지배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까닭은 우선은 우리의 암에 대한 인식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에게 암은 죽음과 직결되어 있는 병이다. 이는 통계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매년 사망원인통계’(통계청) 1위는 늘 압도적으로 암이다. 나도 주변의 많은 이들을 암으로 떠나보냈다. 이러니 암에 걸리면 죽는다.’는 생각을 떨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이런 현실의 사정을 리얼하게 반영하듯, 아만자의 암환자 자신에게도 암 선고는 사망 선고나 다름없다. 무엇보다 그는 4기 위암 환자다. 작품 속에서는 대화를 통해 짧게 분위기만을 제시하지만(3), 위암은 4기일 때 사망률이 95%에 육박한다.(연세대학교 의료원 암센터) 그렇기에 암 선고를 받고 나오는 길에 그는 이렇게 읊조린다. ““당신은 곧 죽습니다.” 그렇게 얘기해 줬다면 좀 더 실감이 났을까.”(1)


이제 작품 속의 아만자는 죽음을 직면한 채로 살아야만 한다. “짧으면 세 달, 길면 기~하고 농담을 선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그저 농담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안다. 선고 이후로 그는 자신의 남은 생을 숫자로 환산하는 일이 낯설지 않은, 암환자다. 이렇게 죽음과 잇닿은 삶이란 이전의 삶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삶의 모든 요소들이 다르게 지각되고 죽음 앞의 삶에 적용된다. ‘제한된시간에 대한 관념이 정신을 지배하고 병원이 일상의 공간이 되는 것과 같은 명백한 변화와 함께, 언어와 감각 그리고 감성 등 모든 인간적인 부분에서 격변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격변의 이모저모는 아만자속에서 두 개의 세계를 통해 표현되고 의미를 만든다작품에서 도드라지는 두 시공간, 곧 일상의 세계인 현실과 모험의 세계인 내면이다. 두 세계가 교차하면서, 아만자는 앞서 언급한 죽음을 다룬 만화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읽기와 이해를 만들어 낸다. 서사의 진행 속에서 두 세계는 번갈아 출현하는데,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각각의 세계에 머무는 시간과 방식 그리고 두 세계의 관계가 지속적으로 변화한다.


두 세계 가운데 처음에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현실 세계다. 암 선고를 받고 가족과 마지막 집밥을 먹고 항암을 하는 등 현실적인 암환자의 일상이 그 속에서 그려진다. 초반부에서 농담과 정보를 버무려 독자에게 재미를 느끼게 하고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는 곳도 이곳 현실 세계다. 암환자의 일상은 선고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다. 단적인 예를 그의 말하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제 그가 미래 시제로 하는 말은 계획이나 약속이 될 수 없다. ‘못할 것이다의 형태가 아닌 이상, 그것은 농담이거나 거짓말이거나 자조다. 여자친구에게 영국 여행을 들먹이는 순간이 그렇다. 하지만 미래 시제의 말뿐만이 아니다. 그의 갖가지 말이, 행동과 감정과 감각이, 장난이거나 자학이거나 위장이 되고 만다. 병문안 온 친지 앞에서 어른의 위로’(71화 및 여러 화)를 주고받는 것도, 병자성사를 위해 방문한 신부 앞에서 부리는 패악질(89)도 모두 그렇다. 유일하게 진실인 것은 고통의 감각을 표현하는 육체의 신음뿐이다. 이 표정과 비명이 그것만으로도 강력한 핍진성을 지니고 있다면, 현실의 다른 언행과 감각들 이면의 진실은 무언가 다른 것을 말하기를 통해 드러난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시공간이 바로 내면 세계, 즉 숲이다.

 

Ⓒ김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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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만자는 때로 초점화자를 여자친구나 어머니와 아버지 등 가까운 사람으로 바꾸기도 하는데이는 굉장히 적절한 사족이다이렇게 초점화자가 변화되는 부분도 두 세계만큼이나 그마다의 효과를 산출해내는 개별성을 지닌다이에 대해서도 많은 흥미로운 것을 논할 수 있겠지만적절한 사족이 되기 어려우므로 다음 기회로 미루려 한다김철규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아쉽지만 생략한다.

 




3. 숲의 알레고리

 

아만자가 초반부에 독자를 끌어들인 힘을 현실 세계에서 찾을 수 있다면, 중후반부터의 흡입력은 단연 숲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현실 세계의 아만자가 서늘한 농담과 핍진한 고통의 몸짓을 통해 독자에게 다가갔지만,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대부분 독자의 현실과는 판이한 투병의 기록이 그것만으로 계속해서 보편적으로 흥미롭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옛말은 작품의 현실 속에서 가족이 겪는 (경제적) 고뇌의 일면을 드러내는 진실이기도 하지만, 그 현실을 가상으로 지켜보는 독자에게도 역시 (미학적으로)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보통 작가는 데뷔작이란 게 무색할 만큼, 상당히 사려 깊고도 정교한 방식으로 길면서도 짧게 느껴지는 병의 여정을 그려낸다. 그것을 이룩하는 시공간이 숲으로 불리는 아만자의 내면 세계다.


숲은 모험의 세계다. 병원이나 집에만 머물러야 하는 아만자에게 정신(무의식이라 해야 할 것이다)의 모험을 가능하게 하는 이 세계는 아만자의 분신에 해당하는 상징을 두고 있다. 불쑥 숲 속에 떨어져 모험을 이어가는 이 분신을 일단 순례자라 부르자. 숲 속에서 순례자는 마치 게임에서처럼 퀘스트를 실행해 간다. 그와 함께 독자도 나름의 퀘스트를 수행한다. 상징적 의미를 찾으려는 작업이 그것이다. 숲이 무엇인지 생경한 이름의 짐승들이 무엇인지 사막이 무엇인지 또 사막의 왕은 무엇인지를, 그것들이 현실 세계의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지를 계속해서 물으며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하지만 이 퀘스트는 녹록치 않다. 작가도 작품도 거의 힌트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상징적 독법을 향해 열려 있으면서도 상징화를 거부하는 작품의 몸짓은 여러모로 이야기의 흡입력을 키워나간다. 풀릴 듯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풀어보려는 독자의 충동을 동력으로, 이야기는 이어지고 그와 함께 알레고리의 효과를 산출해 내는 것이다.


상징과 알레고리는 유사하지만 상반된 방식으로 작동하는 수사법이자 독법이다. 섬세하게 설명하고 적용할 필요가 있지만, 여기서는 벤야민의 논의를 빌려 둘의 도드라지는 차이를 총체/파편에서 착목하여 아만자를 읽어나가려 한다. 상징은 의미를 총체화하려는 충동과 관련 깊다. 십자가는 예수가 못박혀 죽은 로마제국의 사형대이지만, 기독교와 엮이면서부터는 기독교의 모든 것에 대한 관념과 지식을 환기하는, 즉 전체와 부분 모두를 지시하()는 기호로 쓰이고 있다. 반면 그리스어 allegoria(무언가 다른 것을 말하기)를 어원으로 하는 알레고리는 전체를 상상할 수 없는 파편을 지시한다. 이미 깨어졌으며 그 전체상을 알 수 없는 무언가의 잔해가 알레고리를 통해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알레고리적 독법을 통해서 별자리처럼 의미가 발견되는 것이다. 폐허 속에서 주워 올린 이 파편의 알레고리는 특히 순례자마음을 읽어내는 데 유용하다.


순례자는 사막에 있는 자신의 마음을 찾으라는 비커리의 말대로 사막으로 향한다. 달랑쇠에 따르면, 마음도 순례자를 찾을 것이다. 하지만 사막에서 순례자의 마음으로 보이는 것들과 만날 때마다, 작품은 동시에 아니라고 말한다. 작품 속에서 현실과 내면이 긴밀히 연관되는 장면이 그려지며, 마음 같은 것들은 두 세계에서 같은 대사를 하기에 그것을 모르지만 직관하는 순례자는 물론 그것을 보고 있는 독자들도 마음 같은 것들이 마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때마다 작품은 까만콩이라 불리는 캐릭터를 통해 네 마음이 아니야라고 이르는 것이다. 나중에서야 밝혀지지만, 이 마음 같은 것들은 마음의 조각들이다.


그렇다마음의 조각은 마음이 아니다사막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이 아마도 마음의 조각들일 테지만무엇도 선명하지 않다어쨌든 마음이 아닌 이 조각들은 마음을 만나는 과정즉 알레고리의 파편과 그 별자리를 발견하는 과정을 이룬다하지만 여정 마지막까지도 총체로서의 마음을 만났다는 확언은 순례자도 독자도 얻지 못한다마치 단일한 전체인 마음이란 게 존재하는지 묻는 물음처럼혹은 조각들을 만나며 그것이 의 마음이 아님을 확인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듯이 침묵만이 크게 울린다아만자는 순례자와 독자에게 아만자의 이름만을 알려주고 모험을 마친다모험이 무엇이었고 숲이 무엇이었는지사막의 뜻과 사막의 왕이 무엇이었는지도 알려주지 않은 채로그 알레고리를 해석할 권한은 모두 순례자의 길을 따라나선 독자에게 열려있다누군가 그 열림을 닫아버리지 않는 한독자들의 수만큼 각자의 별자리가 발견될 것이다.



Ⓒ김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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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커리는 늙고 병들거나심한 고생살이로 살이 빠지고 쭈그러진 여자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다숲 세계의 가장 원로라 할 존재에게 이런 이름을 붙인 김보통의 작명센스는 확실히 보통은 아니다

 




Ⓒ김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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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랑쇠는 필자가 아만자에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 ‘침착하게 행동하지 못하고 몹시 담방거리는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달랑쇠의 농담은 더없이 침착하다.

 




 

4. 아만자와 우리들의 사회상, 혹은 별자리

 

어느 작품이든 그 작품만의 사회과 사회을 담고 있다. 전자가 작품 전반을 통해 포착·표현되는 현실 사회의 모습이라면, 후자는 작품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혹은 조금이나마 나은) 사회에 대한 상상이다. 그런데 작품 속 사회상은 단일하지 않을 수 있다. 아만자속에서도 아만자의 사회상과 김철규의 사회상은 다르다. 충분히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그것도 여자친구의 그것도 마찬가지로 다르다. 작품의 사회상은 이런 인물들의 사회상과 서사가 표출하는 사회상들의 합 혹은 충돌로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는 무엇이지만, 작품의 그것이 최종적인 것이라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복수의 개별 사회상들이 모두 독자가 지니고 있는 두 사회상과 만난다는 점에 있다. 이 만남이 바로 작품이 현실 사회에 작용하는 과정이다. 만남이 의미 있다면, 독자는 자신의 사회상들을 작품을 통해 수정하고 그가 다시 바라보게 된 사회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때의 삶은 작품 속의 사회상을 만나기 전과 다른 무엇이 될 것이다.


아만자와 그 아래 달린 댓글들(로 대표되는 독자 반응)은 그 만남의 과정을 조망하기에 더없이 훌륭한 텍스트였다. 일단 작품 속에 담긴 사회상들이 개별적으로 또렷하고도 섬세하다. 또한 이 작품이 그 속의 사회상들과 독자의 사회상들이 잘 만나도록 이끄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흡입력과 핍진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독자들의 댓글에서 이는 방증된다.(특히 99화가 풍성하다.) 하지만 이 글은 그런 사회상들을 상세히 논하기보다는 그 만남을 이루는 과정을 일부나마 다룬 것으로 일단 끝을 맺는다. 노파심에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상징적 독해의 충동마저도 알레고리의 폐허로 가닿게 하는 동력으로 전환하는 힘이 이 작품에는 있다. 그렇기에 나의 이해와 독해가 작품과 독자의 만남에 외려 방해가 되지 않기를 새삼 바랄 뿐이다.


마지막으로는 글의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려 한다. 나는 아만자에서 죽음을 지배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까닭은 우선은 우리의 암에 대한 인식에서 찾을 수 있다.”고 썼다. 그리고 그 전에는 이렇게도 썼다. “우리 곁을 떠나간 이들의 이름을, 그 죽음 하나하나의 개별성을 아만자를 이야기하며 떠올릴 수 있다면 그것도 이 작품의 의미를 짚어내는 한 방법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문장들을 사회와 그 사회의 한 사람 한 사람을 떠올리며 썼다. 또한 죽음에 대한 만화뿐만 아니라, 암에 대한 만화를 최대한 접하고 그 각각의 개별성을 짚어보고서 이 글을 썼다. 썼듯이, 아마도 우리” ‘사회암에 대한 인식죽음과 직결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통계도 경험도 진리그런 것이 있다면 보증하지는 않는다. 암을 이야기한 이전의 만화들은 오히려 죽음보다는 삶에 더 큰 방점을 찍어왔던 것도 그런 사회상이 존재하고 상상 가능함을 증명한다. 암환자의 자전적 만화인 오방떡소녀(조수진, 암은 암, 청춘은 청춘으로 출간)암이란다. 이런 젠장(미리엄 엥겔버그)이 보여준 긍정성과 삶에 집중한 사색은 드물고도 소중한 사례다.


또한 그런 맥락에서 아만자가 암환자의 이야기에서 죽음을 이야기한 것은, 이전의 만화들에서 보려던 지점을 다른 각도에서 보게 한다는 데 다시금 의미가 있다. 그것은 지배적인 사회상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차원을 달리 하는 새로운 시선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일이었다. 아만자가 죽음을 앞에 두고 살아간 젊은 말기 암환자를 순례자삼아 그린 죽음으로의 모험은, 삶의 개별성만큼이나 소중한 죽음의 개별성을 충분히 이해 가능하도록 그려냈다. 특히 하나의 사막이지만 누구도 대신 걸을 수 없는 나만의 사막으로 제시된 알레고리는, 사막이 곧바로 죽음을 상징한다는 답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값진 답을 우리에게 떠올리게 한다. 죽음은 모두에게 단 한 번은 꼭 찾아온다. 또한 죽음은 각자의 것이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오랜 전언은, 모두로 환원되지 않는 개별자의 죽음을 생각하게 하며 또 그 죽음을 공통적인 속성으로 껴안고 있는 우리네 삶을, ‘을 생각하게 한다. 내가 읽은 사막의 뜻은, 이렇게밖에 말해질 수 없는 지난한 생각들이다.


올 한해 떠나간 이들의 개별적 죽음을, 나와 연결되어 있는 그 죽음을, 파편으로 그러모아 들여다본다. 기억의 부피와 무게만큼 빛나는 그 별자리는 어떤 뜻을 들려주고 있는가. 나에게 우리에게, 또한 이 사회에.


조익상

er라는 필명으로 <인문교양만화잡지 SYNC>에서 만화 비평을 썼다. <빅이슈><에이코믹스>, <BOGO>에 이런저런 만화 관련 글을 기고하면서부터는 실명을 썼다. 이렇듯 뭘 써야 할지 잘 모르는 채로 꾸역꾸역 공부하며 쓴다. 작품과 독자의 만남에 누를 끼치지 않기만을 소망하며.





이 글에서 언급한 작품들(가운데 출판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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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저찌 하다보니 서재에 너무 오랜만에 글을 올리네요.

그간 쓴 글들 앞으로 간간이 업데이트할게요.



이 글은 잡지 <BOGO> 5호에 실렸습니다.

인쇄매체에서만 볼 수 있는지라 서재 재개와 함께 가장 먼저 올려둡니다.

마감일과 분량 제한을 맞추느라 허술한 부분이 적잖습니다만, 언젠가 고칠 기회가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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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 세월호 민변의 기록 - 세월호의 진실에 관한 공식적 기록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지음 / 생각의길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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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 모든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질문 속의 행위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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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색깔 = 꿀색 - 개정증보판
전정식 글.그림, 박정연 옮김 / 길찾기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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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입양인 `성공` 스토리와는 결이 전혀 다르다. 담담하면서도 위트있게 전개되는 깊이 있는 이야기와 그림. 애니메이션도 아주 훌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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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마무리한 작업이 책으로 나왔습니다.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를 만화로 옮기는 일이었는데요, 저는 글 작가로 참여했습니다. <어머니>의 장면들을 만화로 번역하는 일은 녹록치 않은 작업이었고, 그런만큼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책을 펼쳐보니 그런대로 읽어줄만 한 것 같지만 제가 의도한 대로 되지 않은 대목도 많네요. ^^; 작가의 말 부분은 특히나 많이 수정되어 실리는 바람에 제 마음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여기 수정되기 전 원래 작가의 말을 옮겨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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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고전을 만화로 펴낸다는 건, 만화를 좋아하는 독자에게뿐만 아니라 어렵사리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고전 작품에게도 분명 매력적인 일일 겁니다. 서로 더 편하게 만날 수 있으니까요. <어머니>도 소설 그대로였다면 만나지 못했을 누군가를 만화가 되어서 만나게 될 테지요. 어떤 모양이든 만남은 행복한 일입니다. 그런데 막심 고리끼가 엄청난 고뇌 끝에 낳은 작품을 만화로 옮긴 제가 충분히 좋은 만남을 주선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만화 <어머니>를 보고 조금이라도 부족함을 느낀다면, 또 어머니와 빠벨과 동료들에 대해 더 궁금한 것이 생긴다면 꼭 소설을 찾아 읽어보기 바랍니다.


어쨌든 1900년대 초반 러시아로 시간여행을 떠나게 된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힘들게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힘든 사람들이 있다면, 심지어 대부분이 힘든 사람이라면 뭐라도 원인이 있겠지요? 가뭄도 아니고 홍수도 아닌, 부패한 권력자들과 돈을 사람보다 중히 여기는 자본가와 지주가 바로 원인이었습니다. 당시 노동자들과 농부들은 하루종일 일해도 먹고 살기 어려웠는데, 권력자(왕과 귀족)와 자본가(사장)와 지주(땅 주인)들은 일하는 시간은 훨씬 적은데도 훨씬 풍족한 삶을 누렸어요. 뭔가 이상하죠? 그럼 노동자와 농부들이 더이상 힘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어머니>의 주인공 빠벨과 그 동료들도 이런 질문을 했고 답을 찾았습니다. 빠벨의 어머니는 힘든 줄만 알았지 그 원인을 캐볼 생각은 못했는데, 빠벨을 통해 원인을 깨달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막심 고리끼는 고통받지만 이유는 모르고 사는 보통 사람들을 대표하는 인물로 어머니를 세우고 그녀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갑니다. <어머니>가 발표되고 나서, 러시아 사람들은 이 이야기에 열광했습니다. 엄청난 사랑을 받았지요. 바로 자신들의 이야기였으니까요.


하지만 오늘날 한국에서 사는 여러분에게는 이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로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래도 할 수 있는 만큼 등장인물들의 상황과 마음을 헤아려보도록 해요.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시각으로 자신의 주변을 둘러보아요. 힘들고 고통받고 고민하는 사람이 있나요? 그렇다면 분명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다른 누군가, 다른 어떤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그걸 고민해 보고 해결하려 애써 보면 좋겠어요. 그게 막심 고리끼의 고통스런 이야기가 오랜 시간을 기다려 여러분을 만난 이유일 거예요.


이 자리를 빌어 마음을 전하고픈 분들이 있습니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엄청나게 멋진 만남을 여럿 만들어 준 박용희 언님과 내 친구 홍경한, 두 분에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조금 멀리 살고 있는 동생 아랑에게 오래간만에 사랑한다는 말을 전합니다. 우리 집 두 고양이와 아내 바라에게 함께 살아주어 고맙다는 말을 속삭입니다. 바라와 함께 늘 찾아가고픈 곳이 있습니다. 제주도 강정, 구럼비 그 바다를 그립니다. 그 사람들과 함께 아픕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예수님. 이미 돌아가신 당신들께 받고 배운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받고 배운대로 살겠습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래는 이 작업을 위해 참고한 <어머니>의 판본들입니다.

찾아보니 <어머니> 만화는 제가 작업한 책이 처음인 것 같더군요.

만화로 나온 작품이 청소년 대상인만큼,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판본들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물론 뼈대는 열린책들 판본(신/구 모두)이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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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필, <검둥이 이야기> 1, 2, 길찾기, 2013

나는 윤필이 <야옹이와 흰둥이>로 데뷔하며 웹툰 세계에 불어넣었던 새롭고 남다른 숨결을 잊을 수가 없다. 재미와 웃음 코드가 대세이던 시절, 윤필은 감동이라는 말로만은 설명되지 않을 어떤 감응을 작품 속에 담고 찾아왔다. 거의 유일하게 비슷한 감응을 선사하던 <신과 함께>의 주호민 작가가 그를 발견하고 트위터에서 추천했던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을 것이다. <야옹이와 흰둥이>에 이어 <흰둥이>로 일하는 사람과 동물들의 삶을 착하면서도 정직한 시선 속에 담았던 그가 이번에는 <검둥이 이야기>로 돌아왔다. 이전 작품들보다 더 진지하고 더 아픈 감응을 촉발하지만 부담스럽지 않다. 더 깊고 긴밀해진 그림과 문장의 만남이, 또 이야기의 힘이 독자를 자기도 모르는 새 울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 아니다. 그 눈물을 닦고 책장 너머로 시선을 돌리면 수많은 검둥이들이 환히 드러나 보인다. 내가 미처 보지 못하고 있었던 세계를 만나는 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검둥이 이야기>의 힘이다. 이 풍성한 만남을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레이 폭스, <한 사람>, 미메시스, 2013

이 특별한 만화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한 사람>(원제: One soul)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독자를 감응케 한다. 맨 처음 작품을 펼치면 검은 칸들이 가득 차 있다. 의아함 속에 페이지를 넘기면 펼침면 좌우 18개의 구획된 칸 속에서 흰 점들이 피어난다. 생명이다. 그 각각의 생명이 살아가는 일생이 그 칸 안에서 이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독특한 방식으로 묘사되는 18개의 인생을 펼침면 안에서 한 눈에 조망하고, 또 페이지를 넘기며 그 성장사를 목도하는 것은 실로 놀라운 경험을 제공한다. 흡사 나의 전생과 후생을 한 눈에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신이 되어 인간세상을 내려다보는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읽기 경험 자체도 특별하다. 최소 20회를 읽어야 온전한 이해가 가능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기존 만화의 문법을 뛰어넘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읽기의 방식까지 창출해낸 것이다. 물론 그만큼 낯설고 다소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그 낯섦이야 말로 기쁨이며, 그 낯섦을 넘어 작품을 조금씩 알아가다 보면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다. 



이희재, <낮은풍경>, 애니북스, 2013

나는 풍경 바라보기를 즐기지 않는다. 산과 바다가 주는 풍광은 숭고하지만, 내가 보고 겪고 살아야 할 것은 우리네 인간들의 삶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빅이슈>에 연재되고 있는 ‘빅판이 있는 풍경’ 코너는 새로웠다. 자연만이 아닌 사람이 담긴 풍경이어서다. 한국 만화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어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이희재 선생님의 풍경화첩, <낮은 풍경>도 그렇다. 자연만이 살아있는 경치로서의 풍경이 아니라, 사람과 문화가 살아있는 진짜 풍경이 그의 친숙하고 농익은 붓질 속에 담겨 있다. 그가 동료 원로 만화가들과 함께 미얀마와 중국 심양과 등을 여행하고서 남긴 풍경을 보다 보면 진짜 <꽃보다 할배>가 여기 있었구나 싶기도 하다. 작곡가 윤이상의 생가를 찾아가 남긴 꼭지는 묘하게 민족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국내의 풍경 인사동, 남대문, 부여 등등도 모두 사람과 건축물과 자연이 한데 담겨 인간을 드러낸다. 백미는 역시 촛불(2장)이다. 2008년 촛불의 자리에서 이 60대의 만화가가 포착한 시민들의 밝고 따뜻하며 진지한 표정들은, 실로 뜨겁다. 이 풍경, 이희재가 낮은 데서 그린 이 풍경 속에 발을 디딘 이후로, 나는 더 이상 풍경을 자연을 담는 낱말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빅판이 있는 풍경’에서도 이희재 작가의 꼭지를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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